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60
제160화 – 가도 되겠소?
내 꼴을 본 건곤장은 경악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 사막에서 누가 자네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는 동문서답했다.
“미안하지만 운공에 들어야겠소. 좀 오래 걸릴 거요.”
“아, 그러게나. 어서 들게.”
그 자리에 좌정한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하늘이 석양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거의 만 하루 동안 운공에 든 것이었다. 근심 어린 건곤장의 음성이 고막을 두드렸다.
“괜찮은가, 마선?”
“끄떡없소. 밤새, 그리고 진종일 뙤약볕에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괘념치 말게. 그런데 대체 누구하고 싸운 겐가? 설마 개세팔천 중 누군가와 붙은 겐가?”
“그건 아니오. 근처에 사는 도가의 기인과 가볍게 손을 섞었을 뿐이오.”
“허어, 세상은 넓고 강자는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다더니,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가 가볍게 손을 쓰고도 자네에게 그런 부상을 입힐 수 있다니. 온 강호가 경동할 일일세그려. 자네가 그 지경이었다면 그이는 운신불능에 처했겠구먼.”
“그렇지는 않소. 그만 갑시다.”
재수 없는 늙은이에 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다소 무례하게 대화를 종결지었다. 내 심기를 헤아린 듯 건곤장은 별반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
사막이 끝나고 서천의 삼림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경신을 멈추었다. 이천여 리를 강행군한 건곤장에게 휴식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운공에 들 작정이었다. 이번에도 오래 걸릴 거라 건곤장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실제로 나는 이틀 가까이 운공을 지속했다. 그러면서 아자에서 얻은 건곤기를 온전히 체화했다.
운공을 마치고 성과를 점검한 나는 고무되었다. 지금 재수 없는 늙은이와 다시 붙는다면 마력이 먹히지 않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능히 그를 밀어붙일 수 있을 터였다.
이제야말로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된 것 같아 뿌듯한 한편 음울하기도 했다. 이렇게 강해져도 무후에겐 굴종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날짜가 하루밖에 남지 않았기에 나는 건곤장을 안고 달리기로 했다. 호원까지는 아직 삼천팔백 리를 더 가야 했다.
야천으로 비상한 내가 전속력으로 비행하자 건곤장이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굉장하구먼. 사상 최고의 경공 대가라는 용왕도 이 정도는 아닐 듯싶으이. 자네는 경신에서도 이미 극점에 올랐구먼.”
과찬이었다. 현 시점에서 경신만 따지면 용왕과 나는 막상막하일 터였다. 그에게 뒤처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뒤로 떨굴 수 있을 성싶지도 않았다. 그를 따돌리려면 선력이 좀 더 증강되어야 했다.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용왕이 지워지고 대신 검룡이 나타났다. 그가 달아날 때 선보였던 기절초풍할 속도를 상기하자 절로 전율이 일었다.
그는 팔대신물의 하나라는 광구를 부렸음이 틀림없었다. 반 시진에 삼천리를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아르의 말을 터무니없는 과장이라 여겼는데 실제로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빠르기였다. 지금도 꿈에서나 가능할 속도였다. 설령 신선지경에 이르고 천마의 마력을 남김없이 취한다고 해도 광구를 따라잡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다만 한 가지 희망은 있었다. 만약 재수 없는 늙은이나 밀왕이 구사했던 공간 이동의 비술을 터득한다면 어떨까. 그러면 광구와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광구를 앞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들떴다.
***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에 당도한 것은 새벽이었다.
삼경까지도 불야성을 이루는 호원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먹물 같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호원 초입에서 건곤장을 내려놓은 나는 그의 경신에 맞춰 십자무련으로 향했다. 서문(西門)을 지키고 있던 경비무사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귀신을 본 양 대경실색했다.
“소란들 떨지 말거라. 조용히 들어갈 터이니 보고도 구두로 하고. 상급자들에게도 이 점을 주지시켜라. 그럼 수고들 해라.”
