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61
제161화 – 그러죠.
문상은 당연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용무는 이제부터였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두 평가량의 썰렁한 다실이었다. 소박한 다구가 놓인 선반과 아이들 소꿉놀이에 써도 될 법한 자그마한 탁자, 그리고 등받이 없는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주렴 반대편에 난 창문도 손바닥만 했다. 그 창으로 미명이 비쳐 들고 있었다.
탁자에 찻잔 두 개를 놓으며 문상이 착석을 권했다. 나는 조그만 쟁반 크기의 동그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뜬금없이 용왕을 생각했다. 그가 여기 앉았더라면 의자가 못처럼 항문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문상이 주전자를 들어 갈색 빛깔이 감도는 액체를 따르자 김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그녀는 나와 무후의 비무가 얼마나 걸릴지 예측하고 이 차를 준비해두었음이 틀림없었다.
대체 어떻게? 혹시 ‘아자’에서의 행사를 알고 있는 걸까. 나흘밖에 안 됐는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무슨 수로 현재의 내 무위를 정확히 파악했을까.
내 속을 읽었는지 문상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 주전자 바닥에는 특별한 장치가 있어요. 차를 끓인 후에 그냥 둬도 반 시진 동안은 식지 않고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죠. 한겨울에도요.”
흠,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군. 하지만 남의 속마음을 제 손바닥인 양 들여다보는 심기에는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단도직입했다.
“나에게 뭘 바라오?”
문상도 에둘러가지 않았다.
“언니의 위상을 올려주었으면 해요.”
결국 그거였군.
“어떻게 말이오? 그녀와 공개 대결을 해서 고의로 져주기라도 하라는 소리요?”
온갖 교언과 궤변을 더덕더덕 갖다 붙여 포장할 줄 알았는데 문상이 군더더기 없이 시인했다.
“그래요.”
화가 나기보다는 허탈했다. 그토록 강렬한 첫인상을 주었던 여인이 이토록 형편없는 사기꾼이었다니.
“정말 무후가 그러기를 원했소?”
“그럴 리가 있나요. 언니는 정정당당한 승부사예요. 그래서 설득하느라 몹시 애먹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헷갈렸다.
“그녀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는데 당신이 그러자고 부추겼단 말이오?”
“아주 없지는 않았겠죠. 내 권고에 따르기만 하면 평생의 꿈을 이룰 수 있는데. 물론 내가 운을 떼지 않았다면 절대로 자기 입으로는 내뱉지 않았을 거예요. 자존심이 승부욕 못지않게 강한 사람이니까.”
“그런 건 자존심이 아니라 허영이라고 하는 거요.”
“부정하지 않을게요.”
“대단한 여걸인 줄 알았는데 별 볼 일 없는 여자였군.”
“…….”
***
한동안 침묵하던 문상이 면사를 살짝 들어 올려 앙증맞은 찻잔을 뭉개진 입술에 갖다 댄 후 혀만 축이고는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장광설을 쏟아냈다.
“그렇게까지 폄하할 일은 아니에요. 언니는 참으로 불운한 사람이에요.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자신이 원하는 명성을 얻고 그 명성이 영원하리라 믿은 채 눈을 감았을 거예요.
재능도 재능이지만 언니가 오늘날의 무위에 이르기 위해 쏟은 노력은 상상을 초월해요. 뼈를 깎았다는 표현 정도로는 부족해요. 언니는 열여섯 살에 동갑내기였던 창제를 무림대회 결승에서 만나 패한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런 공을 들였어요. 오로지 그를 꺾기 위한 일념으로.
하지만 무공에 입문했을 때의 목표는 그게 아니었어요. 언니는 여중제일인을 넘어 사상 최초의 여류천하최강자가 되려고 했어요. 그것도 단순한 일인자가 아니라 전무후무할 절대무존(絶對武尊)으로 우뚝 서고자 했죠. 열다섯 어린 나이에 유수의 무림대회를 석권하며 승승장구할 때만 해도 그 어마어마한 야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대요. 그런데 날개를 펴기도 전에 필생의 호적수를 조우하는 바람에 한순간에 가당치 않은 공상(空想)이 되어버렸죠.”
