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07
제107화 – 안 그래요?
뻐드렁니 사내는 훌륭한 길잡이였다.
구곡양장 같은 상로(商路)를 탈 것 없이 내가 절벽 위로 뛰어오르고 산을 넘을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요령껏 경로를 수정해 지름길로 인도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벗어나는 데만 짧게 잡아도 보름이 걸린다는 천벽을 두어 시진 만에 가로질렀다.
하지만 나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거산들의 진영을 빠져나온 후 곧장 목적지인 ‘고르’로 가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자시가 머지않았거니와 공기가 희박한 고산들을 지나느라 탈진한 뻐드렁니 사내를 위한 배려였다.
사내는 과묵했다.
내게 불필요한 아부 따윈 일절 하지 않고 길 안내에 필요한 말만 했다. 그렇다고 나를 딱히 어려워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고자 할 뿐인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약간의 사적인 호기심도 생겼다. 하지만 더 깊은 인연 맺기를 마다하는 듯한 그의 의사를 존중해 굳이 말을 섞진 않았다.
운공은 새벽에 마쳤다.
기실 구 단계에 오른 이후엔 자시 운공을 고수할 이유가 없어졌다. 아무 때나 해도 효과가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랜 습성으로 인해 여전히 그 시각만 되면 저절로 좌정해서는 운공에 들었다. 건곤기가 내부를 휘돌며 선사하는 파열의 고통도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차츰 강도가 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앞으로 선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극통은 줄어들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고통이 완전히 소멸되는 날 나는 신선이 될 터였다.
***
고르는 천벽으로부터 직선거리로 일천이백 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민머리 노인에게 들었던 말로는 서역에서도 손꼽히는 대도(大都)라고 했다. 인구가 삼사십 만에 달한다니 중원으로 쳐도 상당한 대처였다.
우리는 해 질 무렵에야 고르에 당도했다. 내 경공 속도를 감안하면 정오 전에 이르러야 했을 테지만 되도록 인적 없는 경로로 가자는 내 요구에 맞춰 뻐드렁니 사내가 우회로를 택하는 바람에 두 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었다.
구태여 서역의 지배자인 밀궁을 자극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서 고르에 든 이후엔 도보로 이동했다.
다행히 따로 변장할 필요는 없었다. 이국적인 풍광으로 가득한 도시엔 나 같은 중원인들은 물론이고 말로만 들었던 서방의 홍인-백인들과 이역의 흑인들도 적잖이 돌아다녔다. 복색도 다양했다. 그러니 주목받을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상당한 시선을 끌었다. 내게 눈길을 준 이들은 전부 여자들이었다. 그들 대다수가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슬쩍 치마를 들어 올려 늘씬한 다리를 내보이는 여자, 혀로 입술을 핥는 여자, 허리를 비틀며 요상한 몸짓을 하는 여자 등등.
처음엔 내 특출한 준수함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그 여자들은 사내라면 노소와 미추를 가리지 않고 꼬리를 치고 있었다.
말수가 극히 적은 뻐드렁니 사내가 입을 열었다.
“쳐다보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달라붙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몇몇 여자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뻐드렁니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뭐라고 소리치자 침을 뱉고는 돌아섰다.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갔기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거리에서의 사소한 경험을 뒤로한 채 우리는 계속 걸었다.
반 시진이나 걸었을까. 얼마나 남았는지 물으려는 찰나 뻐드렁니 사내가 도착을 알렸다.
“다 왔습니다.”
좀 어리둥절했다. 주변엔 다 허물어져 가는 담장과 그 너머의 단층 가옥들뿐이었다. 하나같이 강풍만 불면 날아갈 것처럼 허술한 나무집들이었다.
지금껏 지나온 길에는 궁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으리으리한 건축물들이 수두룩했다. 중원의 상운에 해당하는 거대 정보조직의 수장이라면 응당 그런 곳에 살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의아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뻐드렁니 사내가 무너진 담벼락을 타고 넘더니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거구의 노인이 나왔다. 뻐드렁니 사내는 그에게 두 가지를 건넸다. 하나는 직사각형의 동패(銅牌)였고 다른 하나는 민머리 노인이 나를 위해 써준 소개장이었다.
동패와 서찰을 받아든 노인이 나를 흘끗 보더니 문을 닫고 들어갔다. 뻐드렁니 사내가 나를 불렀다.
“이곳은 ‘부사 이부’와 직통할 수 있는 비처입니다. 장주의 신패를 주었으나 그녀가 친견을 허락할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설사 심사를 통과하더라도 이틀은 대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잠시라도 벗어나면…….”
뻐드렁니 사내는 말을 끊어야 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거구 노인이 다시 나왔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뻐드렁니 사내에게 동패를 돌려주며 무어라 말했다. 그러자 오는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뻐드렁니 사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당장 안으로 모시라고 했다는군요.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공자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물이셨군요.”
‘부사 이부’가 내 위상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뻐드렁니 사내가 대뜸 작별을 고했다.
“저는 이만 돌아갈까 합니다.”
“통역이 필요할 듯싶소만.”
“그녀는 중원어가 유창합니다. 천벽으로 돌아가고자 하신다면 그녀가 저보다 유능한 길잡이를 내줄 것입니다.”
달리 붙잡을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나는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뻐드렁니 사내는 내 팔뚝을 맞잡지 않고 허리만 접었다. 머쓱해진 나는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고맙소. 덕분에 어려운 길을 편하게 왔소. 언젠가 빚을 갚겠소.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는구려.”
