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77
#376화
인산인해(人山人海).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산서잠룡, 아니 열화신룡 진태경과 화산신룡 청풍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비단 무림인뿐만 아니라 겁 없는 양민들까지 더해지니, 배웅에 나선 인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셀 수가 없었다.
“잘 가시오! 열화신룡!”
“사천 무림은 그대들을 잊지 않을 거요!”
“뿔 달린 뱀이다! 화산신룡이 뿔 달린 뱀을 갖고 있다!”
“헉, 뱀이 공중제비를 돌았다!”
“화왕! 화왕이 뱀을 붙잡아서 태우려고 하고 있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행렬을 따라 서서히 멀어져 간다.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언덕 위,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 문득 입을 열었다.
“멀리도 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힘이 드는군요.”
거친 숨소리와 함께 풀밭에 털썩 주저앉는 늙은 제자의 모습에 소년, 문경은 중얼거렸다.
“……참으로 멀리도 왔어.”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문경은 지나온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느냐?”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늙은 제자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마치 그날의 따가운 햇볕이 자신에게 내리쬐고 있는 것처럼.
“홍무(洪武) 일 년. 유난히도 무더웠던 그해 여름을.”
황위를 둘러싼 내전이 끝나고 새로운 천자가 즉위한 해였다.
젊고 야심만만한 황제는 연호(年號)를 바꾸고 개혁을 꾀했으나, 기나긴 내전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은 천자의 뜻을 받들어 개혁에 동참하기에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천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이 들끓었지.”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평야를 휩쓸었습니다. 관군과 반란군의 시신이 도처에 가득하니 역병이 창궐했지요.”
“그래, 실로 난세(亂世)였다.”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낳았고 이내 대륙을 집어삼켰다.
동씨 성을 쓰는 젊은 목수 역시 천하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고는 합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바꿔 놓은 것은 강산뿐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두 아이와 아내를 역병으로 잃어야 했던 젊은 목수는 어느덧 늙은 의원이 되어 있었다.
“제가 조금만 빨랐더라면, 더 빨리 스승님을 찾았다면 가족들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후회하느냐?”
“예.”
하늘과 가까운 언덕에 앉아, 떠다니는 조각구름을 바라보는 늙은 의원의 눈동자는 어느새 젊은 목수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 숨이 붙어 있는 한 평생토록.”
고작 하루 차이였다.
목수가 역병에 걸린 몸을 이끌고 화전민촌에 머무르던 이름 모를 노의원을 데려왔을 때는 모든 것이 늦은 후였다.
그는 꼬박 하루를 울었고 가족들을 묻기 위한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자신이 데려온 의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함께 묻어 주십시오. 제가 그리 청했지요.”
문경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네 뺨을 때려 주었지.”
“많이 아팠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고통보다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저를 스승님께서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문경은 고개를 저었다.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난 것은 네 의지였어.”
“살아야 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까요.”
본래대로라면 목수 역시 역병으로 죽었어야 할 몸이었다.
그러나 의원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의술로 그를 완치시켰고, 목수는 처음으로 하늘이 정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한낱 인간 역시 바꿀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직도 눈앞에 선하구나. 제자로 받아 달라며 무릎을 꿇던 네 모습이.”
“이 제자가 기억하는 것과는 다르군요. 저는 따라오라며 손짓하시던 스승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가족을 잃은 젊은 목수는 새로운 목표를 찾았고, 천하를 주유하며 힘없고 가난한 병자를 보살피던 늙은 의원은 새로운 제자를 얻었다.
이제는 의원이 된 목수, 동봉(童奉)이 스승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살성(殺星)…… 실로 무시무시한 별호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스승님이 낯설게 느껴졌지요.”
문경은 무감각한 시선으로 저 너머를 바라봤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그가 자신의 제자에게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왜 떠나지 않았느냐?”
“제가 스승님을 떠날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숨을 해쳤다. 과거를 숨긴 추악한 살귀(殺鬼)에 불과했지. 네가 떠난다 해도 이해했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스승님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의(神醫). 제 스승님은 신의라 불리는 분입니다. 이유 없는 살생을 저지르실 분이 아닙니다.”
“……!”
문경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건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었다.
그는 살수로 살아오며 정(正), 사(邪), 마(魔)를 가리지 않고 숱한 목숨을 직접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자들이었다.
공명정대함으로 이름 높은 정파의 대협은 여인을 간살하는 취미가 있었고, 어느 사파의 고수는 재미 삼아 촌락 하나를 몰살시켰다.
중원을 침공한 마교의 군세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를 일삼지 않았다면, 보다 못한 천하제일의 살수가 나서서 악명 높은 마두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살성(殺星)이라 불릴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마교와 싸우지 않았다면, 온 천하가 나를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살성이라는 별호는 천하 무림의 주인이 된 정파가 그에게 내리는 면죄부이자 강자에 대한 찬사일 뿐이었다.
문경은 늘 문경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모두 지난 일이다. 나는 무림을 떠나고자 했고, 뜻한 바에 따라 의원이 되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사천당문을 빠져나간 기나긴 행렬은 저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이만 내려가자. 우리를 기다리는 병자들이 있다.”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걸음을 뗀 그 순간이었다.
“곧 거대한 전란(戰亂)이 일어날 것입니다.”
