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90
89화 학이 움직일 때
죽음을 선고하는 존재의 등장에 취죽 선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최악이구나…….’
무애가 학이라 지칭한 이 세력들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취죽 선생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암중 세력인 이자들은 아직 존재가 겉면으로 드러난 바가 없다. 그렇다는 건 내가 죽었을 시 이들이 용의자로 지목될 일이 없다는 의미.’
최근 취죽 선생은 정파와 사파를 오가며 들끓는 분위기를 다독이는 데 앞장섰다.
취죽 선생이 관(官)의 인물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취죽 선생이 여기서 암살을 당한다면 정파와 사파 그리고 관을 이어 주던 구심점이 사라진다.
동시에 여태껏 과격한 움직임을 보이던 사파가 용의 선상에 오르게 될 것이다.
사파에서는 사파 나름대로 항변할 것이고, 이 상황의 배후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마교의 존재까지 끌어들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파의 입장을 생각하면 분명히 그렇게 나올 거다.
그리되어 버리면 암중 세력만이 쏙 빠져나간 채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까지 뒤섞인 분란이 일어남과 동시에 관까지 움직일 것이다.
사천은 그야말로 개판이 된다.
무애가 염려한 그대로의 상황이 만들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쯤에서 나를 노릴 것이라 생각을 해야 했건만…….’
눈앞의 사명만 생각하고 움직이다 본인의 안위를 고려하지 못한 패착이 만들어낸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취죽 선생이 눈을 질끈 감았다.
카앙!
“거기까지.”
쇠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 하나.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파열음과 파장이 만들어낸 섬뜩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뜬 취죽 선생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그림자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취죽 선생이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허도?”
“이야기는 나중에 하세.”
지긋한 나이의 노도인. 그 존재를 앞에 둔 암중 세력의 무인에게서 평정이 깨진 인상이 드러났다.
여유를 버린 상대의 몸에서 일어난 기운이 방안을 격하게 흔들었다.
대응하여 가볍게 휘두르는 듯 보이는 노도인의 검에 천중(天重)의 무게가 실렸다.
콰아앙!
폭음이 일고 사방의 형상이 사라진다.
취죽 선생의 눈에는 주변의 모든 것이 형태를 잃고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마냥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눈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뿐이다.
“허어…….”
두 고수의 일 합을 근거리에서 목도한 취죽 선생의 입에서 감탄인지 넋 놓은 이의 한숨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절대고수의 무공이란 일반인의 눈에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대단하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피부로 와닿을 만큼 가까이에서 느껴본 것은 처음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취죽 선생은 살아서 주변을 보고 있다는 거다.
“……다 날아갔구먼.”
취죽 선생이 고개를 들어 휘영청 달이 떠 있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저 힘 한 번 교환한 것만으로 건물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
그 결과물과 함께 보이는 광경은 사뭇 신비로웠다.
크고 작은 원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가장 전면에 있는 가장 크고 넓은 원 안에 유려한 선 하나가 그려져 있다.
거대한 태극(太極)의 형상.
그 힘의 주인이 손때 묻은 송문고검 한 자루를 비스듬히 내린 채 당당히 서 있었다.
“볼 만하군. 그것이 태극검선이 자랑한다는 대원태극검(大圓太極劍)인가.”
“어디서 온 자인가. 근원을 밝혀라.”
“보고도 모른다니. 실망인데.”
콧방귀를 뀌는 상대의 대답에 노도인, 허도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잡아 물으면 그만이다.”
“킥!”
누가 보아도 분명한 비웃음을 입가에 그리는 상대.
“그대의 역량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흠!”
조롱을 던지는 상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도의 발끝이 땅에서 떠올랐다.
신선의 풍모를 담았다 말해지는 제운종을 펼치며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가벼운 검 놀림에 천중의 무게를 담은 검격이 부드럽지만 빠르게, 그리고 무겁게 뻗어나갔다.
느리면서도 빨랐고, 눈에 보이는 듯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취죽 선생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딱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현묘함이 가득한 무공.