나는 흉한처럼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무후를 떠올렸다. 지금의 모습과 달리 풍성한 머리칼을 지닌 소녀였을 그녀가 오십오 년 전에 느꼈을 좌절감이 손에 잡힐 듯했다.
문상이 말을 이었다.
“언니는 패배감의 늪에 빠진 채 허송세월하지는 않았어요. 그러기는커녕 좀 전에 말했듯 배전의 노력을 기울였죠. 자신을 좌절시킨 자에게 설욕하기 위해서.
하지만 운명은 언니 편이 아니었어요. 타고난 무재도, 그간 흘린 피땀도 결코 창제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이상하게도 매번 그에게 가로막혔어요. 더 이상 지지는 않았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는 없었죠.
그래서 언니는 오 공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어요. 오죽하면 숨 쉬는 시간마저 아까워하는 사람이 수시로 나를 불러 오 공자의 성취를 확인했을까요. 한데 보름 전 창제가 오 공자에게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곤 수련을 중단했어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어요. 저러다 주화입마에 들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죠.”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문상이 마무리를 지었다.
“비겁한 수작이라는 거 알아요. 창피한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든 언니가 평생 간직해 온 염원을 이루게 해주고 싶었어요. 인생 최초이자 유이했던 패배를 경험한 이후 창제 타도로 목표를 수정하긴 했지만 원래부터 가졌던 꿈의 변형일 뿐이었어요. 그를 물리치면 천하제일, 나아가 고금제일 무존(武尊)의 명성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거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는 설사 창제를 꺾는다고 해도 그러한 영광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어요. 마선이라는 터무니없는 괴물이 등장하는 바람에. 솔직히 좀 야속하네요. 언니의 사정을 헤아려 창제와의 일전을 무승부로 종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오 공자는 명예에 집착하는 성품이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테고요. 언니에게 양보하면 좋았을 것을.
염치없이 굴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게 내 진심이에요. 그래서 오 공자에게 간곡히 부탁하고자 해요. 눈 딱 감고 한 번만 언니의 체면을 세워줘요. 그 은혜 잊지 않을게요.”
나는 문상의 진정성을 시험했다.
“그 부탁을 들어주면 내 머리에 든 빌어먹을 벌레를 빼 줄 거요?”
“아까 말했을 텐데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고.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한 차후로는 천지쌍고를 빌미로 오 공자에 무리한 청을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불가피한 경우란 건 뭐요? 그리고 그건 누가 정하는 거요?”
“지금으로선 특정할 수 없죠. 닥쳐봐야 알 수 있을 테니까. 그걸 정하는 건 당연히 오 공자와 언니죠. 가끔은 내 의견도 참고해주면 고맙겠고요.”
하아, 얄밉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나는 문상이 밉지 않았다.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었다.
***
나는 진도를 나갔다.
“언제 할 거요?”
“글쎄요, 언니와 공식적으로 대결하기 전에 거쳐야 할 이가 있으니 한 달쯤 후가 어떨까 싶네요. 서두르면 보름 안에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문상의 말을 잘랐다.
“거쳐야 할 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요?”
문상이 반문했다.
“몰랐나요?”
“뭘 말이오?”
“검제가 오 공자에게 비무 청을 했어요. 벌써 열이틀이나 됐네요.”
뜻밖의 소식이었다.
십이 일 전이라면 안진과 나우를 안고서 사막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검제는 신창문의 행사가 있고서 이틀 만에 내게 도전장을 날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검룡과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했다.
나는 ‘뒤룩뒤룩’이라는 수식어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검제의 면상을 떠올렸다. 그는 내가 중원의 일후삼제 중에 유일하게 붙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다지 승부욕이 생기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검제의 계산속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창제와 나의 격전을 목전에서 지켜보며 그는 나와 붙는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승리가 안겨다 줄 영광을 노렸을 것이었다. 무후처럼.
얄팍한 수작이었으나 조롱하지 않기로 했다. 무림의 하늘이라 불리는 이들을 차례차례 경험한바, 그들도 그저 희로애락에 좌우되고 제 욕망들에 충실한 인간들일 뿐이었다. 하늘에 닿은 무력을 제거하면 시중의 장삼이사와 다를 바 없었다. 물론 그 무력이 그들의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지만.
