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98
1098화
사람의 신체에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그리고 오감(五感)의 극한에 도달한 초절정 고수들은 상대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움직임만으로도 그에 담긴 뜻을 읽고 해석해 낸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 그래서, 네 녀석은 끝까지 말하지 않을 셈이냐?
나직한 전음과 끝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은 눈빛.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찰나의 동요를 완전히 감추지 못했고, 그 흔들린 눈빛은 곧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 마지막 순간, 혈주 그놈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씹어 뱉는 듯한 전음과 함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적천강의 심유한 눈빛에, 나는 문득 깨달았다.
설령 그가 천하에서 손꼽히는 초절정 고수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동요를 내비치지 않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 뿌리에서 자라난 나무의 가지들이 뻗은 방향이 다를지언정 서로 연결되어 있듯, 늙은 스승은 이미 제자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 회춘하셔서 그런가, 귀가 더 밝아지셨네요.
이런 상황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적천강은 과거 태원진가로 쳐들어와 나를 겁박했던 노호검객(怒號劍客)의 전음을 엿듣고 그를 묵사발 낸 전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혈주는 노호검객과 비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고강한 무위를 지닌 자.
소림혈사 때보다도 더욱 진일보한 놈의 전음을 읽어 내는 것은 적천강으로서도 무리라고 여겼고, 성안으로 돌아온 후부터 지금껏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내심 안도했었다.
물론,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면 결국 잘 쳐줘야 절반짜리 답안지에 불과했지만.
“대답하거라. 어서.”
불현듯 적천강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육성.
그로 인해 단번에 집중된 수십 쌍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원하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예상하신 바가 맞습니다. 혈주, 그놈이 제게 제안하더군요.”
“무엇을 말이냐.”
“지금부터 하루의 말미를 줄 테니, 홀로 성을 빠져나와 스스로 사지 근맥을 끊고 투항하라고요.”
“……!”
“……!”
일순간, 보이지 않는 파동이 주위의 공기를 찌르르 울렸다.
이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침음 속, 적천강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녀석의 목숨줄을 쥐는 대가로 다른 이들의 안위를 약속했더냐?”
역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지?”
“고민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고민했을 테니까요.”
“고민? 그따위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말이냐?”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혈주가, 천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면 한 사람의 목숨값으로는 충분히 남는 장사죠. 아닙니까?”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살성이, 내 시선과 마주치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넌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
“그게 뭡니까?”
“신뢰. 거래를 주고받는 상대에 대한 신뢰성이다.”
망설임 없이 대답한 살성이 말을 이었다.
“놈들은 결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조금 전의 내가 스스로의 실력을 믿고 도박을 하는 거라면, 너는 애당초 믿을 수 없는 대상을 상대로 거래를 하려 하고 있지.”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모르겠다.
아니, 마음 한구석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적천강이, 살성이 하는 모든 말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마지막 제안을 하기 이전에 혈주가 내게 내비쳤던 그 진득한 살기(殺氣)와 반드시 죽이겠다는 다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리라는 것을.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거래를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던 이유 또한 명백했다.
“지금 천주의 목표는, 오직 저뿐입니다.”
돌이켜 보면 천주는 늘 나를 원해 왔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지 않았다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나를, 천하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앞길을 번번이 막아서는 가장 큰 걸림돌을 지금껏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주가 나를 원하는 정확한 이유?
모른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 사실만큼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놈에게 있어, 지금의 저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나는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동시에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이 천하보다도 더.”
“……!”
“……!”
더는 감출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드러난 진실은, 소름이 끼치도록 차갑고 어두웠다.
일순간 얼어붙어 버린 주위의 공기처럼.
그리고 나를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또 다른 이유처럼.
솨아아아아.
침묵 가운데 온 사방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줄기를 뒤로한 채, 나는 머나먼 동쪽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귓가를 파고드는 저 빗소리가, 마치 뱃머리를 따라 갈라지는 물살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과 함께.
‘놈들이 오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느껴진다.
