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94
#393화
전쟁은 전투의 연속이다.
숱한 피와 죽음을 남긴 그날의 전투가 끝나면 비로소 승패가 갈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내일의 전투를 준비한다.
쓰촨성 동서부 전선을 맡은 수뇌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다.
「피해가 너무 큽니다.」
가장 먼저 말문을 뗀 것은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의 군인이었다. 피가 말라붙은 군복을 걸친 그가 피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간신히 고지(高地)를 지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오늘 하루만 3천이 넘는 병력을 잃었습니다.」
상처뿐인 승리.
3천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 손실도 손실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전사자 중 3할 이상이 헌터이며 그중엔 사령관을 비롯한 고위장교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세 배에 달하는 병력 차를 감안하더라도 타격이 엄청났다.
「상부에서는 답신이 왔소?」
「물론입니다. 내부 회의를 거쳐 동이 트기 전에 새로운 사령관을 파견한다더군요.」
「그나마 다행이로군. 그럼 혹시 신임 사령관은 누구…….」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 한 사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다행? 정말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
침묵을 지키던 사람의 말은 무게감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대격변의 영웅이자 S급 헌터라면 더더욱.
「비행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사령관을 포함한 지휘부 중 절반이 찢겨 죽었어. 휘하 병력은 우왕좌왕하다가 피해가 가중되었고. 이런 상황을 두고 다행이라고 할 수가 있나?」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담긴 눈빛에 사람들이 움찔했다.
「그, 그게 말입니다.」
「변명하려는 것 보니까 본인들도 알긴 아나 보네. 그런데…….」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서늘한 목소리.
좌중을 차례대로 응시하던 파이 첸의 시선이 한 사내에 이르러 우뚝 멈췄다.
「넌 왜 변명조차 없을까?」
잠시 침묵하던 사내, 우헤이싱이 술이 담긴 크리스털 잔을 흔들었다.
「제가 왜 변명을 해야 합니까.」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파이 첸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떤 병신 하나가 맡은 지역을 이탈하는 바람에,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비행 몬스터들이 사령부를 갈기갈기 찢어 놔서가 아닐까?」
「……그건 전방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우헤이싱의 대답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했다. 그가 후미를 이탈했을 때, 파이 첸이 이끄는 전방의 병력은 끝없이 밀려드는 몬스터 군단의 공세를 잘 막아 내고 있었으니까.
「아, 그것도 있었구나. 네가 멋모르는 애새끼처럼 전공을 세우겠답시고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진형 허물어진 거. 너 구하겠다고 쫓아갔던 아이들, 시신도 못 찾은 건 아니?」
「죽고 사는 건, 전장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럼. 흔한 일이지.」
파이 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같은 녀석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일은 더 흔했고. 그러고 보면 세상 참 좋아졌어. 대격변 때였으면…….」
하지만 파이 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쩌적,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크리스털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잔을 박살 낸 우헤이싱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쯤 하지?」
「하지? 너, 말이 상당히 짧다?」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파이 첸.」
「더 지껄여 보렴. 말이 짧아지는 것만큼 네 수명도 짧아지고 있다는 건 알아 두고.」
「매국노나 다름없는 홍콩계 따위가 어디서 감히……!」
「아하, 네가 똥 싸 놓은 전선을 수습한 그 홍콩계가 날 말하는 거라면 맞는 것 같은데.」
스아아아아.
두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온 막대한 기세가 내부를 잠식했다. 엄청난 압박감에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리고 두 S급 헌터의 짧은 대치는, 다음 순간 파이 첸의 입가에 떠오른 조소(嘲笑)와 함께 끝이 났다.
「무섭고, 지치고, 그 와중에 전공은 세워야겠고. 그러다 보니 갈수록 조급해지지?」
「뭐?」
「아가야, 전쟁이라는 게 원래 그렇단다. 늘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시험하지. 이런 지옥에서 버티려면 정신력이 강해야 해. 너처럼 내키는 대로 살아온 철부지에게는 힘들 수밖에.」
「……!」
우헤이싱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만큼 파이 첸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S급 헌터? 그럼 뭐 해, 정신은 일곱 살짜리 어린애에 불과한데. 너 같은 녀석은 지금 같은 전쟁에 없으니만 못한 존재야.」
「입 닥쳐! 당신이 도대체 뭘 안다고…….」
「뭘 아냐고?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니?」
파이 첸의 코웃음에 우헤이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권력과 부를 양손에 쥐고 태어난 그였지만, 상대는 대격변을 온몸으로 헤쳐 나온 전쟁 영웅이었다.
홍콩계라는 이유로 언론으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기는 했으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우헤이싱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왜 대답이 없어?」
이를 악물고 대답을 피한 우헤이싱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구태여 입 밖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뿐, 그들이 보인 눈빛은 파이 첸과 닮아 있었다.
‘이런 개 같은……!’
더욱 분통스러운 일은 그들 중엔 우헤이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태자당의 인물들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 최대 계파인 태자당. 바로 그 태자당에서도 손꼽히는 거두의 핏줄인 우헤이싱은 뼈에 사무치는 배신감을 느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내 똑똑히 기억해 두지.」
우헤이싱은 분노에 찬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진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떠나는 그의 등 뒤로, 파이 첸의 나직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이것도 기억해 둬. 어린애가 객기 부리는 것도 오늘까지라는 거. 다음에도 오늘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까드득.
이를 갈며 숙소로 돌아온 우헤이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때려 부수는 것이었다.
쾅! 쾅쾅쾅!
「개 같은 홍콩 년! 자라 좆 같은 배신자 새끼들!」
혼란한 와중에도 전용기를 통해 실어온 값비싼 명품 집기들이 산산이 분해된다.
