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
제1화 – 어떻게요?
노인네가 죽었다.
결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눈물이 났다. 어라? 내가 미친 건가?
정신을 차리고 꼼꼼히 확인했다.
먼저 호흡.
확실히 끊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노인네는 작심만 하면 진종일 숨을 닫을 수 있는 괴물이니까.
그래서 지난 이레간 간헐적으로 이어지다 방금 전 중단된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일다경가량 기다렸지만 다시 뛰는 기미는 없었다.
‘정말 죽은 거야, 할아버지?’
좌정한 채로 숨을 거둔 노인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음속으로. 소리 내어 말하면 ‘그래, 이 매정한 놈아!’라는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미쳤냐고?
천만에!
오 년 전에도 죽은 척한 노인네에게 그렇게 물었다가 곤욕을 치렀다. 노인네는 평소엔 한없이 인자한 성품이지만 열을 받으면 무시무시한 폭군으로 변했다. 그럴 때면 간이 오그라들다 못해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젠장, 생각만 해도 오한이 이네.
신중을 기해 반 시진쯤 더 노인네의 유해를 지켜본 나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작별을 고했다.
“잘 가, 할아버지. 나도 이만 가 볼게.”
나는 노인네를 그 자리에 두고 골짜기를 벗어났다.
나더러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욕하지 마시라. 자신의 시신을 석곡을 오가는 금수(禽獸)들에게 공양하라는 건 노인네의 뜻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귀찮더라도 땅속에 묻고 비석도 세워줬을 터였다. 뭐, 후자는 실제로 그랬을 거라 장담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할 도리를 다했다.
그래도 그냥 가기 뭐해서 열 걸음을 옮긴 후 뒤를 돌아보며 노인네의 명복을 빌었다. 평생의 숙원인 우화등선에 실패했으니 가엽지 않은가.
“할아버지의 꿈은 내가 이루어 줄 테니까 편하게 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우화등선이 가능하려면 천지조화지경에 도달해야 하는데 세상을 내 맘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는 힘을 마다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물론 나는 깃털로 화해 선계(仙界)로 오를 생각은 고양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천하를 좌지우지할 신통력의 획득이었다.
***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해가 뜨고 또 졌다. 그러기를 네 차례, 마침내 목적지였던 보양(寶陽)에 이르렀다.
인구가 십만을 상회한다는 대도(大都)는 구 년 전 노인네와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번화하고 번잡했다. 촌뜨기 흉내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화려한 고층 전각들과 이른 아침부터 거리에 몰려나온 각양각색의 행인들을 감상했다. 얼마나 보고 싶은 풍경이었던가.
역시 사람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살아야 했다. 공중을 떠도는 공기만 해도 한결 감미롭지 않은가.
거의 십 년 만에 인세에 나와 감개에 젖은 나에게 누군가 관심을 보였다.
“자넨 처음 보는 거지구먼?”
목소리가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배불뚝이 사내가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내게로 걸어왔다.
“거지라니? 나 말이오?”
내 반문에 배불뚝이가 빙긋 웃었다.
“그럼 누구겠는가?”
“사람 잘못 봤소. 나는 거지가 아니오.”
배불뚝이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자네 행색을 보게나. 거지도 그런 넝마를 걸치고 다니지 않을 걸세. 얼굴은 어떻고. 면상을 덮은 땟국으로 이목구비조차 분간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렇다고 거지라는 건 억지요.”
“허어, 고집이 여간 아니구먼. 그럼 물어봄세. 자네, 수중에 돈은 있는가?”
“없소.”
“직업은?”
“당장은 없소. 하지만 곧 만들 작정이오.”
“그럴 줄 알았네. 여하간 자네 같은 꼴을 하고 그런 처지에 있는 이를 가리켜 흔히들 거지라고 부른다네. 그러니 내 말을 너무 고깝게 듣지 말게나. 더군다나 내가 자네에게 말을 건 건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절을 베풀기 위함이니.”
“무슨 소리요?”
“그러고 다니다 낮부터 슬슬 저자에 기어 나올 흉악한 거지패들에게 걸리면 경을 치를 걸세. 단순히 밖에서 굴러들어온 경쟁자라고 괴롭히는 수준을 넘어 아주 못된 짓을……, 아닐세. 순진무구한 사람에게 굳이 겁을 줄 필요는 없을 테지. 아무튼 내가 자네를 도와줌세. 소싯적에 자네와 비슷한 상황에서 죽도록 고생한 일이 떠올라 남 같지가 않구먼.”
