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60
#459화
꽃이 물에 젖었다고 하여, 그것이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마저 시드는 것은 아니다.
홍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힘든 일을 겪은 탓에 초췌해 보였지만 그 모습조차도 한 송이의 수국(水菊) 같았다.
“은인을 뵙습니다.”
그 순간, 나는 흔히들 말하는 ‘옥구슬이 굴러가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은 눈이 부시도록 희었고,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아래에는 샛별 같은 두 눈동자가 있었다.
“허어.”
“어찌 이토록 아름다울 수…….”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탄성.
홍란의 미모에 감탄하던 이들이 내 눈빛에 황급히 입을 다물고 자리를 떴다.
수백의 인명이 수장(水葬)당한 와중에 보인 자신들의 행동이 부끄럽기도 했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자면 홍란의 아름다움이 그러한 사실들을 잊을 만큼 대단하다는 뜻도 되겠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았겠지.’
마음을 가다듬은 내가 입을 열었다.
“깨어나서 다행이네요. 상태는 어떻습니까?”
홍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비록 은인에 비할 바는 못 되나, 천녀(賤女) 역시 무공을 익힌 몸. 움직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는 듯합니다.”
내가 파악한 그녀의 무공은 일류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
완숙한 일류 고수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있을지는 몰라도, 신체의 단련과 축기(縮氣)를 통해 공력을 쌓은 무림인의 기력은 평범한 양민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천만다행이었지.’
홍란이 무인이라는 사실은 그녀 자신에게도, 그리고 함께 구해진 다른 한 사람에게도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군관에게 물었다.
“주원공은 어디 있습니까?”
주원공. 요즘 같은 불온한 분위기 속에서도 동정호에 놀잇배를 띄운 팔자 좋은 방계 황족. 바로 그가 또 다른 생존자다.
“주 공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철통같은 호위를 붙여 안전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의원의 말에 의하면 일단 큰 고비는 넘겼으나, 언제 의식을 회복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더군요.”
처음 동정호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던 바로 그 군관이다.
호북성의 주요 구역 중 하나인 동정호의 안전과 수비를 맡은 그는 딱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알리자 성주께서도 크게 노하셨습니다. 비록 미수에 그쳤으나 황족 시해는 중죄 중의 중죄. 즉시 성내의 함대와 병력을 총동원하여 이 무엄한 역도들을 일벌백계……!”
“황족 시해가 목적이 아니었을 겁니다.”
“예?”
나는 당황한 군관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암천(暗天)이라고. 혹시 들어 보셨을지 모르겠네.”
“암천이라면…… 근래 들어 무림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무뢰배 집단이 아닙니까?”
“무뢰배?”
실소가 튀어나오는 단어 선택이다.
소림혈사 이후 이미 민간에도 암천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눈앞의 군관은 놈들이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힘을 지녔는지 조금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궁기방도 기가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 군관 나리. 그 무뢰배 집단이 소림사 방장이신 법왕(法王) 굉도 대사를 죽인 건 알고 있소?”
“그, 그건.”
“사천당문의 태상가주이신 독왕(毒王) 당사독 대협도, 아미파의 경천신니께서도 비명에 가셨소. 강호를 떨어 울리던 전대 초절정 고수 세 분과 이천여 명에 달하는 무인이 죽었단 말이오. 그런데 무뢰배 집단?”
“그, 그런 소문을 듣긴 했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하면, 이 일이 암천이 벌인 짓이란 말입니까?”
“몰라도 정도가 있지. 허, 참. 지나가던 똥개가 웃겠네.”
“그쯤 해 둬.”
나는 손을 들어 궁기방을 저지했다. 그리고 어느새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군관을 향해 말을 이었다.
“어쨌건 말하고 싶은 건, 놈들의 목적이 주원공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가 뭡니까?”
“암천이 하고자 마음먹었다면, 주원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까.”
“……!”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죽였을 겁니다. 대낮에 기습해도 막지 못할 텐데 굳이 동정호에 놀잇배를 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선박들과 함께 처리한다? 심지어 표적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한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고?”
암천에게 있어 주원공의 목숨은 보자기 속 물건과 같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넣었다 뺄 수 있는.
또한 굳이 죄를 짓고 귀양까지 온 방계 황족을 노릴 만한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면 차라리 황제나 상산왕 주표가 더 매력적인 표적이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의 목적은 황족 시해가 아닙니다. 펼쳐 놓은 그물에 어쩌다가 걸린 물고기 중 하나지.”
“그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건 흉수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죠.”
“예?”
“모든 배후에 암천이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고, 직접 이런 짓을 벌인 흉수를 말하는 겁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군관이 다급하게 물었다.
“대, 대협께서는 흉수가 누구인지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짐작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아무래도 직접 본 사람의 말이 정확하겠죠.”
나는 고개를 돌려 홍란을 응시했다.
주원공이 사경을 헤매는 지금, 그녀는 모든 것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쥔 유일한 목격자다.
“봤습니까?”
짤막한 질문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나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 속에서, 홍란의 붉은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네.”
“……!”
“……!”
삽시간에 좌중으로 퍼져나가는 동요와 충격. 그 사이에서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드디어.’
