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57
1057화
광활한 설원을 둘러싼 그날의 대혈투에서, 더 이상의 이변(異變)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던 암천의 군세는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었고, 초절정 고수들과 잇따른 지원군을 앞세운 연합군은 거대한 폭풍과도 같았다.
모든 것을 찢어발기며 나아가는, 살의와 강철로 이루어진 폭풍.
콰드드득!
푸푸푹! 서걱!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피 분수.
자욱한 피 안개를 망토처럼 두른 채, 닥치는 대로 눈앞의 적을 찌르고 베며 돌격하는 연합군의 손속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죽음에는 죽음으로 되갚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무림(武林)의 법칙이자 전쟁의 본질이었으니까.
“천상천하, 만마…….”
퍼걱!
관병이 내지른 창날이 팔을 찌르고,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며 검이 얼굴과 가슴을 난도질한다.
여덟 글자의 교언(敎言)을 끝맺기도 전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적들의 시신들을 짓밟으며, 연합군은 이 거대한 도살장의 울타리를 좁혀 갔다.
빠르고, 격렬하게.
이지를 상실한 암천의 교도들을 상대로 회유나 생포라는 단어는 사치였고, 오늘 이 자리에서 연합군이 치러야 했던 막대한 희생은 자비를 잊게 만들었다.
가장 마지막에 합류했으나, 가장 앞장서서 적진을 휩쓸고 있는 일단의 무리에게는 더더욱.
쉬쉬쉬쉭!
피에 젖은 도포 자락이 흩날린다.
마치 목숨을 도외시한 듯이 단숨에 적진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그들의 움직임은 바람처럼 표홀했고, 무리의 선두에 선 노인의 검을 타고 솟구친 검광(劍光)은 잔인하리만치 눈부셨다.
콰아앙!
거대한 폭음이 대지를 떨쳐 울린다.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린 살점과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기(罡氣)가 스쳐 지나간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있다면 오직 피와 죽음.
더불어, 흐트러진 적들의 전열(戰列)을 완전히 짓뭉개며 들이닥친 연합군의 거대한 함성만이 있을 뿐.
“와아아아아!”
“돌격! 돌격하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지금 이 순간, 연합군은 제각각 다른 색을 지닌 하나의 파도나 다름없었다.
극심한 혼전 속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고 오와 열을 맞춰 돌격하는 금의위.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그들의 뒤를 따르는 감숙의 관군과 무림인들.
그리고 처음과 달리 수가 확연히 줄어든 종남의 제자들과, 어느 순간 불현듯 나타나 연합군에 합류한 정체불명의 기마인(騎馬人)들까지도.
두두두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지축.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함성은 끝없이 울려 퍼졌고, 온 사방을 빽빽하게 메운 강철의 숲은 침략자들을 뒤덮으며 무수한 꽃과 가지를 피워 올렸다.
피와 뼈로 이루어진 붉은 꽃과 새하얀 가지를.
그것이 이 길고도 잔혹했던 대전투의 끝이었다.
반나절의 시간이 더 흘렀을 때, 물경 삼만을 아우르던 암천의 교도 중 자신의 의지로 전장에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도.
* * *
현대의 군사 용어에서 전멸이란 곧 전투 역량의 상실을 뜻한다.
병력, 장비, 보급, 사기 등.
통상 삼 할 이상의 전투원이 죽거나 다친 상황에서 살아남은 전투 병력의 의지가 흔들린다면, 전투를 계속 이어 갈 수 없다는 판단하에 곧 전멸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무림에서는, 지금 이 순간 진태경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달랐다.
전멸(全滅).
단어에 담긴 뜻 그대로다.
아니, 어쩌면 전멸이라는 두 글자로도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을지 모른다.
살육, 학살.
혹은.
‘……도살(屠殺).’
차마 토해 내지 못한 그 단어가 혀끝에서 맴돈다. 진태경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다.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이 붉게 물들어 있다.
새하얗던 눈밭도, 눈을 부릅뜬 채 피 웅덩이에 잠겨 있는 시신들의 얼굴도.
그리고 강이 되어 흐르는 핏물과 시체의 산을 헤집으며, 기적처럼 살아남은 적들을 찾고 있는 핏발 선 눈동자들도.
푸욱!
거칠게 떨어져 내린 검신이 수많은 시체의 틈바구니에서 꿈틀거리던 적의 가슴을 파고든다.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았고, 한번 살아남은 것은 오히려 불행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진즉 숨이 끊어졌다면, 훨씬 더 빠르고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테니.
콰드득.
몸속 깊숙이 파고든 날붙이가 천천히 비틀린다.
뼈와 살이 짓이겨지는 그 끔찍한 소리에, 더불어 그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살의(殺意)에 진태경의 곁에 있던 화룡각 대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태경은 손을 들어 이어지려는 뒷말을 막아 세웠다.
안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건 살인이 아니다. 가축을 처리하는 것과 같은 도살이다.
그러나 동시에, 저항할 힘조차 없는 적에게 저토록 잔인한 최후를 내리는 이들의 심정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대기해.”
화룡각 대원들에게 그 한마디를 툭 던진 진태경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견딜 수 없는 피로가 밀려왔지만, 어디에선가 불쑥 뻗어 나온 누군가의 손길이 비틀거리는 신형을 부축했다.
“분명히 대기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진태경의 뇌까림에, 사마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그런 말은 듣지 못해서.”
