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00
#499화
계절은 이미 완연한 봄이었지만, 굽이진 동정호의 물길을 타고 불어온 밤바람은 서늘했다.
두꺼운 천으로 세워진 진위경의 막사 안으로 들어온 장태보는 가장 먼저 화로(火爐) 앞을 차지하고 앉아 몸을 녹였다.
“후우, 이제야 좀 살겠구먼.”
그 모습을 본 진위경이 웃으며 찻잔을 건넸다.
“예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소.”
“때마침 하남(河南)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산서(山西)였다면 제아무리 소가주님의 부탁이라 해도 안 왔을 겁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를 이리 부려먹으시다니.”
나는 장태보의 위협적인 근육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충분히 부려먹을 만한데……?’
저 몸 좀 봐라. 이 정도면 정정한 걸 넘어서 짱짱한 거다. 남들이 과로로 수명이 깎여 나갈 때 장태보는 기껏해야 근손실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자신의 팔뚝과 장태보의 것을 비교하듯 곁눈질하던 위팽이 입을 열었다.
“사천과 호북에서 있었던 일은 소상히 전해 들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남의 일도 해결할 겸 직접 왔는데, 시기적절한 선택이었군요.”
진위경이 껄껄 웃으며 위팽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팽. 역시 자네는 내 장자방일세!”
“전 무인입니다만.”
“어, 그럼 한신으로 하지.”
“한신은 결국 숙청되지 않았습니까.”
“그럼 소하.”
“소하도 문관 아닙니까.”
“…….”
지금 당장 숙청하고 싶은 표정으로 위팽을 바라보던 진위경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자네, 그동안 내게 쌓인 게 많나 보군.”
일반적인 군신 관계였다면 아이고, 아닙니다. 했겠지만 위팽은 진위경을 대놓고 갈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 많습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럴 줄은 몰랐지.”
“제가 찾아온 게 아니라 주군께서 부르신 겁니다. 벌써 석 달 가까이 자리를 비우신 건 알고 계십니까? 얼마 전에는 이 문주까지 찾아와 묻더군요. 주군께 무슨 변고라도 생기신 거 아니냐고.”
“커흐흠!”
연신 헛기침을 내뱉는 진위경의 모습을 보니 찔리는 구석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아니, 잠깐만. 그런데 방금 위팽이 말한 이 문주라는 사람이 설마…….
“혹시 이 소저, 이소월 소저를 말하는 겁니까?”
내 물음에 위팽이 고개를 저었다.
“소저가 아니라, 어엿한 일문(一門)의 문주입니다. 삼 공자.”
“아, 그랬지 참.”
한때 산서성의 패자 자리를 노리던 항산검문(恒山劍門)은 연이은 사건으로 인하여 처참하게 몰락했다.
그러나 혈랑검의 유일한 핏줄이었던 이소월은 내 도움으로 살아남아 태원진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비록 가신(家臣)의 위치라고 해도 문주는 문주다.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일 년이 넘었나?’
적천강과 함께 태원진가를 떠나 구화산으로 향할 무렵이었으니, 무림에서 흐른 시간으로만 따져도 일 년이고 현대까지 합치면 더욱 길다.
나는 아직도 또렷한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저기, 이 문주님.’
‘소저요.’
‘네?’
‘소저라고 불러 주세요.’
‘아, 예. 그럼 이 소저.’
‘말씀하세요. 진 공자님.’
‘가내 두루 평안하십시오.’
‘…….’
‘앞으로 문파 사업도 번창하시고, 그 뭐야. 어쨌건 하시는 일마다 모두 잘되시길 바랍니다.’
음. 나름대로 훈훈하게 헤어졌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이소월은 무가의 여식답게 강단도 있고, 적풍단을 이끌고 쳐들어왔던 풍양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니 지금쯤이면 몰락한 항산검문도 제법 성장했겠지.
“그래서, 이 소저는 요즘 잘 지내요?”
잠시 생각하던 위팽이 대답했다.
“잘 지낸다면 잘 지내는 거고, 다른 부분에서는 아닐 수도 있지요.”
