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84
제184화 – 아무 염려하지 마라.
안진은 안달복달했다.
나도 어머니가 이대로 영영 떠나버릴까 봐 불안했다. 태청진인은 거동이 불편함에도 한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돌보았다. 그이의 노력에 보답하려는 듯 어머니가 느닷없는 날숨을 토해내더니 눈을 떴다. 도원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시야에 처음 들어왔을 태청진인을 보고는 코를 찡그리더니 이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뺨에 보조개가 패었다. 안진처럼.
“사부.”
어지간한 청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들리지도 않았을 미약한 음성으로 태청진인을 불렀던 어머니는 다음 순간 귀청이 터질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준(俊)!”
마치 비명 같았다.
안구가 튀어나올 듯 놀란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안진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선이에요, 엄마.”
안진에게로 시선을 옮긴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그대로 까무러쳤다.
태청진인이 나와 안진을 뒤로 물렸다. 우리는 순순히 그의 명에 따랐다.
어머니는 한참 후에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러더니 한달음에 말을 쏟아냈다.
“꿈을 꿨어요, 사부. 준과 내가 나오는 꿈이었어요.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꿈에 본 준과 내가 진짜고 나는 꿈속의 허상 같았어요. 그래서 꿈에 그리던 준을 보았는데도 반갑기는커녕 두려웠어요. 나는 미친 걸까요?”
“너는 미치지 않았다, 연아. 다만 악몽을 꾸었을 뿐. 다 괜찮을 테니 염려 말거라.”
“아……, 다행이에요. 실은 끔찍한 꿈들을 계속 꾸고 있었거든요. 너무 무서워서 미쳐야 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힘들었겠구나.”
“준과 나는 속세행을 마무리 지을 때쯤 마원을 찾았어요. 준이 도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 일족을 몰살한 악귀들을 보아두자고 했거든요. 그래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연아.”
“아니에요. 말하게 해주세요. 그래야 공포가 조금이라도 덜어질 것 같아요.”
“……그래.”
“마인들과의 충돌을 피해 몰래 마원을 돌아다니던 우리는 마도의 성지라는 천마고원까지 올라갔어요.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준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런데 거기서 뜻밖의 일이 생겼어요. 마인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지역이 있기에 가보았더니 멀리서 기이한 서기가 올라오지 않겠어요. 준과 나는 그곳이 사부에게 누차 들었던 참회동임을 직감했어요. 그래서 그리로 날아가던 참에 준이 갑자기 나를 잡았어요. 아래에 무언가 있다면서.”
“……그랬구나.”
“그건……, 그건 악마였어요. 악마는 나와 준을 꼬드겼어요. 수천 년을 기다렸다며, 우리더러 선택받은 행운아들이라며, 자기와 함께 하면 신의 권능을 주겠다고. 나는 거부했지만 준은 받아들였어요. 준은……, 준은 사부를 넘고 싶어 했어요. 내가 끝까지 반대하자 준은 자기 혼자라도 하겠다며 악마와의 거래에 응했어요. 그러더니 격렬하게 몸부림쳤어요. 나는 어쩔 수 없이 준에게 든 악마의 힘을 나누어 가졌어요. 그대로 두면 준의 몸이 터질 것 같았거든요.”
“……떨지 말거라. 한낱 꿈이거늘.”
“그다음엔……, 그다음엔…….”
“기억하기 괴로우면 그만하려무나.”
“아니에요. 마저 할게요. 이제부터가……, 근데 묘하네요. 전에도 사부한테 이 꿈 얘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 그래. 다 들었다. 그러니 더 하지 않아도 된다, 연아.”
“창피해요. 죽고 싶을 만큼. 아무리 꿈이지만 너무 못된 짓과 삿된 짓을 해서…….”
“꿈에서야 무언들 못할까. 이 사부도 차마 밝힐 수 없는 꿈들을 꾸곤 한단다.”
“정말요?”
“그럼.”
“사부도 그렇다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사부.”
“그래.”
“졸려요, 사부. 또 무서운 꿈을 꾸면 어떡하죠.”