그 뒤를 사방에 뻗어있는 태극의 원이 요동치며 따랐다.
원을 그리는 기운들 하나하나가 노도인과 합을 맞춰 움직이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했다.
그야말로 압도적!
그런 공세에 대응하는 상대의 움직임은 간단했다.
쾅!
저돌적으로 부딪친다.
한순간 벼락이라도 된 것마냥 푸른 힘을 폭발적으로 터트리며 장대한 원의 흐름과 격돌한다.
바닥에 깔려 있던 먼지들이 들썩 일어나 춤을 추고, 사방에 일진광풍이 몰아친다.
범인(凡人)인 취죽 선생으로서는 눈조차 뜨기 힘든 힘의 향연이었다.
그런 가운데 노도인, 허도는 뭔가 손해라도 본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고오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그 나이가 되도록 깨닫지 못했나.”
상대가 허도진인을 향해 이죽거렸다.
역량의 차이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취죽 선생은 불현듯 자신이 본 힘의 방향을 떠올렸다.
저돌적으로 직선적이었던 상대의 공세가 어느 방향이었는지.
“주고받은 셈 치도록 하지. 어쨌거나 허도진인, 그대가 있는 한 내가 저 인물을 죽이기는 어렵다는 걸 알았으니.”
취죽 선생이었다.
상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잡고 싶다면 취죽 선생을 버리라고. 그렇기에 허도진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던 것이고.
그렇게 뜻을 분명히 한 상대가 뒤로 한 걸음 훌쩍 물러났다.
의미 없는 소모전에 뜻이 없다는 듯 물러나는 상대를 보며 허도진인이 물었다.
“그대가 학인가?”
“그랬다면 너희들에게도 희망이 있었겠지.”
흐릿하게 흐려지는 상대의 신형과 함께 그 자리에 남겨지는 말이 잔향처럼 남았다.
“하수인에 불과한 자의 기량이 이 정도라……. 몇 해를 고생하고도 꼬리조차 잡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군.”
그 잔향이 남긴 무게감에 허도진인이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렸다.
“허도, 자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군.”
“무애의 부탁이 있었네.”
“과연.”
자신이 간과했던 부분까지 생각한 연자염의 안배에 취죽 선생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모로 발목을 잡은 것 같군.”
몇 해를 고생한 끝에 잡은 꼬리임에도 자신 때문에 뒤를 쫓지 못했다.
이 정도의 고수가 고작 하수인이라는 것은 이자들의 세력이 작지 않다는 방증이다. 이런 기회가 또 생길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말 말게. 자네는 자네가 할 몫을 충분히 다 해 주었으이. 이는 자염 그 친구라 할지라도 인정할 게야.”
위로 삼아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을 담았기에 취죽 선생은 입가에 떠올렸던 씁쓸한 기색을 일부나마 지울 수 있었다.
“다만, 내 생각이 너무 안일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아. 청풍자가 동행한다 하여 안심했네만, 이런 놈들이 움직이는 거라면 청풍자로는 힘들어.”
“무애의 손자…….”
무애가 허도진인 정도의 인물을 움직였을 때는 분명 연청운의 안위에 대한 부탁도 포함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는 취죽 선생에게 화제를 돌리기라도 하려는 듯 허도진인이 곧장 말을 이었다.
“어디서 놈이 다시 자네를 노릴지 모르겠으니 따로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미안하네만 자네도 나와 함께 동행해 주어야겠네.”
“그런 거라면…… 하는 수 없지.”
맡은 일들을 생각하면 무작정 자리를 비우기 힘든 상황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취죽 선생은 허도진인의 제안에 동의했다.
외부가 소란스러운 것이 이 난리통에 관청의 관리들과 병사들이 몰려오는 것 같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기에, 대략적인 지시를 서찰로 준비해 놓는 것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서두르세.”
“안 그래도 그럴 참이네.”
허도진인은 채비를 끝낸 취죽 선생에게 다가갔다.
