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04
제104화 – 나갈 필요가 없었잖소?
보통의 경우라면 두 가지 대응 방식을 두고 고민했을 터였다.
도주냐 정면승부냐.
그러나 둘 다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둔중해 보이는 덩치에도 불구하고 용왕은 개세팔천 중에서도 신법만 따지면 으뜸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누구보다 그에게 안겨 보양에서 용궁까지 칠천여 리를 날아갔던 내가 잘 알았다. 구 단계에 들며 내 경공속도도 급증한 선력에 조응해 크게 올라갔으나 아직 용왕에겐 어림도 없었다. 그와의 거리가 사십여 장에 달했지만 전속력을 발한들 그가 작심하고 쫓아오면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아 덜미를 잡힐 게 뻔했다.
그렇다고 용왕과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승산이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방심을 이용해 어찌어찌 눈알 하나쯤은 터뜨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무력으로 그를 꺾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십초도 견디지 못하고 뭉개질 터였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둘 뿐이었다.
전생이냐, 마정의 봉인 해제를 통한 마력의 획득이냐.
강호에 나온 이후 여러 차례 마주쳤기에 어느새 익숙해진 갈림길에서 나는 일단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용왕에게 맥없이 육신을 내주고 내 선령이 깃들 새로운 몸을 찾아 하릴없이 천하를 배회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그 전에 가지고 있는 바를 적극 활용해 어떻게든 살아날 구멍을 만들어볼 참이었다.
하지만 마정을 완전히 깨뜨려 그 속에 깃든 마력을 오롯이 취할 수는 없었다.
그리되면 일시에 용왕과 거의 대등한 전력을 갖추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대가로 ‘나’를 포기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야 모든 기억을 상실한 채 그저 심혼만 보존하는 전생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러니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마력을 취해야 했다. 다시 말해 마정에서 뽑아낼 마력이 현재의 내 선력보다는 조금이라도 아래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선력과 마력이 따로 놀아 죽도 밥도 안 될 터였다.
***
내 수읽기는 이러했다.
첫째, 제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낼 것.
둘째, 용왕이 접근하기를 기다려 양수에서 선력과 마력을 폭사할 것.
셋째, 만약 그가 내 무력에 놀라 물러선다면 그대로 달아날 것. 이 경우는 용왕이 추격을 단념할 것을 전제했다. 그리고 이는 막연한 바람이 아니었다.
용왕은 사생결단을 내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개세팔천 모두와 부딪치고도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과의 비무가 과열된다 싶으면 멋대로 무승부를 선언하고는 손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억지는 아니었기에 서역의 밀왕과 무후를 제외한 모두가 그의 판정을 받아들였다.
밀왕은 용왕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와의 대결에 생사투로 임했고 무후 역시 끝장을 보려 들었다. 용왕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싹싹하게 튀었다. 밀왕과 무후 둘 다 그를 추격했으나 경신만은 고금제일이라고 자부하는 용왕을 따라잡지 못했다.
여하간 그 전례를 보건대 용왕은 본인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려 드는 유형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죽이려다 자신도 손해를 볼 수 있음을 알게 된 그가 도제나 검제에게 나를 떠넘기고 발을 빼기를 기대했다.
세 번째 수순에서 용왕이 다른 결정을 한다면, 즉 내 기습에 의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나를 추살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면 미련 없이 전생을 결할 참이었다. 그 시점에서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저 무림말살의 원념만 갖고 가는 것 말고는.
***
용왕의 출현을 인지하자마자 판단과 결단을 동시에 내린 나는 마정에 흠집을 낼 채비를 했다.
그러나 그러려는 찰나 주춤했다. 사십여 장의 거리를 격하고 날아온 용왕의 고함 소리 때문이었다.
“거기 서라! 너를 해치러 온 게 아니다.”
