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54
제154화 – 좀 만져 봐도 되겠소?
“검룡은 여기 밀궁에서 태어났소.”
양천의 의도와 달리 전혀 극적이지 않았다. 내 무덤덤한 반응에 당황했는지 양천이 멋쩍게 웃었다.
“전후 맥락을 짚어 미리 짐작한 모양이구려.”
“이곳 출신인 검룡이 어떻게 검림에 든 거요?”
“그의 조부가 천뢰검맥(天雷劍脈)의 검호였다고 하오. 검제 어르신과는 사형제지간이었다더군요. 두 분 다 무재가 유별나게 출중해 천뢰검맥에서는 최고의 잠룡들이 동시대에 나왔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들었소.
두 분은 스무 살 때까지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치열한 경쟁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오. 그러다 약관이 지나면서부터는 검제 어르신 쪽이 앞서 나간 모양이오. 사오 년간 죽을힘을 다해 쫓았지만 도저히 그 어른을 따라잡을 수가 없음을 절감한 검룡의 조부는 실의에 빠졌소.
검제 어르신과의 격차가 줄기는커녕 갈수록 벌어지자 검룡의 조부는 심마에 들었다오. 그러고서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은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검맥을 뛰쳐나왔다고 했소. 그 이후로 천하를 떠돌다 나중에는 서역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하오. 이방인인데다 검까지 차고 있으니 이런저런 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때마다 상대를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바람에 점점 악명을 떨치게 되었답디다.”
나름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어디까지 사실일까. 나는 나중에 나우에게 확인해보기로 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녀는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를 흘끗 바라본 양천이 말을 이었다.
“그러다 뜻밖의 강적과 조우하게 되었소. 밀왕이었소.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일부러 그이를 찾아온 게요. 서역의 사정에 문외한이었던 검룡의 조부는 그가 누군지 알 길이 없었소. 그저 지금껏 상대했던 자들과 동급, 동류로 여겼던 모양이오. 하지만 그와 붙자마자 역불급임을 깨달았소.
유랑검객으로 천하를 배회하는 동안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섰던 검룡의 조부는 변변한 대항도 못 해 보고 불과 몇 초 만에 밀왕에게 제압당하고 말았소.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데 밀왕은 그이를 즉결처분하지 않고 모처로 끌고 갔답디다. 여기 밀궁이었소.”
“밀왕이 검룡의 조부를 왜 살려준 거요?”
“중원의 무학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더군요. 비록 가볍게 꺾었지만 그분의 검공이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했던 듯하오. 밀왕은 그분에게서 비학을 캐내려고 잔인한 고문을 가했소. 하지만 그분은 끝까지 꿋꿋하게 버텼다고 하오. 단전은 진즉 파괴되고 근맥도 파열된 데다 사지까지 차례로 잘렸음에도 중원 무인의 기백을 보여주었다더군요.
오기가 생겼는지 밀왕은 그분을 처분하지 않고 집요하게 괴롭혔소.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는 비열한 술책을 들고 나왔소. 그분과 여기 여인을 강제로 결합시킨 후 그들의 후세를 내세운 것이었소. 원치 않은 이세였으나 자기 핏줄에 이끌리는 건 인지상정인지라 그분도 마음이 흔들렸던 모양이오. 그러나 끝내 그 아이에게도 검결을 알려주지 않았소.”
내 감상을 바라는지 양천이 말을 멈췄다. 나는 그의 바람을 묵살하고 침묵을 지켰다.
쓴웃음을 입술에 매단 양천이 얘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자식의 아이가 태어나자 얘기가 달라졌소. 내리사랑이라고 손자에 대한 애정에는 저항할 수 없었던 게요. 몸뚱이만 남은 흉측한 몰골임에도 손자는 스스럼없이 그분에게 다가와 팔이 없어 그를 안지 못하는 없는 그분을 위로하듯 어루만졌다고 하오.
살갑게 구는 데다 손자는 매우 영특하기까지 했소. 그분은 평범한 무재였던 아들과는 달리 손자가 자신보다 뛰어난 기재임을 알고는 욕심이 생겼소. 손자라면 그분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던 사형을 능가할 수 있으리란 기대에 결국 고집을 꺾었소.
