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ine Digger Gutter Slime RAW novel - Chapter 28
28. 패션 테러리스트
가족에게 사기를 칠 용기.
용기는 그럴 때 쓰는 게 아니라고?
이런 말이 있잖아. 거절할 줄 아는 용기를 갖춰야 한다고.
나는 진실을 말하기를 거절하겠다!
가족에게 사기를 칠 용기가 생겼으니 오랜만에 본가로 갈 거다.
그 전에 미리 정해둬야 하는 일이 있다.
이 이야기도 집에 가서 해야 하니까.
이제 곧 수강 신청 시즌.
학교를 계속 다닐지 말지 결정해야지.
어떻게 계속 다니냐고?
나는 슬라임 탈을 쓰고 학교에 나가겠어!
대학생에게는 복장의 자유가 있다!
물론 농담이다.
시도할 용기는 있는데 그러면 내 본명이 유출되잖아.
본명 노출은 괜찮은데 가족관계까지 털린단 말이지.
그건 안 되지.
다른 방법도 있다.
SLimelove의 정체를 털리지 않고 학교에 계속 다니는 놀라운 방법이.
에 병원균을 심어 전국에 퍼뜨리면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천벌 받을 짓이니까 하지는 않는데.
이번에 학교를 안 가는 것은 확정.
선택해야 하는 건 휴학할까 자퇴할까.
휴학하자.
자퇴 안 하고 휴학한다고 손해는 없으니까.
슬라임에게, 일 매출 2.6억 연금술사에게, 구독자 100만 W튜버에게 대학 학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는 한데.
취직할 거야?
학위고 뭐고 슬라임은 서류 심사에서 탈락이다.
서류 심사에서 탈락시키지 않으면 더 무섭다.
생각난 김에 바로 휴학 신청을 하고.
좋아. 끝.
자, 그러면 대본을 준비해볼까.
가족에게 사기 칠 때 사용할 대본을.
***
“대충 이 정도면 되겠는데?”
작전명<>의 구상이 끝났다.
실행은 오늘이 아니라 나중에.
영화도 개봉 기간이 있는 것처럼 사기에도 적절한 시기가 필요한 법.
몇 번이고 왔다가 갔다가 하기 싫으니까 가족이 모두 모이는 주말까지 기다려야지.
준비해야 하는 것도 있고.
나는 예의가 있는 사람.
동생이나 엄마와 다르게 갑자기 찾아가지 않고 미리 연락하고 갈 거다.
다 큰 성인 남자의 자취방에 불쑥불쑥 찾아오고 말이야!
내가 여자친구랑 ‘어머, 어머!’ 상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가능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아?
내 외모가 어때서!
솔직히 피부만 깨끗해도 미남의 조건 절반은 만족한 거 아니야?
나보다 모공이 작고 피부가 매끄러운 사람은 지구상에 없을걸?
피부의 색감은 또 어떻고. 조금 푸른 빛이 돌기는 하는데 나처럼 하얗고 투명한 피부를 가진 사람이 또 어디에 있어. 피부 미남 맞잖아.
촉감은 또 어떤데. 손에 찰싹 달라붙는 이 말랑말랑한 살을 만져보면 다른 사람의 살 따위 거친 가죽처럼 느껴질걸?
“신기하네.”
거울 속의 푸르딩딩한 인간이 웃는다.
양손으로 볼을 쭉 잡아당겨 그 미소를 한껏 키웠다.
전에는 이 모습이 그렇게 싫었는데.
거울을 볼 때마다 절망감이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다.
망할 저주.
“뭐 입고 갈까나.”
100만 W튜버 SLimelove의 상징인 펭귄 닮은 슬라임 모습으로는 갈 수 없다.
100만 W튜버 정도 되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은 반드시 있다.
SNS를 통해 전 세계에 SLimelove의 본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지고 싶지 않으면 다른 복장을 해야 한다.
[조종]과 [변질] 스킬로 적당한 탈을 만들어 뒤집어썼다.이건···. 안 되지 안 돼.
쥐의 왕국에서 고소장 들고 날아올라.
이건?
안 된다. 몸은 아이고 두뇌는 어른인 저승사자가 우리 집을 무대로 삼을라.
범인은 너다!
이건 어떨까.
헬멧을 쓴 오색 전사들이 장난감 들고 쫓아올 것 같네.
호-파-호-파.
내가 네 아···.
그만할까.
뇌절한 것 같다.
코스프레하고 갈 생각이기는 한데 영화나 애니 코스프레를 할 생각은 아니다.
