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7
#56화
이천백의 등장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대장로였다.
‘머리가 직접 나섰군.’
협곡을 가로지르며 뿜어내는 강맹한 기파와 넘실거리는 살기.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놈들!”
천둥 같은 고함과 함께 이천백이 나타났다. 반백의 머리는 갈기처럼 휘날렸고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잇따라 항산검문의 핵심 전력이 도착했다. 일류 무인들과 세 명의 절정 고수!
“태원진가 놈들을 쓸어 버려라!”
“문주님이다! 문주님께서 오셨다!”
“우와아아!”
함성과 함께 식어 가던 전의가 타올랐다. 순식간에 트인 길을 따라 이천백이 쇄도했다.
“간악한 태원진가 놈들을 죽여라!”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진위경이 아니었다.
“때가 되었습니다.”
대장로가 대답했다.
“동의하오.”
사실 그는 이천백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어느 정도 소모전이 진행되어야 뒤처리가 편해진다.
하지만 현재 태원진가와 항산검문. 양 세력의 피해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었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그들이 나설 테니.’
산서성의 패자를 자처하는 양대 세력이지만 ‘그들’의 힘에 비하면 하찮다.
과거 강성했던 시절에도 변방의 무가(武家) 취급밖에 받지 못하던 태원진가가 어찌 그들을 당해 낼 수 있을까.
‘일개 무가라…….’
씁쓸한 웃음을 삼킨 대장로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오랜 세월 두 자루의 검을 품었다. 하나는 가슴에, 하나는 허리춤에. 이제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이천백은 내가 맡겠소.”
“그리하시지요.”
혈랑검 이천백이 누군가, 오로지 검 한 자루로 항산검문을 세우고 이제는 일성(一城)의 패자를 노리는 자다. 비록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정의 무인.
‘그와 겨뤄 보고 싶다.’
그러나 진위경은 끓는 피를 억눌렀다. 가문의 명운이 걸린 전투. 호승심은 접어야 한다.
“위팽.”
“예.”
어느새 예리한 협봉검을 빼 든 위팽이 진위경의 곁에 섰다.
“너와 내가 나머지를 맡는다.”
“받들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다. 희미하게 웃은 진위경이 검을 뽑았다. 태원진가 대대로 내려져 오는 가문의 보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다.
중원 유람 좀 하고 오마.
그동안 너 써.
검집에 대충 끼워 넣어져 있던 서신의 내용을 떠올린 진위경은 새삼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중원 유람 같은 소리하네. 평생 실컷 놀아 놓고.’
가주라는 인간은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수천 리 밖에 있는 둘째는 이제야 겨우 서신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한다.’
무인, 시비, 하인, 아이들.
지금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진위경이 태원진가의 가주다. 그들의 죽음도, 생존도 오롯이 그가 짊어져야만 했다.
‘반드시 승리한다.’
진위경이 눈을 부릅떴다. 검을 치켜든 그의 입에서 창룡후가 터져 나왔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쉬쉬쉭!
태원진가의 고수들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등 뒤에서 불화살 하나가 높게 솟구쳤다.
절벽 위에서 수십의 인영이 몸을 일으킨 것도 그때였다.
“쏴라!”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아래, 이 전투의 향방을 가를 고수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혈랑검 이천백은 타고난 무인이다.
무공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과 야수 같은 감각으로 적들을 해치웠고, 자신의 야망을 차례차례 실현시켰다.
항산검문을 세우고, 인근 방파를 차례차례 흡수하며 힘을 길렀다. 장차 중원에서도 인정받는 세가(世家)의 초석을 다지고자 했다.
‘문주! 이 공자가…….’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주검으로 돌아왔다. 정당한 비무로 인한 것도 아니었다. 극독에 당해 칠공에서 피를 쏟아내며 죽었다.
이천백은 맹세했다. 태원진가와 연관된 것들은 모조리 죽이고 불태우기로.
그런 그의 눈앞에 진위경이 나타났다. 이천백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이노옴-!”
