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21
#1020화
그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쉬이이익, 펑!
비록 수백 여장의 거리가 있었음에도 나를 포함한 모든 이는 똑똑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저 멀리,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은 붉은 빛무리와 함께 전해지는 폭발음을.
‘신호탄!’
틀림없다.
저건 본대를 앞질러 간 척후조가 쏘아 올린 신호탄이다. 그것도 매우 위급함을 의미하는 붉은색 폭죽.
차차차창!
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굳어 있던 것도 잠시, 곧장 눈앞에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인 이들은 망설임 없이 허리춤의 병장기를 빼 들었다.
“전투 준비!”
“무위검문의 문도들은 적들의 기습에 대비하라!”
“종남파의 제자들은 즉각 쇄월검진(碎月劍陳)을 펼쳐라!”
일순간 돌변한 기세에 찌르르 울리는 공기.
사방에서 번뜩이는 무수한 도산검림(刀山劍林) 속, 빗발치는 고함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아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말안장을 박찼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혁무진에게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고.
“현 위치 고수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자, 잠까……!”
후웅, 쐐애애액!
이어지는 뒷말은 듣지 못했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이 혁무진의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십여 장에 달하는 거리가 단숨에 지워졌으니.
나는 전신을 사로잡은 부유감(浮游感)을 느끼며 가벼운 발끝으로 허공을, 바람을 밟으며 높이 솟구치는 동시에 나아갔다.
“저, 저거!”
“궁수! 궁수는 무엇 하는가! 적이 나타났다! 쏴라!”
“이 멍청한 놈들, 활 내려! 아군이다!”
어느새 아득해진 지상에서 아직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몇몇 이들이 착각할 만큼 자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그런 내 뒤를 바짝 뒤쫓는 누군가의 인기척이 있었다.
“도무지 맘 편히 쉴 틈을 안 주는군.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이냐?”
마치 지면을 내달리는 것처럼 편안한 허공답보(虛空踏步)와 함께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나는 적천강의 물음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앞서 정찰 나간 척후조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생겼다는 건, 설마 노부가 생각하는 그것이냐?”
“아직은 모르죠.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저 멀리 굽이진 모래 언덕 위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어떤 상황이건 간에,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다시 한번 새삼 깨달았다.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나 늘 그렇듯이 빗나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쿨럭. 도, 돈황(敦煌). 돈황이……!”
바짝 말라붙은 입술과 파리한 안색. 거기에 더해 넝마가 되다시피 한 의복까지.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것 외에는 멀쩡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는 척후조와 달리, 고난과 다급함이 온몸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낯선 사내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노, 놈들에게…… 함락되었습니다.”
“……!”
“……!”
그리고 그가 말하는 ‘놈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는 이는, 우리 중 아무도 없었다.
암천(暗天).
광활한 사막 너머의 악귀들이, 마침내 모래의 강을 넘어 인간들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 * *
이름 모를 사내의 정체는 대설산(大雪山)에서 보낸 전령이었고, 그가 가져온 급보는 수뇌부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다, 다시 한번 말해 보게. 지금, 지금 뭐라고 했나?”
종남파라는 명문 대파의 장문인으로서 어느 상황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풍운검군이 말을 더듬었지만, 단 한 사람도 잠깐이지만 비웃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자리의 수뇌부 전체가 풍운검군과 다를 것 없는 심정이었으니까.
조금 전 전령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이야기는 모두의 귀를 의심케 만들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들의 반응에도, 전령이 재차 전한 정보는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 그것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 보게, 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질끈 감은 두 눈.
하지만 이내 입술을 꽉 깨문 대설산의 전령은, 쏟아지는 불호령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옥문관(玉門關)이 돌파당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옥문관은 오랜 과거 서역과의 연결을 담당하던 비단길의 주요 관문.
사방이 탁 트인 사막지대에 위치한 데다, 비록 작게나마 토성(土城)이 세워져 있기에 일대를 감시하기에는 적격인 곳이었다.
‘한 마디로, 소규모 부대로 국경을 감시하게는 안성맞춤인 요충지.’
물론 감숙 무림이 동원한 총병력과 비교해서 소규모일 뿐이지, 일전에 수뇌부 회의에서 언급되기로는 옥문관에 배치된 척후병의 숫자는 최소 일백이다.
아니, 일백‘이었다.’
이제는 그들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까.
“모두 죽었단 말인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땅히 확인해 볼 도리는 없었으나,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돈황의 삼백 리 앞까지 도달한 후에야 적들의 존재를 눈치챘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돈황이 적들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 정확히 언제인가?”
“약 사흘 전이라고 했습니다.”
“사흘 전……!”
수뇌부들 사이에서 침음성이 터져 나온 그때, 내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잠깐. 돈황이 아닌 대설산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그 소식은 누구에게서 들었습니까?”
“도호(道號)는 듣지 못했지만, 돈황을 지키던 공동파의 도사였습니다.”
“도호를 모른다?”
“예, 예.”
나는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공동파는 엄연한 도가 문파고, 그런 이들에게 있어 도호란 곧 자신의 이름이나 진배없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속세의 이름을 버리고 법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처럼, 통성명을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기는 무림인들 사이에서 도호조차 알리지 않았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두 가지 추측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첫째. 눈앞의 전령이 거짓 정보를 가져왔거나.
혹은…….
‘도호를 말할 틈도 없이 급박한 상황에서 죽었거나.’