이미 확연히 기울어져 버린 이 전장의 저울추를 완전히 부러트릴, 서녕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휩쓸어 버릴 최후의 파도가.
* * *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새와 벌레, 물고기조차 잠들고 오직 달만이 휘영청 떠 있을 때가.
장강(長江)의 어부들은 그런 날을 좋아했다.
굳이 물고기를 그물질하지 않더라도, 혹은 어부가 아니더라도 그날만큼은 모두가 강가로 나가 멱을 감고 배를 띄워 싸구려 화주(火酒)나마 술잔 가득 기울이곤 했다.
자신들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준 이 광활한 강줄기에 감사하며, 수면에 비친 달을 저으며 노래를 부르고 그들만의 시간을 즐겼었다.
분명.
그랬던 때가 있었다.
촤아아아악!
깊은 밤, 칠흑 같은 강물이 갈라진다.
먹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달이 수면에 제 얼굴을 비춰 보기도 전, 수백에 달하는 뱃머리가 그 위를 뒤덮으며 나아갔다.
맹렬하면서도 끝없이.
그 광경은 마치 하나의 도시가 움직이는 것과 같았고, 거침없는 파도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세상 모든 만물의 어버이이자 지배자인 천자(天子)조차 막을 수 없는, 하늘의 이치를 거슬러 역천(逆天)을 꿈꾸는 거대한 물결.
그리고 한껏 부풀어 오른 돛을 따라 휘날리는 무수한 깃발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무슨 용무더냐.”
뱃머리에 몸을 기댄 채, 위풍당당한 필체로 깃발을 장식한 장강수로맹(長江水澇盟)이라는 다섯 글자를 말없이 올려다보던 노인이 천천히 돌아서며 덧붙였다.
“그것도, 기별도 없이 혼자서.”
노인, 해상왕(海上王) 파륜의 나직한 음성에 때아닌 불청객을 데려온 수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맹주. 그것이…….”
“되었다.”
단칼에 수하의 입을 다물게 만든 파륜은, 돛대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 서 있는 불청객을 향해 말을 이었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까지 임무에 소홀히 하는 자는 엄벌로 다스리겠다 했거늘, 벌써 잊었느냐?”
불청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하면, 제자만큼은 예외일 것이라 생각했느냐?”
“그 또한 아닙니다.”
“하면?”
저벅.
무거운 발걸음과 함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선화아(船火兒) 무송이 대답했다.
“스승님과 함께 달구경이나 할까 하여 왔습니다.”
달구경이라.
자신도 모르게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 파륜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본 맹의 규율에 따라, 날이 밝는 대로 갑판에서 태형(笞刑) 서른 대를 집행하겠다.”
순간 멈칫한 무송이 곧장 반문했다.
“스무 대 아니었습니까?”
“명령을 어긴 데다가 헛소리까지 지껄였으니, 그 정도는 각오했겠지. 서른 대.”
“그건.”
“마흔.”
말문이 막힌 무송이 침묵한 그때, 파륜이 아직까지도 자리에 남아 있던 수하를 향해 덧붙였다.
“본연의 임무에 소홀했던 것은 네놈 역시 마찬가지. 태형 열 대다.”
“매, 맹주.”
“이만 물러나거라. 이 일은 불문(不問)에 부치고.”
장강수로맹의 그것은 일반적인 태형이 아니다.
단단한 박달나무로 만들어진 노에 물을 흠뻑 묻혀, 계율을 담당하는 절정 고수가 집행하니까.
비록 공력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열 대만 맞아도 엉덩이 살이 짓무르고 뼈가 몇 군데 부러지는 건 기본이니 두어 달은 앓아누워야 한다.
하지만 해상왕 파륜의 엄격함은, 자신의 제자나 삼십여 년을 따른 수하일지라도 예외일 수는 없는 법.
결국 별다른 말 없이 물러난 수하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갈라지는 강물을 바라보던 파륜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십 대로 해야겠군.”
“예?”