그렇더라도 밀왕이 손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겠다는 확약을 하지 않았다면 사문의 비학을 넘겨주지 않았을 게요. 그분은 손자가 중원과 서역을 아우르는 절대자가 될 거란 희망을 갖고 검결을 전수했소. 그러고는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소.”
나는 원숭이를 닮은 검룡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못지않게 복잡한 출생의 내력을 가지고 있었군.
***
“검룡은 어떻게 중원에 오게 된 거요?”
“그가 밀왕에게 청했다고 하더이다.”
“밀왕의 지시가 아니었단 말이오?”
“그렇소. 홀로 조부가 일러준 검공을 수련하던 검룡은 열두 살 어림에 한계를 느끼고는 제대로 된 지도를 받기를 갈망했다고 하오. 그래서 밀왕에게 수 차례 중원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답디다. 훗날 중원 무림의 일인자가 되어 동방대륙을 바치겠다며. 밀왕은 금제를 두는 조건으로 중원행을 허락했다고 하오.”
“무슨 금제?”
“그건 조금 이따 얘기해 주겠소. 내가 이곳을 찾은 사유와 관련 있으니. 아무튼 밀왕의 용인 하에 두 명의 호위를 대동하고 중원으로 떠난 검룡은 곧장 검림에 가서 검제 어르신을 비롯한 천뢰검맥의 원로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소.”
“서역에서 왔음을 토설했단 말이오?”
“그렇지는 않소. 밀왕과 그 부분을 함구하기로 약속했던 데다 본인도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하오.”
“그래서 뭐라고 사기를 친 거요?”
“……말이 좀 거북하구려. 검룡을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 그의 입장을…….”
“표현이 거슬렸다면 사과하겠소. 여하간 그가 그들에게 뭐라고 말했다는 거요?”
“천하를 방랑하던 조부가 심산유곡에 은신해서는 인연이 닿은 여인과 가정을 꾸렸고 그이들의 자식으로부터 어찌어찌 자기가 나왔다는 식으로 둘러댔다고 하오.”
“검제를 비롯한 검림의 원로들이 그의 주장을 믿었소?”
“그랬다고 하오. 어쨌거나 그분의 후손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직전제자에게만 전해지는 검결을 아는 데다 외모가 그분과 판박이였다니 말이오.”
“그래서 그를 받아들인 거군.”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었소. 검제 어르신은 마치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것처럼 크게 기뻐하고는 무재도 검증하지 않고서 검룡을 제자로 삼았소. 그러고는 전심전력을 다해 자신이 이룬 절대검공을 지도해주었다고 하오. 검룡 또한 진심으로 그 어른을 사부로 받들며 청출어람으로 보은하고자 수련에 매진했답디다.”
“사뭇 감동적인 사연이군.”
내 말투에서 비꼬는 기색을 감지한 양천이 쓰게 웃었다.
나는 진도를 나가기 전에 청력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폈다. 기이했다. 양천과 대화를 시작한 지 일다경 이상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근처에 얼씬거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양천이 손목에 두른 금팔찌가 그토록 대단한 물건이었던가.
그렇더라도 밀왕이 잠잠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설마 내가 두려워 도주한 걸까.
그러고 보니 양천이 서역어를 구사한 것도 뭔가 찝찝했다. 십전공자라는 별호의 소유자답게 무공만이 아니라 학식 방면으로도 뛰어난 성취를 자랑했지만 언제 이역의 언어까지 익혔단 말인가.
“검룡은 기식이 엄엄했을 텐데 꽤 많은 얘기를 쏟아냈군.”
내가 아까부터 꺼림칙했던 부분을 지적하자 양천이 순순히 수긍했다.
“나도 나중엔 좀 신기했소. 당시엔 경황이 없어 인지하지 못했는데 그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내용을 전달받았다니. 하지만 그때는 순식간에 끝난 듯한 느낌이었소.”
“그래서 그의 부탁이라는 게 뭐였소?”
“부탁 자체는 간단했소. 두 개의 기물을 밀왕에게 돌려주라는 것이었으니. 그런데 전제 조건이 다소 까다로웠소.”
나는 귀가 솔깃했다. 두 개라면 금팔찌 말고 하나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혹시 환상환이 아닐까.
내가 물어볼 틈을 주지 않고 양천이 말을 이었다.
