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58
1058화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전신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적들을 도살하던 혈의인(血衣人)들이 사마표를 포위하며 무시무시한 살기를 쏘아 보낸 것은.
스아아아.
그 머릿수가 약 일백.
그들이 발산하는 기파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전장의 열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고 단숨에 일변한 공기의 흐름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십여 장 밖에서 걸음을 멈춘 채 지켜보고 있던 내게도.
그리고 그보다도 먼 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명령을 따라 대기하고 있던 화룡각 대원들에게도.
“주군! 위험하다!”
거리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짙은 살기다.
본능적으로 사마표의 위험을 직감한 태산은 다급한 외침과 함께 신형을 날렸고, 이내 곧장 가로막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게.
“이게 무슨 짓인가, 각주!”
으르렁거리는 듯이 토해 내는 외침과 맹렬하게 발산되는 투기(鬪氣).
처음 본다.
녀석의 이런 모습은.
하지만 나로서도 물러설 수 없다.
지금의 이 상황은, 염병할 운명이나 불운 따위가 아니라 사마표 스스로의 선택이기에.
“가지 마. 아직은.”
“태산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은 따르지 않는다!”
“명령 내린 적 없어. 부탁한 거지. 사마표가 내게 나서지 말아 달라고 했던 것처럼.”
“……!”
태산의 퉁방울만 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리고 때맞춰 뒤쫓아온 화룡각 대원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남호가 평소답지 않은 침잠한 음성으로 불쑥 입을 열었다.
물론, 목말을 타고 있어서 그런지 딱히 권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네 녀석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다만,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니다.”
“남호, 하지만.”
“어허, 이 성난 황소 같은 놈을 보았나!”
찰싹!
야무지다 못해 앙칼진 손짓으로 태산의 이마를 후려친 남호가 준엄하게 일갈했다.
“정에 눈이 먼 것으로도 부족해서 이제는 귀까지 먹었누. 앞서 각주가 했던 말도 제대로 듣지 않았단 말이냐?”
맞다.
남호의 말처럼, 나는 태산에게 분명히 말했다.
아직은…… 가지 말라고.
‘그래, 아직은 아니지.’
마음속으로 작게 뇌까린 나는, 갈등 끝에 힘없이 대초자곤(大相子根)을 내려놓는 태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일백의 혈의인…… 아니, 공동파의 제자들을.
그런 그들의 중심에서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사마표를 응시하는 노인을.
‘현천진인(玄天眞人).’
그것이 노인의 정체였다.
명실상부한 구파일방의 일익인 공동파의 장문인이자, 감숙성 제일의 무인.
그리고…….
아군이라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수많은 제자를 잃어야만 했던, 또 한 명의 복수귀(復讎鬼).
화아아악.
웅혼한 공력에 소매가 부풀어 오른다.
지금 이 순간, 도무지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무감정한 먹빛 눈동자 위에 비친 것은 사마표가 아니었다.
단숨에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의 핏줄이었다.
* * *
우우웅.
반경 수 장의 공기가 부르르 떨리고, 숨이 막힌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처럼 서서히 사방을 조여 오는 막강한 기파에 사마표가 굳어 버린 그 순간, 현천진인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근래 들어 계속해서 떠오르더군. 정마대전의 한복판에서 도우(道友)의 춘부장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가.”
젖먹이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평생을 도가(道家)에 몸담은 이 노도사는 특유의 온화한 성품으로 신망이 높았다.
비록 십왕(十王)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을지언정, 그는 공동파라는 걸출한 명문대파의 장문인임에도 늘 겸손했고 항상 스스로를 낮추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큰 그릇이라 하더라도, 담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었다.
“동시에 후회했네. 차라리 그때 죽여 버렸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깊은 탄식이 묻어나는 그 음성에, 사마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아직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눈앞의 노도사는 이미 그 일부를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현천진인이 이와 같은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어느 한 여인의 입을 통해서였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네. 돈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흔들어 내분(內紛)을 일으키려는 수작이라고, 더욱 큰 흉계를 위해 우리를 발판으로 삼았다 생각하려 애썼지.”
현천진인은 풀숲 속에서 조용히 숨죽인 채 들었던 정보들을 머릿속에서 떨쳐 내고자 했으나, 날이 갈수록 의심은 깊어졌다.
흑야왕(黑夜王) 사마공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불신.
돈황으로 출진하기 전 느꼈던, 심상치 않은 징조까지 포함해 모든 것이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리고 있었다.
“돌이켜 볼수록 희한하더군. 흑룡마문으로부터 전해 받은 정보는 모조리 어긋났고, 피를 흘린 것은 우리뿐이었으니.”
예로부터 공동파의 근거지인 공동산(崆峒山)이 감숙성의 동남면 끝자락에 위치했다면, 흑룡마문의 권역은 돈황 일대를 아우르는 서북면.
그렇기에 공동파와 그를 따르는 여러 문파는 흑룡마문이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움직였고, 끔찍할 정도의 대패(大敗)를 당했다.
“수천이 죽었지. 그날 하루 동안에만.”
조금씩 떨려 오는 현천진인의 음성에, 사방을 에워싼 일백의 제자들은 이를 악물었다.
어찌 잊을까. 벼락처럼 시작된 그 참혹했던 전투를.
아니, 일방적인 학살을.
“수성(守城)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네. 홀연히 나타난 그 엄청난 대군과 마주한 우린 그 무엇도 할 수 없었어.”
천산삼노.
수십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돌아온 천산의 세 늙은이가 선봉에 섰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수만 명의 교도가 그 뒤를 따랐다.