문경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등 뒤로 늙수그레한 제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때와 같은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죽고 다치겠지요. 부모와 자식을 잃은 자들이 넘쳐나고, 비명과 죽음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많이 바빠지겠군. 준비를 해 둬야겠어.”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스승님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싶지 않다.”
“스승님.”
“나는 의원이다. 비록 스스로 약속한 바를 깨고 어쩔 수 없이 살생을 저질렀으나,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없을 것이다.”
문경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싸우는 것은 저들의 몫이고,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내 뜻은 이미 무림을 떠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무공을 놓지 않으셨습니까.”
“……!”
문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건 스스로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살생이 싫어 무림을 떠나고자 했다면, 살생을 위한 수단인 무공 역시 전폐해야 맞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무공은 한층 진일보했다. 무공에 대한 끈과 미련을 놓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짧은 상념을 깨트린 것은 늙은 제자의 목소리였다.
“스승님께서는 수백, 수천의 병자를 치료하실 수 있으십니다. 동시에 수만의 인명을 구할 수 있는 분이기도 하지요.”
“…….”
“살성(殺星)이 아닌 신의(神醫)로서 전란을 막아 주십시오. 이 제자는 이곳에서 병자들을 보살피겠습니다.”
문경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맑고 푸르르다. 사천당문이 피로 물들었던 칠 주야 전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었다.
“하늘이 맑구나.”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멈춰 있던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만 병자들을 살피러 가 보아야겠다. 천천히 내려오너라.”
언덕을 내려가는 그의 등 뒤로 동봉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술시(戌時). 성도의 서쪽 항구에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부질없는 짓.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무림이 아니다.”
그러나 서서히 멀어지는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늙은 제자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부디…… 강녕하십시오.”
휘이이잉.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 * *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혁무진의 물음에, 항구를 에워싼 인파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별거 아니다. 그냥 혹시나 해서.”
“그러니까 뭘요?”
“이 자식이,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내 대답에 혁무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실 다 알고 있습니다. 조장님께서 왜 그러시는지.”
“……?”
순간 멈칫했다. 이 자식이 어떻게 그걸 알지? 나와 신의가 나눈 대화는 청풍도 듣지 못했는데.
‘이 녀석 눈치가 이렇게 빨랐나.’
의아해하던 그때, 녀석이 작게 속삭였다.
“저기 앞줄 우측 네 번째에 서 있는 소저를 보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
“확실히 예쁘긴 하네요. 제법 있는 집 규수 같아 보이는데. 조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오른팔인 제가 슬쩍 가서 따로 자리를…….”
“무진아.”
“예? 아, 혹시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시는 쪽입니까? 그렇다면…….”
“장강 밑바닥에 가라앉고 싶니?”
“……!”
“개소리하지 말고 계속 거기 누워 있어. 나중에 멀미 난다고 토하지나 말고.”
“……옙.”
조용히 찌그러지는 혁무진의 모습에 궁기방이 킬킬거렸다.
“멍청한 작자 같으니. 우측 네 번째가 아니라 좌측 세 번째 여인이다. 누가 봐도 훨씬 미인인데 눈깔이 삐었군.”
“눈깔 삐꾸 만들어 줘?”
“……미안하다.”
“사람답게 살자. 사람답게.”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은 나는 마지막으로 구름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을 쭉 훑었다.
확실히 둘 다 예쁘긴 하지만 궁기방이 말한 좌측 세 번째가 내 스타일…… 아, 이게 아니지.
‘아 씨, 저 자식들이 떠들어 댄 것 때문에 괜히 자꾸 보게 되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릿빛 체구의 거한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보게, 후배. 아니 후배가 아니라 진 소협, 아니 대협.”
뭐야, 버퍼링이야?
나는 번개에 콩 볶듯 호칭을 바꿔 대는 선화아(船火兒) 무송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그냥 후배라고 하시죠.”
“커흠. 그, 그래도 되겠나?”
“안 될 건 뭡니까. 전에는 잘만 하시더니.”
“그래도 그, 자네가 워낙 큰일을 해내지 않았나.”
그렇긴 하다. 산서잠룡이라는 지역구 후기지수에서 이제는 전국구 유명인사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적 대협께서도 나를 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길래…….”
“괜찮아요. 애초에 물을 별로 안 좋아하셔서.”
무송이 힐끔거리는 곳에는 잔뜩 성난 얼굴의 적천강이 있었다.
바로 옆에는 진위경이 뭔지 모를 죽간을 들여다보고 있고, 청풍은 미미에게 새로운 기술을 연습시키고 있었다.
“미미, 파도타기!”
취릭, 촤아아악!
……저거 물뱀이었나.
좀처럼 보기 힘든 진귀한 광경에 잠시 시선을 뺏겼던 무송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출항 준비는 이미 끝마쳤는데 언제쯤 출발하면 되겠나?”
“혹시 지금 시간이?”
“자네가 말했던 술시가 지났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좋아.”
“……음.”
“혹시 더 올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무송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어요.”
“그럼 출발해도 되겠군.”
“그렇게 하시죠.”
“알겠네.”
무송이 손을 번쩍 치켜올리자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수적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환송을 위해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정지, 정지!”
항구에서 떨어지려던 쾌조선의 뱃머리가 흔들렸다.
나는 저 멀리, 사람들 사이를 해치며 다가오는 한 소년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한 사람만 더 태우고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