“이젠 괜찮을 게다. 아무 걱정 말고 푹 자려무나.”
“알겠어요. 사부가 곁에 계셔서 정말 좋아요.”
“나도 네가 있어서 좋구나.”
어머니는 만면에 미소를 담은 채 눈을 감았다. 다시는 뜨지 않을 눈을.
태청진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에게로 달려간 안진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통곡했다.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내 황망하고 허망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마지막이 평온해서 감사했다. 모두 태청진인 덕분이었다.
***
나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어머니 때문에 미뤄두었던 참회동 재방문에 나섰다.
미로 같은 도원 내부의 동혈들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태청진인이 나를 데려간 곳은 평범한 토실이었다. 검지를 뻗어 왼편의 흙벽을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보이느냐?”
태청진인의 요청으로 이미 선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리 일렀던 대로 목전의 벽이 흡사 물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들어가 보려무나. 저 너머에 참회동이 있느니라.”
나는 귀를 의심했다. 참회동이 있는 천마고원까지는 직선거리로만 삼천리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벽 하나를 지나면 당도한단 말인가.
“믿기 어렵다는 걸 안다. 나도 참회동이 천마고원 한가운데 있음을 알고는 황당했으니까. 하지만 어김없는 사실이다. 어서 확인해 보려무나.”
나는 태청진인의 말을 믿었다. 며칠 전의 일로 그에 대한 인식이 정반대로 바뀌어서만이 아니라 벽 건너편에서 잊을 수 없는 기운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천마의 마령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니다. 잔소리가 필요 없는 아이거늘.”
나는 태청진인이 무엇을 우려하는지를 알았다. 하여 그를 안심시켜주려다 보류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서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태청진인에게 인사를 한 나는 토벽으로 뛰어들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여의주가 든 성구(聖球)에 들어갈 때도 이와 같지 않았던가. 세상의 신비는 서로 통하는 걸까.
성구의 벽과는 달랐다.
그것이 엷은 막이었다면 이것은 깊은 우물 같았다. 나는 태청진인의 사전에 주었던 당부에 따라 일체의 저항 없이 몸이 빠져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느 순간 선정의 통찰안으로도 두께를 가늠할 수 없던 암흑이 걷히더니 텅 빈 공간이 나왔다.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여전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고여 있었지만 나는 천안통의 공능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형태를 분간해 냈다.
참회동은 허리가 길쭉한 절구통 구조였다. 중간에 통로를 두고 양편 끝에 불룩한 공터가 있었다.
면적은 의외로 좁았다. 통로까지 다 합쳐봤자 스무 평도 안 될 듯싶었다. 이 답답한 곳에서 어머니가 이십여 년을 갇혀있었음을 생각하니 절로 안쓰러웠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태청진인이 매번 음식을 넣어준 것도 아닐 텐데 그녀는 무슨 수로 삶을 유지했을까.
답은 쉽게 찾았다. 동굴 곳곳에 이끼가 나 있었다. 한쪽 공터의 벽에는 실금 같은 물도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이끼를 뜯어 먹고 그 물로 목을 축이며 연명했을 터였다. 늘 악몽을 꾸면서.
나는 선사들의 도기(道氣)에 갇힌 천마의 마령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내 도래를 인지했는지 마령이 별안간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기가 더욱 두터워졌다.
나는 마령을 다시 취하고 싶어 하는 내 속의 욕망을 자각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회수할 방도가 아주 없지는 않을 터였다. 고개를 흔들어 유혹을 뿌리친 나는 전날 내가 뚫어놓은 구멍을 메운 후 도원으로 돌아갔다.
***
안진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도원을 떠날 거야.”
“어딜 가려고?”
“왜 떠나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냐?”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럴 작정이야.”
“뭐? 어째서?”
“몰라서 물어?”
“…….”
“사부 때문이잖아. 도력을 상실했으니 사부는 이제 평범한 노인일 뿐이야. 그냥 노인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연로한 노인이라고. 매일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찾아오는 이런 곳에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쇠약해지셨어.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살기 좋은 곳으로 모셔야 돼.”