괴성과도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닥치는 대로 밟고 부수기를 한참. 우헤이싱은 거친 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빌어먹을.」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생각할수록 열불이 솟구쳐 심장이 쿵쿵 뛰고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 지경이다.
‘감히, 감히 나를 이딴 식으로 취급해?’
중국에서 최정점에 있는 권력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기까지 왔다.
S급 헌터가 된 이후로는 완전히 그의 세상이었다.
어떤 대형 사고를 쳐도 아버지께 불려 가 질책 몇 번으로 끝났고, 사람들과 반대파 세력이 비난을 퍼붓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우헤이싱이다. 우헤이싱!’
S급 헌터는 한 국가의 얼굴이자 국력(國力)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여론이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냄새나고 더러운 레이드보다 언론 인터뷰와 파티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은. 트레이닝을 관두고 마약을 시작한 것은.
하지만 난생처음 겪어 보는 전쟁은 혼란했고, 하루하루 끝도 없이 밀려드는 몬스터 군단을 보고 있노라면 숨이 막혔다.
다이아가 깔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환경이었다.
게다가 우헤이싱이 실수를 연발하는 데에는 한 사람에 대한 영향이 남아 있었다.
‘진태경.’
살면서 두 번째로 마주한, 오랜 질투의 대상이었던 레이페이보다도 거대한 벽.
놈이 드리운 그늘은 넓고 어두웠다.
일방적인 패배로 인해 뇌리 깊숙이 새겨진 두려움은 진태경이 사라지지 않는 한 떨쳐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그 빵즈 놈이 사라지지 않는 한은…… 말이지.’
천장을 응시하는 우헤이싱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빛이 번뜩였다.
참혹하게 패배했던 그 날 밤, 이정룡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는 웃었다. 뜨겁게 끓어오르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누구인지.’
마음이 진정되자 잠시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와 눈꺼풀을 짓눌렀다. 우헤이싱은 밀려오는 졸음을 느끼며 문득 생각했다.
‘젠장. 그나저나 앞으로 오늘 같은 전투를 얼마나 치러야 하는 거야?’
잠시 후, 완전히 곯아떨어진 우헤이싱은 알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밤. 야음(夜陰)을 틈타 수많은 몬스터 군단이 전선에서 물러나고 있음을.
대이동은 쓰촨성의 모든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 * *
「……후우.」
눈가가 붉게 충혈된 샤오 쉔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혈이 짚인 채 하룻밤을 보낸 녀석은 두 시간 전에야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랴오 상장을 죽여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녀석을 진정시키느라 나와 최 팀장이 진땀을 빼야 했다.
“샤오 쉔 씨. 괜찮으십니까?”
“그래, 이제 좀 진정이 되냐?”
샤오 쉔이 대답했다.
「예. 처음 깨어났을 때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놈의 머리통을 뽑아 버리기에 충분해요.」
“…….”
“…….”
진정은 개뿔.
그래도 말과는 다르게 주먹만 부르르 떠는 것이, 지금 당장 랴오 상장의 머리통으로 골프를 할 생각은 없어 보여서 한시름 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한테 그러고 싶지 않았어. 때가 안 좋았을 뿐이지.”
잠시 말이 없던 샤오 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형님. 저를 대신해서 나서 주신 것도요.」
“그건 또 언제 들었어?”
「중대장들이 와서 얘기해 주더군요. 격분하신 형님께서 랴오 상장의 팔다리를 분질러 버리셨다고요.」
“……널 말린 입장에서 할 짓은 아니었는데. 뭐 그렇게 됐다.”
최 팀장이 딱딱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할 짓이 아니면 왜 하셨습니까?”
“그거야, 음. 순간 눈이 돌아가는 바람에.”
“현재 시국이 혼란스럽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일이 커질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이런 시국이라서. 만약 아니었으면 그 자식은 저한테 진작 죽었어요.”
적군보다 무능한 지휘관이 더 무서운 법이다.
천 명에 가까운 목숨을 날리고 작전 실패니, 전공 운운하는 랴오 상장은 죽어도 싸다.
“잘 해결됐잖아요. 몸도 포션으로 거의 나았고, 저쪽도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조용히 넘어가는 걸로.”
“원한은 오래 갑니다, 진태경 씨. 중앙 군사위원회 소속의 고위 장군, 그것도 뒤끝 심하기로 유명한 태자당 성골이니 차후에 문제가 생길 여지는 충분하죠.”
“어쩌겠습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내 태평한 대답에 최 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그 순간, 샤오 쉔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최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응?”
“샤오 쉔 씨. 따로 들은 것이 있으십니까?”
「들었다기보다는…….」
잠시 머뭇거리던 샤오 쉔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음…… 그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
뭐지, 이 수상쩍은 냄새는.
나와 최 팀장이 샤오 쉔을 의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때였다.
「드, 드, 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성대에 지진이라도 났나. 들어오세요.”
그제야 아까부터 막사 밖을 배회하던 인기척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 랴오 상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참모 중에 하나다.
하루 전, 상관의 사지를 부러트리는 내 모습에 오줌을 지렸던 사람이기도 했다.
“큰 나라의 지린이가 왔구나. 그런데 무슨 일로?”
「소, 소, 소…….」
“말, 말, 말, 말하고 싶은 게 뭔데. 제발 똑바로 말해.”
흠칫 몸을 떤 참모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소,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예.」
“손님 누구? 여기서 면회도 되나?”
설마 엄마랑 하연이가 온 건 아니겠지.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린 내게, 참모의 대답이 날아들었다.
「미국의 매직 존슨 헌터가 찾아왔습니다.」
느껴졌다. 곁에 서 있던 최 팀장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