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08
제108화 – 저기서 무엇을 했나요?
“내가 온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소?”
여인이 쏟아질 듯 커다란 눈을 치켜뜨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양 관주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모양은 좀 다르지만 왕방울 같은 눈에 입술도 두툼한 것이 그녀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습관이 있다면 영락없이 젊은 날의 그녀로 보일 터였다.
“그야 당연히 조금 전 배 장주의 서찰을 받았을 때부터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죠?”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랬소. 서찰이 내가 온 길로 전달되었다면 처음에 나를 들였던 노인이 그렇게 빨리 나올 수 없었을 거잖소?”
“아! 그건 간단해요. 비처엔 이리로 첩지를 바로 보낼 수 있는 장치가 있어요. 거의 화살의 속도로 날아온다고 보면 돼요. 마침 집무실 옆의 수거함에 있다가 거기 떨어진 배 장주의 서신을 집어서 펴보고는 기절초풍했지 뭐예요. 꿈에 그리던 중원의 절대천룡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니.
물론 오 공자가 원래 만나고자 했던 이는 전임 대모일 테지만 어쨌든 나는 어엿한 ‘부사 이부’니까 당사자가 아니겠어요? 고백건대 마치 짝사랑하던 청년의 방문을 받은 아녀자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더군요. 그래서 앞뒤 잴 것 없이 세 번째 단추를 눌렀어요. 최고의 귀빈이니 정중하게 모시라는 지시지요.
오 공자가 이리로 오는 동안 검증은 마쳤어요. 아무리 정교한 인피면구를 부착했다고 해도 ‘사이라’들의 눈은 속일 수 없어요. 그렇더라도 내가 직접 나서면 안 된다고 다들 난리를 쳤지만 가차 없이 물리치고 이렇게 나섰지 뭐예요. 나, 잘했죠?”
다섯 살 아이처럼 칭찬을 바라는 여인의 언사에 나는 실소를 참으려고 애썼다.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수 없으나 두 가지는 확실했다.
첫째, 나를 민머리 노인이 서신에 쓴 대로 ‘마협’이 아니라 ‘절대천룡’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아 여인은 나에 관해 나름 최신의 정보를 쥐고 있었다.
둘째, 정말로 ‘부사 이부’ 본인이라면 굉장히 과감한 성격이었다. 거대조직의 수장으로서 불청객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면담 요청에 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암살의 위협을 받고 있는 때에.
내가 맞장구를 쳐주지 않고 가만히 있자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창피해. 원래 이런 수다쟁이가 아닌데 너무 흥분한 탓에 횡설수설했네요. 솔직히 지금도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요. 오 공자가 내 앞에 있다니.”
“…….”
내가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여인이 정색했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할게요. 나는 파리나의 새로운 우두머리인 ‘나우’에요. 성은 ‘이둔’이고요. 중원식으로 이둔 소저라고 호칭하는 건 서로 어색할 테니 그냥 여기 식으로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네요.”
문득 아르가 떠올랐다.
“알겠소. 예고도 없이 찾았는데 나를 만나줘서 고맙소.”
“내가 고맙죠. 미칠 듯이 반갑고 너무너무 환영해요.”
두 손을 깍지 끼고 흔들며 호들갑을 떨던 여인이 갑자기 점잔을 뺐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곳을 찾았는지 물어도 될까요? 설마 내 취임을 축하해주러 그 먼 길을 왔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고 전임 대모와 연관이 있을 성싶지도 않고. 그녀가 오 공자를 사사로이 알았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요.”
“소개장을 써준 이로부터 여기 주인이 이곳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안다고 들었소.”
“그래서요?”
나는 단도직입했다.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소. 그리고 그렇다면 현장에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고 싶소.”
여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답을 드리기에 앞서 하나 물어볼게요. 전쟁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나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굳이 속이거나 감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사실을 알려주었다.
“십자무련의 문상한테서 들었소.”
“아! 누군지 알아요. 중원 제일의 책사로 꼽히는 재녀라지요? 그런데 언제 그 얘기를 들었나요?”
나는 질문이 하나를 초과했음을 지적하려다 순순히 답을 주었다.
“보름 전이었소.”
여인이 큰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단하네요. 그렇다면 수리에서 변란이 발생한 지 닷새 만에 소식을 접했다는 것이니. 중원에 앉아서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난들 알겠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반문을 입에 가둔 나는 진도를 나갔다.
“이제 내 질문에 답할 차례 같소만.”
여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럽쇼? 진짜 젊은 양 관주 같지 않은가.
***
여인의 두툼한 입술에서 내가 고대해 마지않던 답변이 나왔다.
“이십일 전 수리 일대에 변란이 일긴 했어요. 지금은 전쟁으로 확대되었고요.”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한창 전쟁 중이란 말이오?”
“그래요.”
“규모가 어느 정도요? 어느 정도의 인원이 전투에 참여하느냐는 말이오.”
“삼왕국과 칠왕국이 전면전을 벌이는 형국이니 합치면 일백만은 되지 않을까요?”
심장이 펄떡거렸다.
일백만이라니!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발산하는 투기와 원념과 공포를 적화로 전환하면 천지조화지경에 필요한 곤기(坤氣)를 단숨에 취득할 수 있지 않을까.
“수리란 곳이 얼마나 머오?”
“여기서 남서로 천이백 마라 떨어져 있어요. 중원의 단위로는 사천삼사백 리쯤 되겠네요.”
헉, 그렇게나 멀다니.
나는 전과를 취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날까 봐 두려웠다.
“당장 전장으로 가고 싶소만. 도와줄 수 있소?”
조바심이 난 내가 보채자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일어섰다.
“그건 어렵지 않지만,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많은 이들이 전란에 휩쓸려 희생될 게 아니오?”