내가 만든 옷은 슬라임 특유의 광택이 있어서 코스프레를 할 때 적합하지 않고.
한여름에 둘둘 싸매고 다닐 수 없다고 했지?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 패셔니스트들이 있다.
눈 오는 날 반바지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여름에 둘둘 싸매지 못할 이유가 어딨어?
***
택배로 온 옷들을 꺼내 입었다.
오버핏 터틀넥 후드티.
목에서 코까지 가리는 멀티스카프.
짙은 선글라스.
헤드셋.
볼캡.
목이 긴 흰색 장갑.
바지.
워커 부츠.
지나가다 검문받을 것 같은 패션이지만, 아마 주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목격자들이 전원 나를 봤다고 해도 경찰은 고개를 저을 거다.
지금 내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는 범죄자는 없을 테니까.
우선 후드티 디자인이 매우 현란하다. 스마트폰 보고 가던 사람도 무심코 고개를 들 수준.
대체 무엇이라고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억지로 표현해보자면.
형광 무지개로 우주를 그려놨다.
헤드셋은 또 어떻고. LED 고양이 귀 헤드셋이다.
바지? 십이지신을 금박으로 박아놓은 바지 되겠다.
지금 내 꼴을 한 번이라도 보면 평생 패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떠올릴 거다.
쪄 죽어도 자기만의 패션에 미친 놈을 본 적이 있다고.
수상쩍어하는 시선은 걱정 안 해도 된다.
조심해야 할 건 보는 사람이 숨 막힌다고 등짝 후려치는 어르신들일까?
예전에는 피부가 조금이라도 보일까 두려워 벌벌 떨었겠지만.
[+용기] 버프를 받은 나는 두려움 따위 없다.방구석 슬라임.
방구석 졸업합니다.
안에 현금이 가득 들어 있을 것 같은 슈트케이스를 한 손에 들고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왔다.
심장이 조이거나 시야가 좁아지는 증상은 없다.
조일 심장이 없으니까!
자, 그러면 뇌에 SOUL을 장착해볼까.
I’m So COOL~~~~!
Beat을 Feel~ 하면서 COOL~한 발걸음으로 덩기덕 쿵 더러러러 쿵기덕 쿵더러러러.
당당하게.
자신 있게.
거침없이.
앞으로 가.
나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나의 본모습은 모르겠지.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너.
No, you do no know.
나를 아는 건 누구도 없어.
버스에서는 얌전히 있읍시다.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낫다. 아무래도 유동 인구에서 큰 차이가 있으니까.
지하철보다는 사람이 적은데도 시선이 집중됐고 사진도 많이 찍힌다.
그래도 그 어떤 각막과 렌즈에도 피부 한 조각 비치지 않았으리라고 자신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숫자가 줄어드는 신호등이 보인다.
내가 가오가 있지. 뛰지 않는다.
어? 갈아타야 하는 버스가 다가오네?
내가 자존심이 있지. 뛰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뛰지 않는다.
신호등이 바뀐 뒤 당당하게 손을 들고 건널목을 건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다음 버스가 15분···.
뛸 걸 그랬나.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는데 가까이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세상아. 이런 꼴을 한 패션 테러리스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고?
“방송하고 있는 뷰티라임이라고 해요.”
사람이 아니었다. W튜버였다.
“혹시 시간 되시면 잠깐 방송에 나와주실 수 있나요?”
그러면 그렇지. 이런 복장을 한 사람을 보고 말을 걸지 않으면 W튜버가 아니지.
그나저나 뷰티라임이라.
뷰티라임은 가장 먼저 과 을 리뷰한 뷰티 W튜버.
그녀의 손을 확인했다.
매일 서울중앙연금센터에 과 을 사려고 오픈런에 참가하는 노력가다.
오늘은 실패했군.
“K.”
“케이?”
“오케이.”
“아, 네. 혹시 음악 하시는 분이신가요?”
“Nop. W튜브~.”
“채널 이름 말해도 돼요.”
“그건 No, No. 오늘의 나는 오프. 나의 센스 people know not.”
당황했네.
쯧쯧, 아직 내공이 부족하잖아. 어떤 기행을 봐도 미소로 넘겨야지.
참고로 뷰티라임이 나보다 선배다.
“제 패션 감각은 순진한 제 구독자에게는 이르거든요.”
“아! 그런가요!”
“뷰티라임 님. 만약 SLimelove가 옷을 이런 식으로 입는다고 하면 어떻겠어요?”