그리고 뒤이어 이어진 전령의 말은, 내 두 번째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그 도사는 이미 처음 봤을 때부터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대설산에 도착한 지 촌각도 지나지 않아 숨이 끊겼지요.”
“허어.”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신음.
지금 이 순간, 수뇌부의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진 이유는 이름 모를 도사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무림에서의 전령은 적들의 포위를 뚫을 만큼 날래고, 일신의 무위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
한데 공동파에서 전령으로 보낸 이가 촌각도 지나지 않아 절명했을 정도라면, 도대체 돈황에 배치되어 있던 아군의 상황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물론 나를 포함한 이 자리의 모두는 그들이 어찌 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대부분이 앞서 들었던 충격적인 소식을, 마음속으로 애써 부정하고 있었을 뿐.
“사실이었군. 전부.”
차갑게 식은 적천강의 뇌까림에, 전령이 대답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참담한 소식이지만, 제가 전해 들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따지자면 그리 좋은 꿈도 아니었지만,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서 잔인한 현실을 마주할 때.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는 수뇌부들을 뒤로한 채,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본능적으로 서늘해지는 등골을 느끼며.
“최소 이천이 죽고, 삼천이 크게 다치거나 실종…… 맞습니까?”
전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을 뿐이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마침내 미루고 미뤄 두었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쩌겠소.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일만. 무려 일만이오! 한데 그 많은 병력이 그리 손쉽게 격파당했다니.”
그래, 일만.
무려 일만이다.
그런데 공동파를 중심으로 돈황을 지키던 그 대병력이, 심지어 수성전(守城戰)을 펼쳤음에도 절반이나 증발했다고 한다.
그것도 불과 반나절 만에.
하지만 비보(悲報)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동파의 전력 중 약 삼 할이 소실되었고, 다급하게 퇴각하는 과정에서 장로직을 맡고 계신 두 분의 진인(眞人)과 복마대(伏魔隊) 일백 전원이 돈황에 뼈를 묻었다고 합니다.”
“……!”
“……!”
곳곳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동파가 어떤 곳인가.
구파일방의 일익이요, 천하 무림을 지탱하는 열다섯 개의 거목 중 하나다.
한데 그런 공동파가 무너졌다.
이미 십여 년 전에 초절정의 반열에 올랐다고 알려진 두 장로와, 중원에까지 명성이 자자한 복마대의 희생을 뒤로한 채 퇴각한 것이다.
“하면. 장문인, 장문인께서는 어찌 되셨는가!”
풍운검군의 다급한 물음에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전령의 대답을 기다렸다.
현대의 기준으로 삼 할의 손실은 전멸로 판단할 만큼 궤멸적인 피해지만, 무림의 기준은 조금 다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고수의 존재.
비록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하더라도 일군의 중심이, 머리가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다.
감숙성 제일의 무인이자, 바로 그 흑야왕 사마공보다도 반 수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 공동파 장문인이 살아남았다면 반격의 여지는 충분하다.
그리고 수십여 쌍의 시선 속, 마른침을 꿀꺽 삼킨 전령의 한 마디는 불행 중 다행이라 할만했다.
“두 장로님과 복마대 전원이 옥쇄(玉碎)를 각오한 덕분에, 장문인께서는 무사히 전장에서 퇴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천만다행이오. 하늘이 도우셨소.”
참았던 안도의 한숨이 곳곳에서 흘러나온 그 순간. 한 사람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예?”
“그리고 어찌 되었냐 물었네.”
전령이 전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요동치는 대부분의 수뇌부와 달리 침착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
사마공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전령을 응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 잔존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셨다면 분명 대설산(大雪山)으로 향하셨을 터, 한데 자네의 말을 들어 보니 그 후로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는 듯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다시금 찾아온 침묵 속, 전령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소인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알 도리가 없다?”
“예. 순식간에 전황이 기울자 살아남은 아군은 절반으로 나뉘어 퇴각했고, 장문인께서는 그들 중 상당수를 이끌고 퇴각하시며 문하의 제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 명하셨다 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장문인의 명을 받고 온 힘을 다해 대설산으로 향한 제자는 더 자세한 정보를 전해 주기도 전에 숨이 끊겼고, 돈황을 지키던 일만의 아군은 산산이 와해 되어 지금껏 아무런 소식도 없다.
“그러나 대설산을 떠난 것이 한나절 전이니, 지금쯤이면 돈황에 있던 아군이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령의 덧붙임에 몇몇 수뇌부가 희망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글쎄.
‘가장 빨리, 누구보다 앞서 전장을 벗어났을 전령이 그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면…….’
암천의 대군세는 이미 돈황 일대를 그물질하며 대설산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아군을 쫓음과 동시에, 살아남은 아군을 쫓음과 동시에, 자신들을 가로막은 두 번째 전선을 무너트리기 위해.
‘놈들의 속도가 터무니없이 빠르다. 상상 이상으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즉시 전령을 보내서 기련산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시죠.”
“뭐?”
불쑥 내뱉은 한 마디에 사마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라고 했나?”
“기련산에 배치된 병력을 총동원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대설산까지 무너지면 끝장이니까요.”
“그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를 거쳐 결론을 도출한 것으로 아네만.”
착 가라앉은 눈빛을 한 사마공을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그 결론을 바꿔 보시죠.”
“……자네.”
“아, 착각하실까 봐 드리는 말씀인데.”
그리고 다음 순간,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며 나직이 덧붙였다.
“이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상산후(上山后) 진태경.
유려한 필체가 음각된 호패(號牌)를 바라본 사마공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