“검룡은 나더러 그가 숨을 거두면 부탁부터 들어달라고 애원했소.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 이상한 요구를 덧붙입디다. 서역까지 가는 동안 절대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라는 것이었소.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물으니 그제야 털어놓습디다. 단주의 제지가 두렵다고.
그러면서 검룡은 단주의 근황을 전했소. 아마도 폐관수련장 밖에서 누군가 전음으로 알려준 모양이오. 단주가 도제를 꺾고 천하제일인의 반열에 올랐다며, 지금쯤 온 천하에 단주의 정보망이 깔려있을 거라고 했소. 그러고는 내가 검림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히 단주에게 붙들릴 터이고 내게서 사정을 들은 단주가 기물 송환을 막을 우려가 크니 일단 자기 부탁부터 들어주기를 간청했소.
돌이켜 보건대 그의 급작스러운 주화입마는 단주의 위업에 충격을 받은 결과였던 듯싶소. 아무튼 그가 전하는 놀라운 소식에 얼이 빠진 상태에서 나는 그의 원대로 하겠다고 맹세했소.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어른들을 불러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그렇게 했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검림은 비통의 바다에 잠겼고 내 손엔 검룡에게 건네받은 두 개의 기물이 들려 있었소.
어른들께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검림을 나온 나는 그의 당부에 따라 은밀히 이동했소. 단주가 내 서역행을 막으려 들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설득할 겨를이 없었고 이미 약속했으니 지킬 참이었소. 그래서 이곳까지 오는 데 한 달이나 걸린 것이었소.”
“한 달이나 일만 리 장도를 지나온 사람치곤 신색이 너무 훤하군.”
양천의 입술에 여지없이 쓴웃음이 걸렸다.
“거지꼴로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닌지라 반 시진 전에 개울에서 의복과 몸을 깨끗이 씻었더랬소.”
“서역어는 언제 익혔소?”
“예전에 서역과 교류하는 상인에게서 조금 배웠소. 잘하지는 못하오.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한 수준이오.”
변죽을 울리던 나는 핵심으로 들어갔다.
“밀왕이 검룡에게 가했다던 금제에 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소만. 그리고 그가 돌려주라고 했던 물건들 중에 한 가지는 뭐였소?”
양천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든 것은 구리반지였다. 빛바랜 홍옥이 박혀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이 반지는 서역의 팔대신물 중 여의주와 더불어 으뜸을 다툰다는 환상환일 터였다.
양천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이게 바로 그 금제요. 금천과 함께 밀궁에 돌려주어야 할 기물이기도 하고.”
나는 반지를 빼앗아 들고픈 충동을 누르며 물었다.
“거기에 무슨 금제가 있다는 거요?”
“밀왕은 이 반지를 이용해 검룡의 심혼에 주문을 걸었다고 하오. 그의 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그러지 않을 시엔 뇌가 터지도록 조치해두었다는 게요.”
“그렇다면 굳이 반지를 검룡에게 줄 필요가 없었을 텐데.”
“반지는 한 쌍이었소. 일종의 주종관계였던 모양이오. 주인 역할을 하는 반지를 쥔 쪽이 반대편 반지 소유자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다고 했소.”
일순 소름이 끼쳤다. 천지쌍고와 흡사하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석연치 않았다. 나우에게 듣기로는 환상환은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흑막이 있는 걸까.
“검룡이 이 반지의 용도에 관해 따로 남긴 얘기는 없소?”
실망스럽게도 양천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내가 들은 건 이게 전부였소.”
할 말은 마쳤다고 여겼는지 양천이 그의 관심사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단주는 여기에 어인 일이오? 아까 단주를 보고는 머릿속이 하얘졌지 뭐요. 나를 따라왔을 리는 만무하고, 설마 밀왕에게 도전해 그를 꺾고 서역마저 평정하려는 게요?”
나는 일단 시인했다.
“그럴 참이긴 한데, 그 반지 좀 만져 봐도 되겠소?”
내 대답에 눈을 부릅뜨면서도 양천이 선뜻 반지를 내밀었다.
나는 그가 건네준 반지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중요한 건 겉이 아니라 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정의 투시안으로 반지 내부를 살폈다. 그러자 바로 기시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