“지금이라도 들었으니까 뒤로 물러나.”
“그럴 수는 없지.”
“명령이야.”
“명령이라, 결국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그래.”
진태경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고, 그것은 뒤이어 울려 퍼진 사마표의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아,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시간부로 화룡각을 떠나겠네.”
“……!”
일순간 눈을 크게 뜬 진태경을 향해, 사마표는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왜, 이건 예상치 못했나 보지?”
“……너.”
“그동안 즐거웠네, 각주. 하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것도 여기까지야.”
사마표는 담담한 시선으로 진태경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더 이상 자네나 다른 이들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건 간에, 그건 오직 나 홀로 감내해야 하는 일이겠지.”
그는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한계에 다다라 있던 진태경이 왜 지금까지도 의식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부터 자신이 홀로 걸어가야 하는 이 길 끝에, 얼마나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럼에도 지금처럼 침착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나서지 말게. 그리고 만에 하나 내게 문제가 생긴다면…….”
흐려지는 말꼬리와 함께, 사마표의 시선이 문득 태산을 향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진태경이 한마디를 툭 내던진 것은.
“싫은데?”
“뭐?”
“싫다고, 새꺄. 네 사람은 네가 챙겨. 가뜩이나 고생하는 사람한테 짬 때릴 생각 하지 말고.”
잠시 말문이 막혀 있던 사마표는, 이내 진태경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피식 실소를 흘렸다.
“맞는 말이야. 저 녀석만큼은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지. 반드시.”
그럴 수 있다면, 네 말대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끝끝내 내뱉지 못한 뒷말을 조용히 삼키며, 사마표는 홀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런 사마표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진태경은 불현듯 입을 열었다.
“갑자기 궁금해진 건데…… 우리가 태원진가를 떠나던 날, 혹시 기억나냐?”
당연했다.
몇 년이나 몇 달도 아닌, 불과 달포 남짓밖에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었으니까.
더불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진태경이 왜, 무슨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물론. 서쪽으로 출발하기 직전, 남 노인과 태산이 직접 나를 찾으러 왔었지.”
그날 밤, 사마표는 감숙에서 보내온 밀서(密書)를 읽고 있었다.
이미 보고, 또 보았음에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두 사람의 인기척이 문 앞까지 다가올 때까지도.
“평소에는 칼같이 시간을 지키더니, 그날따라 늑장을 부렸더라. 꼭 누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혼잣말처럼 뇌까리는 진태경의 음성에, 사마표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그날따라 생각할 게 많더군.”
“남 노인은 늙었지만 훌륭한 요원이야. 나이에 비해 후각도 예민하고.”
“그래, 그에 반해 귀는 어두워서, 목청도 크지.”
걷기만 해도 땅이 울리는 구척장신의 거한과 말 많고 목청 좋은 노인의 조합.
어디에서나 눈에 띄고, 잘 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날 밤, 처소에 홀로 남아 밀서를 읽고 있던 사마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의도했던 거지? 처음부터.”
“아니. 전혀.”
거짓말이었다. 새빨간.
사마표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찾으러 올 가장 오래된 친구를.
아니, 그런 태산과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은영각의 늙은 요원을.
동시에, 내심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남호가 조금이라도 알아차려 주기를.
이로 말미암아 경계해 주기를.
“왜, 어째서 그렇게까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진태경의 나직한 물음에, 사마표는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래도…… 내 아버지니까.”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까지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배반당했을 때, 곁에 있는 이들을 위험에 빠트리기 싫었다.
하여 일부러 경고의 의미로 단서를 남겼다.
아들이 아버지의 수상한 움직임을 밀고하기 전에, 그들이 자연스럽게 의심을 품을 수 있도록.
설령 사마표 자신 또한 그 의심의 대상이 될지라도, 모두의 신변이 안전해질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의심당하고, 미움받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흑야왕 사마공의 혈육으로, 흑룡마문의 소문주로 산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를 바라보는 남호의 시선이 날카롭고 깊어진 이후에도, 진태경은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러는 자네는, 왜 끝까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나?”
줄곧 뇌리에 맴돌던 의문을 입밖으로 꺼낸 바로 다음 순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 뒤에서 울려 퍼진 짧은 대답에, 사마표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그래도, 친구니까.”
“……!”
“시벌, 모르겠다. 분명히 겉모습만 보면 칙칙하고 시커먼 놈인데…… 계속 믿고 싶더라고. 점점 개판이 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그러고 싶더라고, 내가.”
사마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고, 흔들리는 발걸음을 재차 옮길 뿐이었다.
어느샌가 퍽 멀어져 버린, 진태경의 마지막 음성을 들으며.
“죽지 마라. 이건 명령이야.”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명령에, 사마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처참한 전장을 돌아다니며, 살아남은 적들을 도살하는 일단의 무리를 향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한 노인을 향해.
철벅.
마침내 우뚝 선 발걸음과 함께 출렁이는 피 웅덩이.
사마표는 크게 심호흡했다. 헛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정도의 악취와 피비린내가 콧속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되레 차분하고 잔잔했다.
속을 읽을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눈앞에 멈춰 선 원수의 자식을 바라보는 어느 노인의 표정처럼.
“무림말학 사마표, 대 공동파(崆峒波)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그 순간.
스아아아.
끔찍하리만치 거대한 살기(殺氣)가, 온 사방에서 솟아올라 사마표의 전신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