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02
#1001화
종남파와의 동행은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
장문인인 풍운검군이 먼저 합류를 제의했고, 내가 잠시 고심하던 사이에 불쑥 끼어든 적천강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동행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노, 아니 스승님.”
“뭣 하느냐. 어서 네 수하들을 준비시키지 않고. 풍운검군 자네도 저기 퍼질러 앉아있는 제자 놈들 궁둥짝부터 걷어차게.”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듯 순식간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반올림 좀 더해서 천여 명으로 불어난 일행은 감숙성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고, 그들 중에는 썩 즐거워 보이지 않는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아까부터 저놈들 표정이 아주 죽상이구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년 전에만 만났어도 죽통부터 한 대 갈기는 건데.”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는 적천강의 모습에,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저 꼴 보기 싫었으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죠.”
“그 때문이더냐? 네 녀석 입이 석 자나 튀어나온 이유가?”
“아니, 누가 입이 튀어나왔다고 그러세요?”
“정정하마. 이제는 넉 자까지 튀어나왔군.”
적천강의 놀림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마 종남파와 삼십여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져 후미를 맡은 덕분에, 이런 대화라도 대놓고 할 수 있다는 점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예, 불만입니다. 됐어요?”
“거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 이럴 거면 껍데기뿐인 화해는 왜 했누?”
껍데기뿐인 화해.
그야말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정확한 표현이다.
이미 적천강이 지금껏 전음으로 오간 대화를 모두 들었을 거라 짐작하고 있던 나는, 별다른 놀라움 없이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필요하니까?”
“예.”
“필요에 의해 화해를 하고, 겉으로나마 웃는 얼굴로 지난 악연을 덮는다…… 네 녀석도 어느새 머리가 굵어졌구나.”
실로 묘한 어투다.
칭찬인지, 질책인지 헷갈리는 적천강의 한 마디에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니 그가 피식 웃었다.
“그리 깊게 생각할 것 없느니라. 단지 어느 방향으로든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본 것 같아 기쁠 따름이니.”
“말씀하신 그 방향이, 혹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글쎄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겠느냐.”
“보통은 과정이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요? 결과보다도 과정을 중시하거나.”
“전자는 앞뒤 꽉 막힌 놈들이나 하는 소리고, 후자는 결과를 대차게 말아먹은 놈들이 즐겨 쓰는 개소리지.”
신랄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한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만약 노부가 보기에 네 녀석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크게 혼쭐을 내었을 것이나, 아직까지는 썩 나쁘지 않다. 게다가 저 게을러터진 놈들을 감숙까지 소몰이하듯 몰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종남파의 제자들은 뭐 빠지게 뛰는 중이다. 일방적으로 후미를 자처한 적천강이 출발 전 했던 선언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감숙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뒤처지거나 뺀질대는 놈들은 노부가 친히 개인 면담을 해 주마.’
아득한 경지에 도달한 고인(古人)과의 개인 면담은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기연이겠지만, 그 상대가 화왕이라면 진짜 고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쉬쉬쉬쉬쉭!
살길을 찾아 산기슭을 죽도록 내달리는 하이에나, 아니 종남파 제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어 내달리는 종남파 제자들의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보던 적천강이, 돌연 힘차게 지면을 박찼다.
쾅! 쐐애액!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삽시간에 늘어지는 신형.
잔상(殘像)과도 같은 그것을 남기며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적천강의 모습에, 헛숨을 들이킨 종남파 제자들 사이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뛰어!”
“따라잡히면 끝장이다!”
“사, 사형. 저는 틀렸습니다. 이 못난 사제는 괘념치 마시고 어서……!”
“안 돼! 포기하지 말거라! 살 수 있다!”
“…….”
그 광경을 본 내 소감은 짧고 명료했다.
아주 지랄 염병들을 해라.
“누가 보면 암천이라도 나타난 줄 알겠…… 어라?”
들불을 만난 메뚜기 떼처럼 도망치는 종남파 제자들을 보며 혀를 차던 그때, 문득 뭔가를 발견한 나는 눈매를 좁혔다.
동시에 깨달았다.
적천강이 돌연 속도를 높여 앞으로 나아간 진짜 이유를.
‘뭐지, 저건?’
어느덧 좁은 산길을 빠져나가며 나타난 언덕과 함께 탁 트인 시야.
문제는 그와 동시에 저 멀리에서 초옥(草屋) 백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과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그 머릿수만 일견해도 족히 수백,
자그마한 마을 어귀에 바글거리는 인파를 뒤늦게 발견한 혁무진도 눈을 크게 떴다.
“조장님. 저거 설마.”
귓가로 전해지는 다급한 목소리.
곧 이어지려는 뒷말을 짐작한 나는, 한 박자 앞서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겁먹지 마. 적은 아닌 것 같으니까.”
“예? 그럼…….”
“전부 양민들이야.”
짤막하게 대답한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 보이는 바로는.”
굳이 그런 말을 덧붙인 이유는, 사실 나도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행로를 살펴보았을 때, 현재 우리의 위치는 섬서에서 감숙으로 넘어가는 어느 경계선.
더군다나 암천은 이동진(移動陳)이라는 사술을 보유하고 있으니, 당장 이곳에서 양민으로 위장한 놈들과 맞닥트린다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암천은 이미 한번 사천에서도 관군으로 위장했던 전력이 있었으니까.