건곤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동선(動線)을 따라 은밀한 소요가 번졌다. 문상의 처소로 가는 동안 번번이 순찰대의 무사들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갈수록 귀가 간지러워 나는 청력을 의도적으로 줄였다.
문상은 고월서각이나 전날 만났던 삼 층 전각이 아니라 다른 곳에 들어있었다. ‘유취(乳臭)’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소담한 와옥이었다. ‘젖 냄새’라니, 왜 저런 이름을 붙였을까.
새벽임에도 완벽한 의관을 차려입은 문상이 문밖까지 나와 나를 맞이했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녀에게 나를 인계한 건곤장이 미간을 찌푸려 보이고는 그의 거처인 오죽채로 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상이 들릴락 말락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이에게 토설했군요.”
그녀의 음성엔 질책의 기미가 들어있었다.
“약속을 안 지키면 후회하네 마네 하며 겁박한 게 누구요? 그 오만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의아해하기에 알려주었을 뿐이오.”
“언니도 부주의했지만 오 공자도 경솔했어요. 아무튼 이미 쏟아진 물이니 어쩔 수 없지요. 태상봉공의 입이 무겁길 바랄밖에.”
“무후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게요? 그 언사는 문상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 같은데.”
“천만에요. 나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어요.”
“믿기 어렵구려.”
“믿든 말든 오 공자의 자유에요. 이제 쓸데없는 입씨름은 그만하고 언니에게 가요.”
나는 와옥으로 돌아서는 문상을 붙잡았다.
“때가 되면 올 텐데 어째서 진득하게 기다리지 않고 수만 리를 오가도록 노인장을 고생시킨 게요?”
문상의 면사가 애매한 위치에서 살짝 펄럭였다. 코웃음을 친 모양이었다.
“그이를 보내지 않았다면 오 공자가 제 발로 왔을까요?”
뜨끔했지만 일단 시치미를 뗐다.
“당연하잖소? 내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데.”
“다행이네요. 잊은 줄 알았는데.”
문상의 비아냥거림을 응징할 방도가 없었기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녀를 을렀다.
“좋은 시절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오. 내가 금제를 스스로 해결하면 뼈아픈 대가를 치를 터, 그 전에 알아서 푸는 게 어떻겠소? 그러면 이전 일은 불문에 부치리다.”
“미안하지만, 불가해요. 언니가 내 권유를 따를 리도 만무하거니와 설령 그런다고 해도 금제는 해제할 수 없어요. 비가역적인 조치니까요. 일단 몸에 들어가면 사체가 되어서야 그것들을 빼낼 수 있어요.”
“그럴 의사는 있소?”
“물론이에요. 때때로 후회하곤 해요. 지나친 처사였다고. 하지만 당시엔 언니를 설득하려면, 다시 말해 오 공자의 안위를 보장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요.”
“누가 들으면 나를 위해 그런 걸로 알겠구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요소이긴 했어요.”
나는 문상의 면상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녀의 얼굴에선 진위 여부를 가려내기 힘들 터였다.
***
무후에게 이미 내 도래를 알렸다며 문상이 거듭 보채는 바람에 나는 그녀를 따라 와옥으로 들어갔다. 설마 안에 무후가 들어있진 않을 터였다. 예상대로 와옥 내부엔 지난번과 같은 토굴이 나 있었다.
직방형의 입구를 가리키며 문상이 재촉했다.
“어서 가요. 언니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나는 문상을 골려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어두컴컴한 통로로 몸을 날렸다. 선령을 동원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공간을 반각쯤 헤쳐 나가자 광장이 불쑥 나왔다. 곳곳에 박힌 야명주들로 인해 사위가 대낮처럼 밝았다.
무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천 평에 달하는 지하 수련장을 독점하고서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산뜻한 백색무복을 착용한 상태였다. 나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격세지감을 느꼈다. 반년 전 처음 조우했을 때 그녀는 마치 태산을 마주한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녀를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을 안기기도 했다.