쉼 없이 쏘아 보낸 화살도, 단단한 암석 위에 황토를 발라 세운 성벽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칠흑과도 같았던 그 거대한 인(人)의 파도는 단숨에 높은 성벽을 무너트리고 모든 것을 휩쓸었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누군가의 사형제, 벗, 혹은 혈육들의 생명을 집어삼키며.
“차라리 그곳에서 함께 싸우다가 죽고 싶었지. 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장렬하게.”
이는 비단 현천진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붉게 물든, 동시에 어느덧 습기가 맺힌 백여 쌍의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끝내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비명에 죽어 간 이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우리는 비겁하게 도망쳤네. 도중에 뜻하지 않은 도움을 받아 손쉽게 놈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겠지.”
행운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돈황에서만 수천이 죽었고, 피눈물을 흘리며 도주한 생존자들도 사냥감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고, 철저하게 사냥당하는 과정에서 다시 수천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암천의 포위망을 벗어난 후에도, 현천진인을 비롯한 공동파의 제자들은 후방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두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기에 당장은 복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술사가 그들의 마음 깊이 심어 놓은 의심은 이미 싹을 틔웠고, 앞서 벌어진 암천과의 전투에서 극심한 부상을 입은 현천진인은 고통에 신음하던 와중에 불현듯 깨달았다.
복수를 다짐하며 생사를 오가던 그 순간, 자신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 속 낯익은 면면들이 누구의 것인지.
그것은 은백색 면사로 얼굴을 가린 정체 모를 여인도 아니요, 두 장로와 수백의 제자들을 잡아 죽인 천산삼노나 혈검마군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자신들의 등 뒤를 든든히 지켜 줄 것이라 믿었던 아군들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않나, 도우.”
낮게 깔린 목소리.
사흘간 죽음의 고비를 견딘 끝에 가까스로 부상에서 회복한 현천진인은 생각했더랬다.
어째서일까.
곰의 쓸개를 씹듯이 복수를 다짐하던 그 순간에 왜 하필 그들이 떠올랐을까.
흑야왕 사마공. 노호검객 송일. 태을무정검 황보엄.
더불어 흑룡마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감숙의 여러 영수(領袖)들.
은백색의 면사 아래로 흘러나온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왜 가슴 깊은 곳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것일까.
결국, 현천진인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그 답을 확인하기 위해, 살아남은 제자들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복수를 시작하기에 앞서 스스로 찾아온 한 청년을 마주하고 있다.
“사마가(家)의 아해야.”
어느덧 뒤바뀐 말투.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노도사의 눈동자에는 차갑게 이글거리는 불꽃이 담겨 있었다.
“네 아비를 데려오거라. 검을 뽑기 전,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으니.”
드드득.
잘게 떨리는 지면.
고여 있던 피 웅덩이 위로 일어나는 파문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사마표는, 그때까지도 깊게 숙였던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이미 떠났습니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
현천진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마표를 둘러싼 채 숨 막히는 살기를 뿜어내던 모든 공동파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조금 전 들었던 말에 담긴 의미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죽었다.
흑야왕 사마공이.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죽음을 내려야 마땅한, 천인공노할 원수가.
그리고 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 배신자는, 비단 사마공뿐만이 아니었다.
“장문인!”
어디선가 들려오는 통렬한 외침.
화살 같은 속도로 수십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 공동파의 제자가, 슬픔과 분노로 얼룩진 얼굴로 현천진인의 앞에 엎드렸다.
“놈들이, 그자들이……!”
통곡과도 같은 그 부르짖음이 끝나기도 전, 불현듯 고개를 돌린 현천진인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비스듬히 솟아 있는 종남파의 깃발을.
아니, 정확히는 그 깃대에 묶인 채 힘없이 흩날리고 있는 두 개의 새하얀 천 조각을.
“조기(弔旗)……!”
누군가의 악물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탄식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기파가 거세게 출렁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흰색 천. 그리고 지금 막 되돌아온 제자의 반응.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노호검객 송일과 태을무정검 황보엄.
사마공에 이어 반드시 처단해야 할, 종남파의 두 배신자마저 떠난 것이다.
그 어떤 경신법으로도 잡을 수 없는 머나먼 그곳, 저승으로.
“죽어? 죽었단 말이냐? 이렇게, 고작 이런 식으로!”
으득.
현천진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으나 이 정도 고통 따위,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듯한 가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감히……!”
현천진인은 격노했다.
아직 성치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기운이 사방을 짓누르자, 주위에 있던 공동파의 제자들마저 숨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사마표만큼은 예외였다.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초절정 고수의 기파를 온몸으로 견뎌 내며 가까스로 쥐어 짜낸 음성에, 현천진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지금, 무어라 했느냐?”
“제가 대신한다 하였습니다. 죄 많은 아비의 잘못을,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마땅한 죗값을 받겠습니다.”
순간 내려앉은 침묵 사이에서, 사마표는 현천진인을 포함한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실로 건방진 언행이라는 것을 압니다. 별것 아닌 제 목숨으로, 떠난 이들의 원한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압니다.”
맞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채워 넣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한번 뚫린 구멍은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다.
그저 잊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해서 채워 넣거나, 채워도 채워도 메워지지 않는 그 구멍을 바라보며 기억할 뿐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사라진 것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후회를.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마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죽음에는 죽음.”
무림인 간의 혈채(血債)는, 오직 피로만 갚을 수 있다.
“베십시오.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스릉.
현천진인의 허리춤에서, 눈부신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