“우리 펭라임이는 뭘 해도 귀여워요.”
즉답이냐.
“눈에 슬라임이 꼈군요.”
“어? 혹시 이 남았나요?”
뷰티라임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자기 얼굴을 살폈다.
“ 뗀 뒤에 화장한 거 아닌가요?”
“했어요!”
“그러면 남았을 리가 없겠죠?”
“그러네요!”
원래 이렇게 해밝은 사람이었나?
아니면 형광 무지개 우주를 보고 뇌가 표백됐나?
나라도 표백될 것 같기는 해.
“오늘도 오픈런에 참가하신 건가요?”
“네! 오늘은 실패했지만요. 내일을 더 일찍 나가서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매일 오픈런에 참가하는 이유가 뭔가요?”
“정말 좋아하니까요.”
“힘들지 않나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기껏 산 을 모아서 시청자분들에게 선물로 나눠주기도 한다고 아는데요.”
“더 많은 사람이 SLimelove를 사랑해줬으면 좋겠거든요.”
연금슬라임 제품을 나눠주는데 왜 SLimelove를 사랑해.
“SLimelove와 연금슬라임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같아요. 저는 알 수 있어요.”
그때 뷰티라임의 눈이 잠깐 커졌다.
“혹시 SLimelove에게 바라는 점 없나요?”
“꾸준히 영상을 올려주기만 하면 저는 만족이에요.”
“의 생산량을 늘리는 건 바라지 않나요? 그러면 구하기 쉬워질 텐데.”
“바라지 않아요. 우리 펭라임이는 지금도 충분히 고생하고 있는걸요.”
“정말로 좋아하나 보네요.”
“네!”
“SLimelove 인형이 나오면 갖고 싶나요?”
“네! 꼭 갖고 싶어요! 혹시 나오나요?”
“글쎄요? 아, 버스 왔네요. 인터뷰해줘서 고마워요. 이건 답례입니다.”
모자를 벗고 그 아래 즉석에서 만들어낸 슬라임 모자를 뷰티라임의 머리에 씌웠다.
그녀가 반응하기 전에 모자를 쓰고 바로 버스에 탑승했다.
형광 무지개 우주를 통해 진리라도 봤나 싶었는데 중간부터 낌새가 이상했다.
혹시 나를 알아봤나 싶어 가볍게 떠봤는데 ‘혹시 나오나요?’ 이 말로 확정됐다.
그녀는 내가 SLimelove라고 확신했다.
SLimelove는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데. 영상 속에서는 슬라임 탈이라는 두꺼운 옷을 입는데. 그리고 지금의 나는 굉장히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보는 건지.
저번 주에만 해도 이런 일이 있으면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슬슬 연금슬라임과 SLimelove를 구분할 필요가 없을지도.
이미 많은 사람이 연금슬라임과 SLimelove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 헛소문은 해외에서는 아예 팩트로 통하고.
3천만 W튜버가 과 을 홍보하자 SLimelove 구독자가 대폭 늘어난 게 증거다.
SLimelove와 연금슬라임의 동반 추락을 경계해서 둘로 나눠놨는데 그걸 걱정하기에는 연금슬라임의 입지가 견고하다. 연금슬라임이 어지간한 일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바이럴에도 멀쩡한 것으로 증명됐고.
영상으로 연금슬라임의 주소지가 털리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는데 어차피 곧 이사할 예정. 애초에 집이 들키는 것을 왜 그렇게 경계했는지 지금은 잘 이해가 안 된다.
전에는 뭐가 그렇게 무서웠나 몰라.
누군가가 내 집에 오면 슬라임 지옥을 맛보여주면 되는데.
왜 감금당하고 납치당할 걱정부터 했던 거지?
이게 다 저주 때문이다.
망할 저주.
내가 연금술사로 각성했다는 사실을 알면 가족이 걱정하는 게 문제이기는 한데.
그건 지금 해결하면 된다.
패션 테러리스트 도착!
문을 열어라!
안구에 크나큰 고통을 주러 내가 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왔니···? 너, 꼴이 그게 뭐니!”
내 말이!
아차. 저 말에 공감할 때가 아니다.
“엄마, 아빠. 저 중요한 할 말이 있어요.”
엄마 목소리에 구경 나온 아빠와 엄마의 등을 밀어 안방에 몰아넣었다.
문을 닫고 커튼까지 확실히 쳤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보고 너무 놀라지 마세요.”
나는 후드, 모자, 마스크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