“왜요, 일이 잘 안 되나?”
“문파에 관해 물어보신 거라면, 항산검문은 이미 재건을 끝마쳤습니다. 이 문주의 지휘하에 빠르게 성장 중이고 문도의 숫자들도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오.”
“선친의 벗이었던 항산호(恒山虎) 철무백 대협도 은거를 깨고 항산검문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요.”
“오오.”
그럼 다 잘된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모습에 위팽의 눈이 가늘어졌다.
“삼 공자.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혹시 그 후로 아무런 연락도 안 한 겁니까?”
“연락이요? 무슨 연락?”
“……후. 됐습니다. 못 들은 셈 치십시오.”
이거 어째 분위기가 묘하다. 옆에서 혀를 차는 장태보를 보니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래도 혹시. 아냐, 그거 아냐.
갑작스럽게 혼란에 빠진 나를 구원한 것은 진위경의 한마디였다.
“이 문주가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나저나 둘째는 지금 어찌하고 있나? 벌써 몇 달째 보지 못했는데.”
나를 콩벌레 보듯이 쳐다보던 위팽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여전합니다. 수련동에 마련된 벽곡단으로만 끼니를 해결하면서 밖으로는 단 한 걸음도 나오지 않습니다.”
“무경이 그 녀석. 도대체 어찌하려고…….”
진위경의 근심은 괜한 것이 아니다.
내가 구화산으로 향하기 전, 청풍과의 비무에서 패배한 진무경은 그날 이후로 수련동에 처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성라대연(星羅大宴)이 열리고, 암천이라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지금에도.
‘허, 대공(大功)을 이루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겠다더니.’
한때 천하 무림은 진무경을 천고의 기재라 불렀다.
뛰어난 절기와 영약을 아낌없이 지원받는 구파일방의 적전 제자들조차 그에게 비할 수는 없었고, 진무경은 오래전 몰락한 변방 무가의 핏줄이라는 한계를 딛고 오직 무공만으로 십봉룡(十鳳龍)의 앞줄에 우뚝 섰다.
‘그리고 청풍을 만났지.’
그런 진무경에게 있어 청풍의 존재는 엄청난 충격인 동시에 자극이었을 것이다.
일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폐관 수련을 이어가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반드시 뭔가를 해낼 인간이지. 틀림없어.’
내가 본 진무경은 두말할 필요 없는 천재다.
녀석에게는 검성이라는 지고한 무인의 가르침도, 뛰어난 영약과 절기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혼자만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폐관을 깨고 나오는 날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선뜻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문제는 도대체 언제쯤 나오냐는 건데.’
설마 환갑이 다 돼서 나오진 않겠지.
그때까지 벽곡단으로만 버티면 진짜 리스펙하고 형님으로 받들어 모실 의향이 있다.
사실 그 맛대가리 없는 걸 먹으면서 일 년이나 폐관을 이어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거다.
오죽하면 무당파 도사들도 면벽 수련할 때는 벽곡단 대신 육포 챙겨 간다고 하겠나.
‘고깃집 가서 불판 엎어 버리는 악성 채식주의자들도 벽곡단 한 번 씹으면 바로 삼겹살 찾을 텐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야기의 화제는 어느새 장태보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나저나 소가주, 이제 이 늙은이를 부른 연유를 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장태보의 툴툴거리는 질문에, 진위경이 다짜고짜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철기당(鐵器黨). 어떻소?”
“태원진가 내에 그런 조직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만.”
“그럴 거요. 불과 며칠 전 신설된 곳이니까.”
장태보의 미간이 좁혀졌다.
“꽤 익숙한 이름입니다그려. 이 늙은이가 오래전에 몸담았던 철기방 생각도 나고.”
“장 노야를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오. 철기당주. 듣기 좋지 않소?”
“소가주님.”
한숨을 내쉰 장태보가 말을 이었다.
“전 이미 오래전에 철기방을 떠난 몸입니다.”
“그렇다면 슬슬 돌아올 때가 된 것 같구려.”