‘감숙성에 변고가 있었다면 이미 소식이 전해지고도 남았을 텐데. 이런 산골짜기의 작은 마을에 저 많은 인파는 도대체 뭐지? 정말 이동진을 통해 기습을 준비한 건가?’
머릿속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 순간이었다.
스릉.
불현듯 울려 퍼진 서늘한 소리.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자신의 별호와도 같은 애병, 흑룡도(黑龍刀)를 뽑아 든 사마표가 그곳에 있었다.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렇지 않나, 각주?”
침착한 목소리와는 달리 깊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
감숙성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무거운 분위기를 내뿜기 시작한 사마표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두!
힘차게 지면을 내달리는 초원마의 말발굽.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저 인파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만약 암천이 준비한 기습이라 해도, 짓밟고 지나가면 그뿐이다.’
한바탕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심장 박동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산골짜기에서 가로막히기에는, 이미 내가 너무나도 강해졌기에.
* * *
결론만 말하자면, 우려했던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정정한다.
적어도 아군에게만큼은 그랬다는 표현이 훨씬 정확할 테니까.
“놈들이, 놈들이 나타났다!”
“꺄아악!”
“어, 어서 모두 몸을 피하시오!”
사방에서 다급한 외침과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제방(堤坊)이 허물어지듯, 가파른 언덕을 넘어 쏟아지는 수상한 무리를.
그 숫자만 무려 일천에 가까운 데다, 심지어 몇몇은 이미 시퍼런 날붙이를 손에 들었으니 자그마한 마을 어귀에 모여 있던 수백의 인파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결코 거짓으로 꾸며 낼 수 없는 그들의 반응에, 적천강과 함께 선두에서 쏘아지던 풍운검군이 벼락처럼 외쳤다.
“그만! 모두 멈추어라!”
쉬쉭!
다른 누구도 아닌 장문인의 명령이다.
공력이 실린 그 외침에 수많은 종남파의 제자들이 빠르게 속도를 줄이며 자리에서 멈춰섰지만,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쉭.
다른 이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미세한 파공성.
풍운검군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처럼 쏘아지는 두 인영의 뒷모습에, 종남파의 제자들과 함께 속도를 줄이고 있던 나는 내심 혀를 찼다.
‘그래, 어쩐지 저럴 것 같더라.’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
장문인이고 나발이고, 먼저 입문한 사형이라는 이유로 풍운검군의 지시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나아가는 두 늙은 개를 향해 나는 지면을 박찼다.
슈확!
전신을 휘감는 광풍(狂風)과 함께 단번에 지워지는 수십여 장의 거리.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두 노도사의 뒷모습도, 그에 따라 양민들이 내지르는 비명도 가까워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나를 포함한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멈춰.”
“……!”
“……!”
목에 힘을 주어 내지른 외침도, 별다른 공력도 실려 있지 않은 나직한 음성.
그러나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의 발걸음을 묶기에는 그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에 담긴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을 한 누군가의 정체였다.
“네놈들은 귀가 먹었느냐? 어째, 쓸모없어 보이는데 이참에 하나 뜯어 줘?”
고작 몇 걸음 차이.
눈을 질끈 감은 어느 양민의 코앞에 멈춰 선 노호검객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노 선배. 저는 그저 확인 차…….”
“물어본 것에나 대답해라. 떼 줘? 아니면 말아?”
“…….”
“귀만 먹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입까지 막혔군. 좋다. 몸이 불편한 사형 대신 네놈이 대신 대답해 보거라.”
불길이 일렁이는 눈동자.
그런 적천강의 시선을 마주한 태을무정검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들의 정체를 확실히 하고자 했을 뿐. 결코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만약 섣부른 행동으로 적 대협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어지럽히진 않았다. 대신 그보다 더 개판을 쳐놨지.”
“송구합니다.”
“그나마 한 놈은 주둥이라도 뚫려있군.”
태을무정검을 향해 눈살을 찌푸린 적천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송구한 건 송구한 거고, 네놈들 때문에 지레 식겁한 저들에게나 사과해라.”
적천강의 말처럼, 발 빠른 몇몇과는 달리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제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양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한 사내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요. 워낙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놀라기야 했지만…….”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을 보며 말꼬리를 흐린 사내가, 적천강과 그 옆에 선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맞으시지요? 무림맹의 협객분들.”
이 소란을 피워 놓고 협객이라고 하긴 민망하지만, 우선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양민들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하이고. 십 년 감수했네.”
“무림맹이면, 그. 거기 아니오? 천인공노할 외적 놈들과 맞서 싸운다는.”
“거기 맞소.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오.”
“염병. 난 또 뭐라고.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던 그때, 가장 먼저 말을 꺼냈던 사내가 밝아진 안색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말로만 듣던 무림맹의 협객분들이시라니, 정말 천만다행입니다요. 저희는 웬 이상한 놈들이 나타나길래 그놈들인 줄 알…… 어이쿠. 또 이 주둥이가 방정이지. 이상한 놈들이라니.”
사내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나나 적천강은 그런 말실수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당장 누가 봐도 이상한 놈들이기도 했고, 그보다 더 중요한 말을 들었으니까.
“그놈들이라니, 그게 누굽니까?”
내 물음에, 사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누구긴 누굽니까요.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마적단 놈들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