“저는 하잘것없는 하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디 하시는 일이 잘 되기를 빌겠습니다.”
나와 뻐드렁니 사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인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몇 마디 내뱉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부사 이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나는 뻐드렁니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노인을 따라 문으로 들어섰다.
***
안 그래도 이상하긴 했다.
문 안쪽으로 인기척이 나긴 했으나 딱히 신경 쓰이는 호흡들은 없었다. 이는 고수의 부재를 의미했다. ‘부사 이부’쯤 되는 이가 곁에 호위들을 두지 않고 있다는 건 뭔가 수상쩍었다.
하지만 복도를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이 풀렸다. 통로 왼쪽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노인은 어김없이 그리로 내려갔다.
계단은 꽤 깊었고 땅속의 암굴은 무지하게 길었다. 나는 전날 양 관주와 매음굴 안의 미로를 지나던 일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굴 곳곳에 침입자를 염두에 둔 차단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앞서가는 노인에게 물었다.
“중원어를 아오?”
노인은 고개만 살짝 돌렸을 뿐 묵묵부답이었다. 알고도 그러는 건지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전자라고 간주하고 질문을 이었다.
“나를 안내한 이에게 그녀가 당장 나를 들이랬다고 했다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소? 노인장이 안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때까지 촌각도 걸리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가 걸어온 길만 그 다섯 배는 될 듯싶소만. 설마 축지법이라도 쓴 거요?”
노인에게선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었다.
한 식경이나 갔을까. 노인이 더 나아가지 않고 오른편의 벽을 밀었다. 그러자 벽이 빙글 돌아가더니 또 다른 암굴이 나왔다. 노인이 그리로 검지를 뻗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가시오. 끝에 이르면 문을 세 번 두드리시오.”
뭐야. 우리말을 할 줄 알잖아.
노인에게 따지려다 그냥 새로운 암굴로 발을 옮겼다. 이번에도 길었다. 점점 의구심이 커져 갔다. 대체 ‘부사 이부’는 이 먼 거리에서 어떻게 보고를 받고 그렇게 신속한 명령을 내렸을까. 설마 내가 이 도시에 들어섰을 때부터 내 정체를 파악하고는 주시하고 있었던 걸까. 그러다 뻐드렁니 사내가 그녀와 직통할 수 있는 비처로 나를 이끄는 걸 알고는 미리 나를 들일 준비를 해 둔 걸까.
그럴 터였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
노인이 말한 ‘끝’에 이른 나는 그의 말대로 벽을 세 번 쳤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천장에 구멍이 생기더니 목소리가 내려왔다.
“올라오시오.”
나는 목소리와 함께 내려온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러자 두 평가량의 작은 석실이 나왔다. 그곳에서도 어깨가 떡 벌어진 노인이 나를 맞이했다. 이제 ‘부사 이부’를 만날 수 있으려나 했더니 이번에도 그를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다.
위로 경사진 나선형의 통로를 끝없이 나아가던 노인이 육중한 철문 앞에서 멈춰 섰다.
“들어가시오.”
나는 군소리 없이 노인이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넓었다.
족히 삼십 평은 되어 보였다. 그러나 중앙에 달랑 의자 두 개만 놓여있어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부사 이부’를 기다렸다. 전날 용궁에서 당한 전력이 있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꺼림칙했다.
또 물을 먹일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부사 이부’가 나타났다. 내가 들어섰던 철문 반대편의 문으로 들어온 여자를 본 순간 나는 당황했다. 당연히 노파일 거라 생각했는데 묘령의 아가씨였기 때문이었다.
민머리 노인이 이르길 ‘부사 이부’는 서역어로 ‘대모(大母)’라는 뜻이라고 했다. ‘큰어머니’로 불린다면 적어도 중년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목전의 여인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스무 살은 넘지 않아 보였다. 열다섯 소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앳된 용모였다.
특별한 주안술(駐顔術)이라도 익힌 걸까. 아니면 본인이 아니라 시녀를 내보낸 걸까.
여인이 둘 다 틀렸음을 알렸다.
“내가 어려서 놀랐나 보군요. 하긴 배 장주에게선 할머니를 보게 될 거라고 들었을 테니. 실은 이 자리를 물려받은 지 오늘로 딱 사흘째에요.”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여인이 내가 아니라 의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앉아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나는 여인의 권고에 응했다. 중간에 놓인 탁자가 없었기에 우리는 서로의 앞모습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볼 수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다소곳이 포갠 여인이 뜻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아자르 사라.”
여인이 나를 시험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지요?”
전혀 몰랐지만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방의 벽 너머에 도사리고 있던 음험한 기운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앉은 의자 바로 아래에 똬리를 튼 두 개만 빼고.
“호위들더러 물러가라는 소리 같소만.”
“아!”
여인이 탄성을 토해냈다.
“맞아요.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를 전임 대모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무리가 암살 시도를 할 거라는 첩보가 들어와 비상이 걸렸어요. 그래서 오 공자를 들이는데도 그렇게 유난을 떨었던 거예요. 사실 이 면담도 다들 극구 만류했는데 내가 고집을 부렸어요. 세상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이가 이역만리에서 몸소 내 집 앞까지 찾아왔는데 어떻게 일신상의 안전을 이유로 그 기회를 스스로 차버릴 수가 있겠어요? 그렇다고 다른 이를 나인 양 내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요. 안 그래요?”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목구멍에 걸려있던 질문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