두 달 전에도 그보다는 덜했지만 상당한 압박감을 과시했더랬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나에게 발출했던 강대한 내기에 오금이 저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성질 사나운 여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용왕으로 하여금 꼬리를 말고 달아나게 했던 무시무시한 투기(鬪氣)도 선정에 든 내게 하등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내가 칠팔 장을 격하고 걸음을 멈추자 무후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일체의 허례를 생략하고 바로 일전을 치르자는 동작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상수로 둘 터이니 내게 선공을 취하라는 의사표시였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 내 우수(右手)에서 발출된 다섯 줄기의 빛살이 개전을 알렸다.
무후는 강했다.
그녀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나는 어째서 용왕이 그녀를 그토록 높게 평가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결코 창제의 하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극미한 차이나마 그녀 쪽이 위일 듯싶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매번 창제에게 밀린 건 상성 때문일 터였다. 객관적인 무력과 무관하게 밀왕이 나를 꺼리고 내가 재수 없는 늙은이에게 약세를 보인 것처럼 무후도 창제에게 뭔가 먹히지 않는 부분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공, 장공, 권공, 수공 등 손으로 펼칠 수 있는 모든 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무후는 나를 여러 차례 곤경에 빠뜨렸다. 선정과 선령의 공능을 동원한 데다 선력과 마력의 합이 그녀의 공력보다 뚜렷한 우위를 보였음에도 나는 좀처럼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몇 번이나 아찔한 순간을 맞이했다.
나는 변칙일변도인 무후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애를 먹었다. 보다 두꺼워진 기방이 아니었다면 진즉 만신창이가 되었을 터였다. 무후는 내력의 열세를 탁월한 실전 감각과 불퇴전의 투지로 상쇄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밀리는 형국이었다. 이는 내 사전 수읽기와는 정반대의 전개였다.
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었다.
일백 초가 경과하자 무후의 초식들이 되풀이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예측불가의 괴초들이 난무했지만 근본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한편 초수가 진행되는 동안 차츰 그녀의 수법에 적응했던 터라 나는 어느 순간 강력한 반격을 가한 후 단박에 우세를 점했다.
일방적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밀리지 않고 무후를 몰아붙였다. 무후는 필사적으로 응전하며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석벽까지 몰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고도 물경 팔십여 초를 더 버티고서야 무릎을 꿇었다.
가일수를 하면 그녀를 바닥에 뒹굴게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꼴사나운 모습을 강요하지 않고 나는 훌쩍 물러섰다.
멀리 떨어진 나를 응시하며 무후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궁금했다. 어떤 감상을 밝힐까.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여인이니 패배 선언을 듣기는 어려울지 몰랐다. 하지만 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터였다. 마지막 순간 내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망신을 당했을 것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무후의 대응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그녀는 일언반구도 내뱉지 않고 그저 과도한 공력 운용으로 퉁퉁 불은 손을 내저었을 뿐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나가란 말이오?”
벙어리가 아님을 아는데도 무후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계속 손사래만 쳤다. 그녀의 무공과 승부 근성에 탄복했던 나는 그러한 태도에 실망했다. 하지만 그녀를 자극해 이로울 게 없는지라 순순히 물러났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니 문상이 통로 끝에 대기하고 있었다. 갈가리 찢겨 넝마가 된 내 의복과 그 안의 상처들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나는 질문을 되돌려줬다.
“어떻게 됐을 것 같소?”
문상은 쉽게 답을 맞혔다.
“오 공자가 이겼군요. 하지만 수월한 승리는 아니었을 테죠?”
“왜 그리 생각하오?”
“소요된 시간을 보건대 어느 정도까지는 백중지세가 지속되었을 것 같으니까요. 승부가 일찍 끝났을 수도 있지만 언니의 성향상 복기 따위를 하며 오 공자를 붙잡아두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니 그렇진 않았을 거라 봐요. 아닌가요?”
“내가 이겨서 당황스럽소?”
“그럴 리가요. 예상했던 결과예요.”
“그럼 이제 가도 되겠소?”
문상에게선 오래도록 대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