해사방으로부터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 지금까지 털끝 하나 보이지 않던 놈, 혹은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찾은 이 꼬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있는 힘껏 잡아당겨 몸통까지 끌어낸 뒤 처리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희생당한 수많은 이들의 시신들을 떠올리며 재차 물었다.
“본 그대로 말하세요.”
“그것이…….”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홍란의 이마에 얕은 골이 팬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듯, 잠시 머뭇거리며 호흡을 가다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이 창졸 간에 일어났습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데 주위에 있던 군선 두 척이 촌각을 두고 침몰한 것이 시작이었지요.”
나는 홍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주원공 역시 방계라고는 하나 엄연한 황족. 호위를 위해 따라붙은 군선 두 척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무너졌고, 한창 흥이 무르익고 있던 놀잇배 역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누구도 막을 수 없었어요. 분명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굉음과 함께 배가 기울더니, 어디선가 날아온 한 줄기 강기(罡氣)가 배를 휩쓸었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강기……!”
“틀림없어요. 그 일격으로 주 공자를 호위하는 절정 고수들과 청협방(靑俠房)의 무인들이 대부분 죽었으니까요.”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강기는 그 무엇보다 파괴적인 힘. 본 적 없는 이라 할지라도 강기를 마주하면 그 눈 부신 빛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홍란도 마찬가지였고, 주원공의 호위 무사들과 청협방의 얼뜨기들로는 막을 수 없는 일격이었을 것이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탓인지, 홍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호위들이 목숨을 걸고 주 공자를 밀어 냈고, 저는 그분을 끌어안고 강물로 몸을 던졌습니다.”
홍란의 빠른 판단이 그녀 자신과 주원공을 살렸다.
공포로 몸이 굳어 버린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이 몰살당했고, 숨이 붙어 있던 자들 또한 깊은 밤의 추위와 추락하며 얻은 부상을 오래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검게 물든 동정호의 강물 속에서 홍란은 빠르게 멀어지는 무언가를 보았다고 했다.
“사람이었어요. 단 한 사람.”
“……!”
꼬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입술을 질끈 깨문 내가 재차 물었다.
“확실합니까?”
“제가 어찌 은인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비록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으나,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홍란은 유일한 목격자이며, 일류의 경지에 이른 무림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확신할 정도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맞아. 놈이다.’
내 머릿속에 누군가에 대한 생각이 스치던 그때, 넋 나간 표정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군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지, 지금 다들 제정신이오? 아무리 무림인이라고는 하나, 이곳은 육지가 아니라 동정호요. 대해(大海)처럼 깊고 넓은 동정호란 말이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여기 있나?”
궁기방은 한숨처럼 중얼거렸고, 혁무진이 혀를 쯧쯧찼다.
“그래서요?”
“그래서긴 뭔 놈의 그래서! 내 귀하들과 같은 무림인들이 얼마나 신묘한 능력을 지녔는지는 익히 들었소만, 이건 너무 허무맹랑하지 않소이까.”
잔뜩 흥분한 군관은 침까지 튀겨가며 외쳤다.
“종종 마주쳤던 장강수로맹의 수적들도 그 정도는 아니오. 한데 이 넓은 강물 위를 어찌 그리 빠르게 헤엄칠 것이며, 대국의 군선을 비롯한 수십 척의 선박을 단신으로 수장시킬 수 있……!”
“그럴 수 있지요. 제가 생각하는 한 사람이라면.”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홍란이 모두의 시선 속에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는 물고기처럼 호흡하고 그보다 빠르게 헤엄치며, 수십 척의 선박을 능히 단신으로 침몰시킬 수 있는 수공(水功)의 고수지요. 귀관께서 알고 계신 수적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나, 적어도 이 동정호에서만큼은 해상왕(海上王)이 온다 해도 그를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홍란의 시선이 막사 너머 푸르른 강물을 향했다.
동정호. 천하에서도 손꼽는 역사와 풍광을 지닌 명승지. 그리고 일평생 동정호를 지킨 한 사람의 늙은 어부.
아니. 전대의 초절정 고수이자, 해상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공의 고수.
나는 조용히 그의 별호를 뇌까렸다.
“동정어옹(洞庭漁翁).”
“……!”
하오문의 정보가 맞았다. 동정어옹은 아직 호북성을 떠나지 않았다.
죽음을 위장한 채 환한 등잔 밑이라 할 수 있는 이곳, 동정호에 머무르며 모두의 의심과 시선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동정어옹이라는 암천의 꼬리를 발견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
이미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른 상황. 더 늦기 전에 동정어옹을 붙잡아 암천의 행적과 계획을 샅샅이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더 큰 참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렇기에, 다음 순간 들려온 홍란의 한마디는 길을 밝히는 횃불과도 같았다.
“혹시 은인께서는 알고 계신가요? 동정어옹이 동정호 곳곳에 자신이 머무르는 비처(秘處)를 숨겨 두었다는 걸.”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혹시?”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짐작이 가는 장소 몇 군데를 알고 있습니다. 준비를 마치신 후 말씀해 주시면 천녀가 직접 안내를 해 드릴 수 있어요.”
“……!”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곳으로 갑시다.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