일순 황당했다. 뭔 헛소리지?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용왕이 나를 현혹하려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기실 그는 굳이 나에게 멈출 것을 요구할 까닭이 없었다. 나보다 훨씬 빠르니 그냥 조금만 더 수고하면 그만이었다.
음성을 먼저 날려 보낸 용왕이 내가 속도를 늦춘 틈을 타 순식간에 내 지척에 이르렀다. 그의 면상을 확인한 나는 결전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럼 뭐 하러 왔소?”
어지간한 장정 머리통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용왕의 큼직한 입에서 뜻밖의 답이 튀어나왔다.
“사과하러 왔다. 아니, 사과를 전하러 왔다.”
어리둥절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용왕은 내 십 보 전면에 내려섰다. 우리 같은 고수들에겐 코앞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도 마정의 마력을 캘지 말지 망설이고 있던 나는 그가 짐짓 뒷짐을 지며 전투 의사가 없음을 드러내자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사과라니? 누가?”
“당연히 내 딸아이지, 누구겠느냐?”
당최 이해난망이었다. 어째서 보름 전에 연놈들과 작당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여자가 이제 와서 용왕을 보내 사과의 뜻을 전한단 말인가.
이미 완벽하게 아물었음에도 그날 그녀의 장공에 바스러졌던 왼팔과 왼 다리에서 극통이 느껴졌다. 나에게 살의로 충만한 장공을 발출하며 그녀가 발했던 시퍼런 안광도 눈에 선했다.
용왕이 내게로 두어 걸음 다가왔다. 나는 눈빛으로 그의 접근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순순히 멈춰선 거인이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도 울어대는 통에 딱해서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오죽했으면 일곱 살 이후 운 적이 없는 내가 덩달아 눈물을 쏟았겠느냐? 아르는 그날의 행사를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다. 네가 살아서 천만다행이지만 자기는 죽고 싶을 따름이라는구나. 직접 와서 네게 무릎 꿇고 빌어야 마땅하지만 차마 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나더러 대신 가달라고 했다. 여보게, 천룡. 아르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수차례 당부했지만, 그 아이를 용서해주면 안 되겠는가? 부디 딸아이의 마음을 편히 해주게나. 그 은혜는 잊지 않음세.”
뒷부분에서 은근슬쩍 말투를 바꾼 용왕을 직시하며 나는 아르가 무슨 이유로 나에 대한 살수를 주도했는지 물으려 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빠져나온 것은 다소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내가 이곳을 지나고 있음은 어찌 알았소?”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었다.
설령 용왕이 십자무련의 문상 못지않은 정보망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기서 나를 잡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에게 내 동향에 대한 보고가 들어갔을 때는 나는 이미 평주를 벗어난 지 오래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용왕이 이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쫓아왔을 가능성도 전무에 가까웠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밟을 확률이 그보다 열 배는 높을 터였다.
용왕은 정확히 내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나를 추적해왔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
용왕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납작한 원판(圓板)이었다. 크기는 보통 사람의 손바닥만 했다. 하지만 솥뚜껑 같은 그의 손에 들어있으니 아이들 소꿉놀이에 쓰이는 앙증맞은 접시 같았다.
“이것 덕분이었네.”
“그게 뭐요?”
용왕이 원판을 든 팔을 뻗었다.
“와서 보게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나는 용왕의 권고에 응했다. 그에게 걸어간 나는 그가 내미는 원판을 받아들었다. 수많은 선들이 그어진 흑색의 완만한 곡면 위에 노란 점이 보였다.
나는 동일한 질문을 던져야 했다.
“이게 뭐요?”
“타르일세.”
하나 마나 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용왕은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 멀뚱멀뚱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물었다.
“타르가 뭐요?”
“타르는 목표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도구라네. 자네가 어디에 있건 삼천 리 이내라면 탐지해낼 수 있다네. 한동안 자네 소재가 뜨지 않다가 중원의 중앙에 와 보니 마원의 북부에서 신호가 잡히더구먼. 그래서 자네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온 걸세.”