문상이 일정을 제시했다.
“일단 검제와 이번 달 내로 붙었으면 해요. 열흘 후가 적당할 듯싶네요. 그와 자웅을 가린 후에 분위기를 봐서 언니와의 대결 날짜를 잡아요. 십일월 십일일이 어떨까요. 기억하기도 좋고 뭔가 특별한 숫자 같잖아요.”
“세심도 하구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오 공자가 내키지 않으면 다른 날로 해도 상관없어요. 올해만 넘기지 않으면 돼요.”
“그날로 합시다. 검제에겐 당신이 알아서 통보해 주고.”
“그러죠. 장소는 어떻게 할까요?”
“어디든 괜찮소. 다만 이전에 내가 공개 비무를 하지 않은 곳이어야 하오. 그러니 여기 호원은 안 되오.”
나는 문상이 면사 속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군요. 그럼 중립지대의 도시들 중에서 고르죠. 참, 언니와의 일전에서는 마원도 고려해볼 만해요. 오 공자는 사실상 그곳의 맹주가 되었잖아요? 개파대전에 초대하는 방식으로 그 유명한 천마고원에 대륙의 명사들을 부른 후 언니와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무를 치르는 거죠.”
“자기 잔치에서 망신을 자초한 창제 흉내를 내라는 소리군.”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뭐, 됐소. 그 얘기는 이쯤 합시다.”
“다른 할 얘기가 있나요?”
“없소.”
실은 많았지만 일부러 튕겼다. 문상이 어떻게 나올지 보고 싶어서였다.
잡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기우였다. 문상은 용무가 끝났으니 건곤장에게 가보겠다는 나를 잡았다.
“작은 선물이 있어요.”
“뭐요?”
“오 공자 부모의 내력에 관한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실마리라니?”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요. 말 그대로 실마리에 불과하니까. 신뢰도도 아주 크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보쇼. 무슨 실마리를 잡았다는 거요?”
약을 올리려는 듯 문상이 진짜로 뜸을 들였다. 그녀에게 토설을 재촉하려다 말려드는 것 같아서 참았다. 이윽고 문상의 면사가 펄럭였다.
“오 공자의 부모는 마인이 아니라 도인들이었던 것 같아요.”
내 무덤덤한 반응에 문상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녀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는 그녀의 당혹감을 반영했다.
“알고 있었군요?”
확연한 비난조였다. 굳이 해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원활한 대화의 진행을 위해 사실을 밝혔다.
“나도 최근에야 알았소. 그나저나 그걸 어떻게 알아냈소?”
“그걸 알려주면 오 공자도 가진 걸 내놓을 건가요?”
“욕심도 사납군. 크기가 다른데 거래가 성립하겠소? 당신이라면 실마리를 받고서 전모를 내주겠냔 말이오.”
문상의 숨이 일시적으로 멎었다.
“전모를 알아냈나요? 그럼 내가 뭘 주면 되죠?”
“독고를 빼주면 나도 기꺼이 당신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겠소.”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없던 일로 합시다. 그만 가 볼 테니 나중에 검제와의 협의가 끝나면 알려주구려. 참, 건곤장은 지난번 약속대로 내가 데려가겠소.”
문상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게 매달렸다. 전에 없던 행태였다.
“그러지 말고 앉아요. 불을 지펴놓고 이대로 갈 순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 줄 테니 내막을 알려줘요. 어떤 연유로 도가의 혈통들이 천마의 후인이 됐는지.”
“그걸 안다고 밥이나 떡이 나오는 건 아니잖소?”
“내겐 그깟 먹을 것보다 백만 배나 중요해요.”
문상다운 답변이었다.
“좋소, 말해주리다. 대신 당신도 내가 묻는 것들에 숨김없이 답해주구려. 이를테면 당신 동생과의 사연이라든지. 혹은 그녀의 현재 소재나.”
“……그러죠.”
나는 재수 없는 늙은이에게 들었던 내 부모의 비사를 문상에게 전했다. 단순히 그녀가 쥔 정보와 맞교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를 빌려 의혹들을 풀 ‘실마리’를 찾고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