“누구의 잘못인지는 명백하니, 십 년이라도 더 젊고 팔팔한 네 녀석이 대신 맞거라.”
그런 스승을 멍하니 바라보던 무송이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그 정도면 저도 석 달은 옴짝달싹 못 할 테니, 오히려 이게 더 나을 수도 있겠군요.”
“말에 뼈가 있구나.”
“그렇다면 제대로 들으신 겁니다.”
크게 심호흡한 무송이 돌연 무릎을 꿇었다.
쿵.
“부디, 부디 단 한 번이라도 결정을 재고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울림이 가라앉기도 전에,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의 갑작스러운 오체투지(五體投地)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눈은 여전히 장강을 향하고 있었다.
“옳지 않다, 라.”
“가당치 않은 소리라는 것은 압니다. 저 역시 코흘리개 시절부터 수적으로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약탈이 업이었다.
이립의 나이로 수룡채를 맡게 된 이후부터는, 많은 식구를 거느린 채주로서 남의 것을 빼앗고 그것을 수하들과 함께 누려 왔다.
그러나…… 이런 것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강이 피로 물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겁니다. 제가, 아니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저 넓고 푸른 강물이 말입니다.”
어느샌가 파르르 떨려오는 무송의 목소리에, 파륜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였느냐? 지난번 전투 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 많은 관군들을 포로로 잡은 이유가.”
“알고…… 계셨습니까.”
“이 장강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노부가 모르는 것이 있을 것 같으냐?”
“……!”
“너뿐만이 아니다. 셋째도, 적지 않은 숫자의 중진들도 엇비슷한 수작을 부렸더군. 아니, 항명(抗命)이라고 해야 하나?”
“스승님, 이건 결코 항명이 아닙니다. 저희는 단지……!”
“감히, 누구의 안전에서 목소리를 높이느냐.”
고개를 돌린 파륜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무송을 내려다보았다.
“노부는 죽이라 명했고, 너희는 죽였어야 했다. 그 관군들은 그래도 되는 이들이었으니.”
“아닙니다. 그들은 구태여 죽일 필요도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차라리 강자였다면 사정을 봐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송으로서도 스스로를, 수하들을 지켜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그가 마주한 관군들은 너무나도 약했다. 피를 보는 것이 무서워질 만큼.
“그건, 그건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학살이었습니다.”
“그래. 노부는 그걸 원했느니라.”
“……!”
“하지만 결국 한 치의 오차 없이 명령을 수행한 것은 네 사형과 장로(長老)들뿐이었지.”
스아아아.
무송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멈춰야 한다.
스승의 분노를 생각한다면 멈추는 것이 옳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지만 머리 위로 쏟아지는 그 압도적인 기파(氣波)에도, 무송은 이를 악물며 버텨 냈다.
지금 이 순간 눈앞을 스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무공은 개같이 강한 데다 성격은 지랄 맞아서 온갖 고욕을 치러야 했지만, 자신 같은 수적 따위도 협(俠)을 좇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그.
진태경을.
“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전신을 짓누르는 강대한 기파 속, 무송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대사형도, 그리고 그 빌어먹을 장로들도. 스승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뭐라?”
“그들이 충성하는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마, 말입니…….”
쿵.
거기까지였다.
그가 십왕(十王)의 일인인 파륜의 기세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제자를 심유한 눈빛으로 내려보던 스승은, 이내 다시 강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뇌까렸다.
정확히는 어느덧 황톳빛을 띠기 시작한, 황하의 지류를.
“그래. 차라리 그대로 있거라. 이제 와 네가 나선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끝을 향해 달려갈 뿐이니.”
그때, 먹구름 사이로 다시 고개를 내민 달빛이 지상으로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강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풀숲 사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영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천, 아니 수만에 달하는 그림자들이.
“다시 보니, 달구경 하기에 썩 괜찮은 날이로군.”
달빛처럼 흐릿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와 함께, 장강수로맹의 깃발을 단 수백여 척의 함선이 새로운 아군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