“전쟁을 막고 그들을 구하겠다는 건가요?”
“일단은 전황부터 파악하고 양편의 선악을 판별할 생각이오. 우선 출발하고 싶소. 한시가 급하니 궁금한 건 나중에 물어보구려.”
여인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좋아요. 잠시만 기다려줘요. 출행 전에 원로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니까.”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직접 가겠단 말이오?”
“그럼 누구한테 맡기겠어요?”
“…….”
***
나를 방에 남겨두고 나우가 나간 후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섞인 격렬한 언쟁을 들었다. 소리로 가늠컨대 내가 든 방과의 거리는 대략 십이 장 정도였고 그녀와 격앙된 음성을 주고받는 이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무엇을 두고 싸우는지는 불문가지였다.
나우가 원로들이라고 했던 이들은 직접 나를 전장으로 안내하겠다는 그녀를 만류하고 있을 터였고 나우는 그런 그들을 설득하며 고집을 부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느 쪽도 쉽게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답답했다.
나우는 어째서 조직의 수장답지 않은 행태를 보이는 걸까. 그냥 적당한 길잡이를 붙여주면 서로 편할 터인데.
나는 원로들이 철없는 새 수장의 뜻을 꺾기를, 그것도 최대한 빨리 단념시키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두 가지 바람 모두를 배반했다.
몇 시진이나 지치지도 않고 서로를 치고받던 말들이 뚝 끊기더니 반각 후 나우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방으로 돌아왔다. 의기양양이란 이런 것임을 웅변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서 나는 그녀가 승리했음을 알았다.
“다 됐어요. 이제 가요.”
“우리 둘만 말이오?”
“달리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요?”
“수리란 곳이 사천삼백여 리나 떨어져 있다고 했잖소?”
“그런데요?”
“가본 적이 있소?”
“아뇨.”
“…….”
“하지만 가는 길은 알아요.”
“그러지 말고 지리에 밝은 이를 구하는 게 어떻겠소?”
“그게 바로 나예요.”
“…….”
“나를 안 믿는군요. 서운한데요.”
“알겠소. 갑시다.”
나는 나우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기로 했다. 고집불통의 성격임이 분명한바, 설득이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귀중한 시간만 잡아먹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르를 떠올렸다. 그녀도 초행길인데 오천 리가 넘는 장도를 제집 안마당처럼 능숙하게 헤집고 다니지 않았던가. 서역 최대 정보조직의 수장이니 나우도 그녀 못지않은 재주가 있을 터였다. 그래야 했다.
***
우왕좌왕. 혹은 갈팡질팡.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본색을 드러낸 나우는 최악의 길잡이가 무엇인지 내게 가르쳐주었다.
저 산으로 가래서 날아가면 잘못 짚었다며 도로 돌아와 반대편을 가리키기 일쑤였고 그러다 다시 아까의 산이 맞는 것 같다며 복장이 터지게 만들었다.
나는 어떻게 새보다 빨리 날 수 있느냐며 연신 비명 같은 탄성을 토해내는 그녀를 내팽개치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심력을 소진해야 했다.
하도 열통이 터져 추궁해보니 나우는 고르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고 평생 그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수백 권의 지도책을 암기해 대륙의 지리에 통달했으니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쳤다.
나우는 이제라도 따로 길잡이를 구하자는 내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자기를 무시하지 말라며.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쉴 새 없이 던지는 질문에 침묵으로 응답하며 분을 풀었다.
나와 나우 사이에 형성된 얼음장 같은 공기는 그녀가 타협책을 제시하고서야 풀렸다.
우리는 수시로 도시에 들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우는 지리에 능통한 자들을 물색해 일다경가량 설명을 들었다. 나는 그 시간도 너무 아까워 그냥 그들을 길잡이로 삼고자 했으나 나우는 요지부동이었다.
때아닌 인내심 수행은 기어이 하루를 넘겼다. 자시 운공도 생략하고 달리고 또 달렸건만 다음 날 아침에야 우리는 나우가 ‘비로’라는 이름을 알려준 대하(大河)에 이르렀다. 그녀의 말로는 ‘벌써’ 절반이나 왔단다.
이런 우라질.
염두에 두었던 시간을 네 배 이상 초과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꾸역꾸역 서진(西進)했다. 그러다 다시 해가 지고 밤이 왔다.
나는 그날도 운공에 들지 않고 계속 달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우는 야간에는 갈 수 없다고 우기지는 않았다. 달빛도 밝았다.
달이 아직 서천에 걸려있는데 해가 떴다. 나는 그 해가 달이 있던 곳으로 갈 때까지 줄기차게 달렸다. 그러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리를 들었다.
***
나는 왼편의 산맥으로 가라는 나우의 지시를 무시하고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전속력을 발했다. 그리고 얼마 후 황홀한 광경을 만났다.
시뻘건 노을이 깔린 하늘 아래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나우를 내려놓았다.
“여기서 기다리구려.”
나우가 ‘잠깐만요.’라며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전장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수만 명의 군사가 뒤엉킨 싸움터는 이미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상단전에 활화산처럼 솟구친 적화의 불길에 전율하며 전장을 누볐다. 서로 죽이느라 혈안이 된 병사들은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반 시진 가까이 전과를 차곡차곡 챙겼다.
이윽고 해가 떨어졌다.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소수의 생존자들은 들판에 수많은 사상자들을 남기고 퇴각했다. 나도 산기슭에 두고 온 나우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수리까지는 아직 일천오백 리는 더 가야 해요. 저들은 일왕국과 사왕국의 정병들이에요.”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얻은 게 중요하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너무나도 흡족한 결말이었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나우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러더니 전에 없이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저기서 무엇을 했나요?”
나는 적당한 답을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진실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