“나를 어떻게 돕겠단 말이오?”
“일단 몸부터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음세. 아, 그 전에 요기를 먼저 해야 하나? 자네, 시장하지 않은가?”
꼬르륵 꼬르르륵.
기다렸다는 듯 내 복부에서 요란한 응답이 나왔다.
배불뚝이가 내 어깨에 돼지 족발 같은 두툼한 손을 얹었다.
“자, 가세나. 참, 통성명을 잊었군. 나는 주태(朱泰)라고 하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오선(吳善)이오.”
대장부 이름이 선(善)이라니, 창피하지 않은가.
실은 이번에 나오면서 천(天)이나 다른 근사한 걸로 바꿀까 고민했지만 내 맘대로 개명하면 오십 년 동안 재수에 옴 붙을 거라던 노인네의 경고가 떠올라 단념했다.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노인네의 예언은 적중률이 너무 높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배불뚝이가 파안대소했다.
“하하핫, 멋진 이름이구먼. 생김새만큼이나.”
나는 배불뚝이의 수작에 응하기로 했다.
입히고 먹여준다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대가로 무얼 바랄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그건 그때 가서 대처하면 그만이었다.
배불뚝이는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무지렁이로 보았을 터이지만 완전한 착각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골짜기에 처박히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노인네를 따라 온 천하를 주유했다. 그러면서 온갖 군상을 접했다. 배불뚝이의 속셈 따위는 머리를 굴릴 것도 없이 바로 간파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병법과 책략에도 능통했다. 삿된 잡학이라 폄하하면서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세상을 알아야 한다며 노인네가 가르쳐 준 덕분이었다. 나는 고리타분한 고학(古學)은 건성으로 하고 그 분야만 파고들었다.
뭐, 그렇다고 열심히 한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그나마 흥미를 가졌던 공부였다는 정도로 해 두자.
***
욕조에 들어가 묵은 때를 불린 후 찬물을 끼얹어 시원하게 씻어냈다. 그런 연후 선반에 놓인 백의를 주섬주섬 입었다. 머리도 끈으로 깔끔하게 묶었다. 그러고서 밖으로 나갔다.
나를 본 배불뚝이가 쭉 찢어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오, 진흙 속의 진주인 줄은 알았으나 이토록 헌앙하다니. 그저 잘생긴 정도가 아니라 참으로 늠름하고 기품이 있구먼. 내 안구가 정화되는 느낌일세그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같잖은 찬사를 늘어놓더니 배불뚝이가 서둘렀다.
“어서 가세나.”
“어딜 말이오?”
“자네에게 소개해 줄 분이 있다네. 원래는 정오경에 갈 생각이었는데 이 모습을 보니 더 기다리기 어렵구먼. 한시라도 빨리 그이에게 보여드리고 싶으이.”
“식사는?”
“조금만 참게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너무 많이 먹어 배라도 나오면 곤란할 터이니. 입 냄새가 날 우려도 있고. 내 이따가 산해진미를 대접함세. 그분을 뵌 후에 말일세.”
“그분이 누구요?”
“나이는 좀 들었지만 아주 매력적인 여인이라네.”
그러면 그렇지. 배불뚝이는 나를 고관대작의 부인이나 첩에게 팔아넘기려는 수작임에 틀림없었다. 지아비의 발길이 끊어진 팔자 편한 여자들의 상당수가 정욕을 해소하는 데 쓸 노리개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약간.
내게 의복과 어울리지 않는 죽립을 씌운 후 배불뚝이가 데리고 간 곳은 부가(富家)의 내원이 아니라 고색창연한 육 층 전각이었다. 이라는 그럴듯한 현판을 달고 있지만 기루임에 분명했다.
흠, 이제 보니 나를 특정 개인이 아니라 뭇 유한부녀들이 공유하는 남창으로 삼을 요량이었군.
보통의 가게들은 영업을 개시할 시각이었으나 밤샘 영업을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기루 내부는 새벽녘의 호수처럼 고요했다.