“…….”
“어디로 갈 건지 안 물어?”
“좀 전에 물었잖니.”
“다시 물어야지.”
“어디로 갈 건데.”
“천벽.”
“뭐? 거긴 여기보다 더 험지잖아. 진인 어르신은 그곳의 혹한을 견디시지 못할…….”
“바보. 누가 산 위로 올라간대. 산 아래 어딘가에 분명 아늑한 곳이 있을 거야. 사부가 좋아할 만할 곳을 찾아서…….”
“그러지 말고 하동으로 가는 게 어떠냐? 호원도 괜찮고. 그도 아니면 아예 일 년 내내 따뜻한 남방으로…….”
“싫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야 한다는 게 필수조건 중 하나야. 내가 수행을 해야 하니까. 이건 내 욕심이 아니라 사부의 청이었어. 나는 사부를 돌보면서 일원과 무극의 도에 이를 거야. 두고 봐. 반드시 너를 따라잡을 테니.”
“…….”
“왜 말이 없어? 내 선언이 우스워?”
“그렇지 않다. 미안하다, 진아.”
“흥, 말로만. 사부를 그 꼴로 만들어서 속이 후련하지?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더니 기어이 사고를 쳐? 사부는 너를 비난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그래. 이해한다.”
“뭘 이해해? 너는 절대로 내 심정을 알지 못해.”
“…….”
“너는 뼛속까지 이기적인 인간이야. 그 와중에도 사부한테 축공이신의 비결을 캐물었다며? 너무 뻔뻔한 거 아냐? 염장을 지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너를 구하느라 폐인이 되다시피 한 사부에게 그럴 수가 있어?”
“그건 진인께서 먼저…….”
“됐어. 구질구질하게 변명하지 마.”
“…….”
“이제 갈 거야. 사부가 기다리고 있어.”
“…….”
“뭐해? 안 따라오고.”
“나도 같이 가자고?”
“그럼 우리 둘만 보낼 참이야? 염치가 있으면 사부와 내가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걸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
***
나는 산등성이를 따라 낮게 비행하며 안진과 태청진인이 은신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만 사흘간의 수색 끝에 알맞은 곳을 발견했다. 산맥 남쪽 끝에 자리한 절곡이었다. 중원의 월력으로는 겨울철에 접어들었지만 기온이 봄날처럼 온화했고 입구엔 가시덤불이 무성한 데다 골짜기 양쪽의 벼랑이 몹시 가팔라 약초꾼들이 드나들 수 없을 듯했다. 절벽 아래 해가 드는 자연동굴까지 나 있으니 두 노소가 지내기엔 제격이었다.
안진도, 태청진인도 내가 찾아준 비처를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안진은 용무가 끝났으니 이제 그만 꺼지라고 야료를 부렸다. 나는 그녀의 심통을 받아치지 않고 묵묵히 받아주었다.
태청진인은 나를 쥐 잡듯 하는 안진을 나무라면서도 철부지 오누이의 다툼을 보듯 시종여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도 전에 없이 자애로웠다. 그래서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절곡에 나흘을 더 머물렀다. 그러다 닷새째 되는 날 아침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했다.
안진이 나를 쫓아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내가 그곳에서 자기와 함께 지내기를 바라는 기색을 내비쳤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가야 했다. 세상에 벌여 놓은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오른 나는 거기까지 배웅 나온 안진에게 그만 내려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또 오마.”
“언제?”
“글쎄, 한 달 후? 두 달? 아니면 일 년? 잘 모르겠다.”
“그자만 잡으면 올 거지?”
“그래.”
“몸조심해.”
“그래.”
“건성으로 답하지 말고 진짜로 조심하라고. 너는 이제 절대무적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천지간에 나보다 강한 자도 없다. 나와 무력이 비등한 서너 명도 내게서 마력이 빠져나간 사정을 알 턱이 없으니 나에게 덤벼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테고. 그러니 아무 염려하지 마라.”
안진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었으나 나 스스로도 올바른 판단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머지않아 이를 수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