기가 막혔다. 이런 기물이 있다니.
“전날 자네가 용궁에 왔을 때, 그러니까 아르와 대면했던 그날, 자네 몫으로 둔 의자의 장치를 이용해 ‘퍼즈’를 심어두었더랬네.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니 자네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걸세. 설사 감지했다고 해도 신체엔 아무 해가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 아무튼 퍼즈를 품고 있으면 언제라도 추적할 수 있다네. 석 달 정도는.”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서 그런 걸 내게 붙였단 말이오? 그때는 공주와 내가 용궁을 나갈 거라는 걸 몰랐을 텐데.”
“그건…….”
말끝을 흐리며 용왕이 내 시선을 피했다.
퍼뜩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군. 당신이 나를 사윗감으로 점찍고서 용궁에 데려간 게 아니라 공주가 시킨 일이었어.”
용왕이 멋쩍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다네. 모두 알려줌세. 참, 이건 내 뜻이 아니라 아르의 청이었네. 하나도 숨기지 말고 이실직고하라고 하더구먼. 그래야 약간이라도 죄를 덜 수 있을 거라며. 아, 그게 자네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덧붙였다네. 자기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면서. 그 말을 하며 또 오열하는데 내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 할 걸세.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네. 나중에 자네도 자식을 가지게 되면 내 심정을…….”
“그 얘긴 됐으니 자초지종이나 말해보쇼. 어디부터 어디까지 나를 기만한 거요?”
“기만이라니, 당치 않네. 우리는 다만 자네를 낚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했을 뿐일세. 아! 낚는다는 건 내 표현일세. 아르와는 관계가 없네. 아르는 단지 자네를 배필로 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어떤 준비를 말하는 거요?”
내가 다시 말을 잘랐음에도 용왕은 노기의 분출을 삼갔다. 아르가 내게 절대로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일 터였다.
기분이 묘했다.
목숨이 경각에 처한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칼자루를 쥐게 된 셈이니.
한편으로는 새삼스레 신기했다.
아르는 어떻게 이 무시무시한 괴수를 순한 양처럼 다룰 수 있는 걸까. 용왕의 말마따나 자식이 생기면 나도 이렇게 행동할까. 내 부모도 비운에 처하지 않았다면 용왕이 아르에게 쏟는 정도의 애정을 내게 주었을까.
용왕의 걸쭉한 음성이 단상에 빠진 나를 일깨웠다.
“자네를 사로잡기 위해 아르는 본궁의 기보(奇寶)인 ‘오치’를 동원했다네.”
“그건 또 뭐요?”
“오치는 이를테면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아니, 그렇게 말하면 무소불위의 공능이 있는 걸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니까, 하아,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응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래, 이렇게 말하면 되겠구먼. 오치는 타인의 호감을 유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네. 누구든 오치에 제대로 걸리면 끌릴 수밖에 없다네. 사내가 미인에게 홀리듯 말일세.”
섬뜩했다. 그렇다면 내가 한눈에 반했던 아르의 눈은 가짜였단 말인가. 오치라는 기물의 힘을 빌려 그녀가 나를 현혹한 거란 말인가.
“아무나 부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닐세. 사실 용궁에서 오치를 쓸 수 있는 이는 내 딸아이밖에 없다네. 엄청난 집중력과 심력을 요하기 때문일세. 자칫 잘못하면 역으로 상대에게 반감만 불러일으킬뿐더러 자신의 심상까지 망가진다네. 효능은 지대하나 부작용이 너무 심각해…….”
“오치가 무슨 기물인지는 대충 알겠소. 그런데 어째서 그걸 쓰고도 바로 나와 합방하지 않고 뜸을 들인 거요? 구태여 나를 데리고 용궁을 나갈 필요가 없었잖소? 내 반응으로 그 수법이 통했음을 알았을 텐데.”
용왕이 양 관주처럼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뜻밖의 사정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