배불뚝이는 나를 자하옥관으로 들이지 않고 전각을 빙 돌아 뒷마당으로 갔다. 소담한 화원과 소나무 숲을 지나니 기다란 단층 와옥이 나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게. 그분에게 기별을 해야 하니. 혹시 아직 기침을 하지 않았으면 좀 오래 걸릴 수도 있네. 그렇더라도 한식경은 넘지 않을 걸세. 혹시라도 누가 나와서 자네더러 누군지 묻거들랑 백화루(百花樓)의 주 총관이 대기시켰다고만 하게나.”
내 응답을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려 바삐 걸어가던 배불뚝이가 주의를 주었다.
“참, 좀 답답하더라도 죽립은 계속 쓰고 있게나. 부탁함세.”
배불뚝이의 수작이 실로 가소로웠으나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는 그럭저럭 기특했다. 그래서 좀 더 놀아주기로 했다. 주린 배를 채울 때까지만.
마당가의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화사한 봄 햇살을 즐기고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와옥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안에서 들리는 속닥거림이 내 기감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비밀모의를 하듯 낮은 목소리들이라서 관심을 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용이 더 끌렸다.
***
“글쎄, 안 돼, 소향아. 그자는 그 무서운 흑사파의 흉한들마저 허리도 펴지 못하고 쩔쩔매는 고수잖아. 성공할 리가 없어.”
“흥, 그래봤자 똑같은 사내일 뿐이야. 내 위에서 한창 껄떡거릴 때 콱 찔러버리면 돼. 제아무리 고수라도 목에 비수가 박히면 뒈지지 않고는 못 배길걸.”
“제발 그러지 마. 그자가 당할 것 같지도 않지만 백번 양보해 그자를 처치할 수 있다고 해도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야. 네 실력으로는 그자를 즉살할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그랬다 쳐도 그자의 방수들이 너를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그쯤은 각오하고 있어. 너한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알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예월아. 내 얘기를 들어줘서. 덕분에 한결 덜 떨려.”
“……흑흑.”
“울지 마. 그리고 더 이상 말리지도 마. 지난 십이 년간 이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설마 나한테 이런 행운이 올 줄은 몰랐어. 이건 하늘이 내게 준 기회야.”
“그러지 말고 좀 더 신중하게…….”
“아니. 난 이미 결심했어. 그리고 어차피 시위를 떠난 화살이야. 그 악종에게 봉야(奉夜)를 제공하겠다고 했잖아. 이제 와서 취소하면 관주님은 난처한 정도를 넘어 곤경에 처할 거야. 관주님께 폐를 끼칠 순 없어.”
“관주님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면 안 되잖아. 그자의 방수들이 너한테만 책임을 물을 것 같아? 십중팔구 관주님께도…….”
“그만하라니까. 내 결심은 확고해. 그러니, 어맛!”
***
창으로 스며 들어간 나는 나를 보고 놀란 여인들이 본격적으로 비명을 지르기 전에 잽싸게 아혈을 짚었다. 물론 마혈도 빠트리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두 여인은 즉시 사색이 되었지만 눈빛은 사뭇 달랐다. 한쪽은 원독이 뿜어져 나왔고 다른 쪽은 공포만이 그득했다. 나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진정하오들. 소저들을 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밖에서 우연히 소저들의 대화를 듣다가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결례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끼어들었소. 부디 양해해 주구려.”
씨도 먹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눈빛들이 누그러졌다. 진중한 언사에 더해 거지에서 미남 청년으로 탈바꿈한 내 신색이 한몫한 모양이었다. 역시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꾸미고 볼 일이었다.
“이제 혈도를 풀어줄 거외다. 그 전에 소리를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소?”
몸이 마비되어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기에 여인들이 눈만 끔벅거렸다. 별로 미덥지 않았으나 나는 그녀들의 점혈을 해제했다. 누구라도 약속을 어길 양이면 지체 없이 다시 재갈을 물릴 심산이었다.
혀를 놀릴 수 있게 되자 여인들이 동시에 질문을 쏟아냈다.
“공자님은 누구세요?”
“왜 나를 도와준다는 거죠? 그리고 어떻게요?”
나는 감탄했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들이 아닌가. 여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누구의 호기심부터 충족시켜 줄지를 저울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