“늙고 지쳐서 망치를 들 힘도 없습니다.”
장태보의 위협적인 근육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진위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 막내야.
이쯤 되면 왜 장태보를 여기까지 불렀는지 모를 수가 없다.
이미 진위경의 의중을 눈치채고 있던 나는 등에 메고 있던 백염을 툭 쳐서 떨어트렸다.
터텅!
“어이쿠. 늙고 지쳐서 망치조차 들 힘이 없는 야장이 만든 신병이기를 떨어트리다니!”
“……”
“그토록 다루기 어렵다는 만년한철로 만든 내 창!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장태보가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만해라.”
“왜요? 어르신 얘기한 거 아닌데.”
“내가 만든 것 아니냐!”
“무슨 소립니까. 망치를 들 힘도 없으신 분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요.”
“……후우. 저 망할 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장태보가 진위경을 바라보았다.
“이러려고 그간 제게 여러 도움을 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아끼는 막내 아우에게 신병이기를 만들어 준 장인에 대한 순수한 호의였소.”
“그럼 제안에 답해 드리지요.”
“경청하겠소.”
“불가(不可). 이게 이 늙은이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답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창은요?”
“닥쳐라. 도로 뺏어서 분질러 버리기 전에.”
“만년한철 특. 존나 단단함.”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너 같은 놈에게 창을 만들어 줬을까.”
“그냥 철기당주 하시죠. 우리 쪽에서 이것저것 도움도 받으셨다면서요.”
“재물로 갚고 말지, 이 나이에 또 그런 개고생을 할 것 같으냐?”
“아, 진짜 안 하실 거예요?”
“그럼 어쩔 테냐? 내가 안 하겠다는데.”
“차라리 조건을 알려 주세요. 최대한 맞춰 드릴 테니까.”
“조건?”
장태보의 입가에 문득 득의양양한 웃음이 맺혔다.
“작년 이맘때, 기억하느냐? 그때와 같은 조건을 걸겠다.”
“그때 걸었던 조건이라면, 설마.”
“불로초, 공청석유, 용의 발톱, 여의주. 이중 아무거나 구해 와라.”
띠링.
– 돌발 퀘스트, [어차피 못할 거]가 생성되었습니다!
– 퀘스트 임무 : 장태보가 말한 것 중 하나라도 구해 오기.
터텅, 우당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내가 버럭 외쳤다.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무기도 아니고 용이라니!”
“이무기든 용이든, 우선 구해 오면 내 태원진가에 뼈를 묻으마. 못 할 거면 가만히 있고.”
띠링.
– 퀘스트 내용이 변경되었습니다.
– 퀘스트 임무 : 이무기의 발톱 구해 오기.
변경된 시스템 창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됐네. 여기요.”
“내 의중은 바뀌지 않으니 헛수고하지 말…… 이게 뭔데 갑자기 주는 것이냐?”
“이무기의 발톱이요.”
“응?”
“이무기의 발톱. 가져오라면서요.”
“……어?”
장태보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장이자 최고의 야장 집단인 철기방의 방주를 역임했던 그다.
이무기의 발톱을 바라보는 장태보의 혼란스러운 눈빛에는 설마 하는 의심과 처음 보는 물질에 대한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이, 이무기의 발톱? 정말이냐?”
“길이만 봐도 제 발톱은 아니죠.”
“아, 아니 이걸 도대체 어디서.”
“잡았는데요.”
“뭐?”
“뼈도 있고, 비늘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해 뜨면 직접 보러 가세요. 위 대협도 서신으로만 들었을 텐데, 이번 기회에 같이 다녀오시고.”
띠링.
– 돌발 퀘스트, [어차피 못할 거]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퀘스트 보상으로 [태원진가]가 [장태보]를 획득했습니다!
– 업적, [와, 이걸 구하네]를 달성했습니다!
경쾌한 시스템 알림과 함께, 진위경이 다정한 손길로 장태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철기당주.”
“……!”
태원진가의 전속 도비, 아니 노비로 영입된 장태보의 눈빛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