“사천당가까지라……. 서두르면 내일 해질녘쯤에는 도착하려나.”
“뭐?”
취죽 선생은 하늘을 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
사천당가를 어지럽혔던 소란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반란에 참여했던 배신자들은 모조리 죽었다.
만독신군이 친히 나서서 모조리 녹여 버렸다.
‘이건 뭐 도깨비방망이도 아니고.’
새삼 독공이 대량 학살에 얼마나 뛰어난 무공인지 알 수 있었다.
왜 사천당가가 무림에서 두려운 존재로 군림하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손짓 한 번으로 사람 수십을 녹여 버린 당사자가 내 눈앞에 있다.
“운이 좋았지. 딱 쓸어버리기 좋게 모여 있었으니까. 그 부분에 한해서는 문혁이 그 녀석에게 감사해야 하려나.”
마치 아침 인사라도 건네는 사람처럼 상쾌함이 가득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직접 사람을 녹여 죽이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크게 도움을 받은 친우의 이야기를 꺼내는 줄 알겠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지?’
상식선에서 기준을 잡기 어려운 유형에 머릿속에서 뭔가 선이 오락가락했다.
[천마 그 양반이랑 죽이 잘 맞겠군.]‘아!’
비교 대상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뭔가 떨떠름한 어조로 말을 꺼내는 장삼풍 사부의 언급에 나는 대충 누구를 생각하며 기준점을 잡아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천마 사부가 내 눈앞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부정맥인가?’
왜 갑자기 심장이 이상하게 꿈틀대고, 목이 말라오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알고는 있는데 굳이 이해하고 싶진 않다.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사부.’
“듣던 거랑 좀 다른데?”
내 표정이 좀 심하긴 했던 모양이다.
건들거리며 나를 살피던 만독신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안 잡아먹을 테니.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녀석을 봤는데 내 왜 그러겠나.”
“그렇습니까.”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좋게 생각해야 하나?’
좋은 게 맞겠지?
“사실 총관에게 짧게나마 자네 행적에 대해서 들었을 때는 뭐, 어떻게 이렇게 재수 없는 새끼가 다 있나 싶기도 했다만.”
‘……나쁘게 생각해야 하나?’
무지막지하게 성격이 나쁜 양반이다.
본인도 알면서 은근히 즐기는 것 같다.
장삼풍 사부가 천마 사부와 죽이 잘 맞을 것 같다는 평이 무척이나 피부에 와닿았다.
“자네가 우리 가문을 위해 한 일들은 무척이나 크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뭐든 이야기해 보게.”
“아…….”
그렇게 내가 바라던 말이 만독신군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내가 여기 사천당가에 오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저 말이야말로 그간의 모든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는 대가다.
“사천당가 장인들은 세밀한 물건들을 만드는 데 이골이 난 천하에 손꼽히는 실력자들이지. 어떤 신병이기도 만들 수 있다네. 그게 아니라면…… 미녀도 괜찮겠지. 가문에는 젊고 아름다운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다네.”
나름 포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는지 혹할 만한 제안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천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사천의 분란을 막는 일에 당가가 앞장서 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내가 내민 제안이 의외였는지 만독신군은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욕심이 없구나.”
“…….”
“나는 그 욕심 없이 착한 아이에게 신병이기와 미녀를 선물해 주고 싶은데.”
‘당신은 어느 옹달샘의 산신령입니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내려갔다.
무엇보다.
‘좋은 말인데, 뭔가…….’
어감 어딘가가 식어 있다.
“제 부탁이 싫으십니까?”
“당한 게 있으면 갚아 주는 것이 사내라고 생각하지 않나?”
당한 것.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사천당가의 경향이라고 해도 좋을 특성.
만독신군 역시 매한가지다.
‘이 양반…….’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다.
“사내라면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지요.”
“하하하!”
되받아친 내 말에 만독신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서늘함이 감돌았다.
“이제 네가 좀 싫어지는구나.”
드디어 목소리에 걸맞은 얼굴이 된 만독신군이 나를 지그시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