이천백이 야수처럼 뛰어들었다. 일 갑자에 달하는 공력을 머금은 검신이 우윳빛으로 빛났다.
이 힘이라면 어떤 갑옷도, 신병이기도 잘라 낼 수 있으리라.
‘놈은 반드시 죽는다!’
확신에 찬 이천백이 검을 휘두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오호, 검기(劍氣)?”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 이천백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이토록 허무하게 뒤를 내주다니. 이천백의 반응은 섬전 같았다. 역수로 틀어쥔 검을 뒤로 찔러 넣었다.
쉭.
검신은 허공을 찔렀고, 이천백은 시간을 벌었다. 그제야 적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께까지 늘어트린 수염, 입가에 맺힌 여유로운 미소.
백발의 노인이었다. 이천백은 단숨에 노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화양검?”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듣는군. 그러는 자네는 이천백이겠지?”
“그렇소.”
이천백은 대답하는 지금도 등골이 서늘하다 느꼈다.
진위경이 어디 있는지, 전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눈을 떼면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우연? 아니다.’
진위경을 보고 과하게 흥분한 건 맞다. 마음이 조급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이천백은 절정 고수였다.
그중에서도 검기상인의 경지에 오른 절정 고수.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고수!’
일 초식이건, 반 초식이건 눈앞의 노인은 이천백보다 윗줄의 고수였다. 이천백은 애검을 꽉 움켜잡았다.
“위명은 익히 들었소.”
“위명은 무슨. 뒷방 늙은이에 불과하네.”
“그럼 계속 뒷방에 있지, 뭣 하러 나온 거요?”
“아직 젊은 친구라 뭘 모르는군. 늙을수록 가끔 움직여 줘야 해.”
대장로의 능글맞은 태도에 이천백은 이를 갈았다.
‘망할 늙은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태원진가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대장로를 중심으로 가주에게 맞서는 파벌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내심 태원진가의 내부 분열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외적이 침입하면 한마음으로 뭉친다 이건가?’
무거운 눈으로 대장로를 응시하던 이천백의 입이 열렸다.
“당신은 얼마나 강하오?”
“자네가 믿는 만큼.”
“말장난이군.”
“화양검이라 불리던 시절 내 나이가 이립이었네.”
나이 서른에 대장로는 이미 절정의 무인이었다. 칠순의 노인이 된 지금, 그의 무공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잠시 생각하던 이천백은 문득 실소를 머금었다.
‘나도 늙었군.’
혈랑검.
젊은 시절의 이천백은 거침없었다. 뛰어난 신공, 번듯한 스승 하나 없이 오로지 홀로 모든 것을 헤쳐 나갔다.
한 수 위의 상대를 만나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늑대처럼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반평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혈랑검 대신 문주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혈육, 수하, 재물. 지켜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수련 대신 집무 시간이 늘었고, 행동해야 할 때 머리를 굴렸다. 지금처럼.
“왜 웃나?”
대장로의 물음에 이천백이 대답했다.
“나 자신이 한심해서 웃었소.”
“자네, 나를 무서워하는군.”
이천백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두려웠나?”
“아주 잠깐은.”
“지금은 어떤가?”
“당신을 죽일 거요.”
“자네 정도로는 무리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소?”
“짧은 자들이 늘 하는 말이지. 막상 대봐도 결과는 변함없다는 사실을 몰라.”
“혀가 맵구려.”
“혀만 매울까.”
대장로는 검을 늘어트렸다. 별반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청강검이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순간 지독한 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먼저 오시게.”
이천백은 거절하지 않았다. 일 갑자의 공력을 빨아들인 검신이 빛의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수많은 무인들이 꿈꾸는 검기상인(劍氣霜刃)의 경지.
츠츠츠.
검기가 세 치(10cm)까지 솟구친 순간, 이천백의 신형이 쏘아졌다. 수많은 실전 끝에 완성한 독문 무공이 그의 손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쉭, 쉬쉬쉬쉭!
콰아앙!
검기가 사방을 난도질했다. 순간적으로 솟아오른 흙더미 사이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간격에 휘말린 무인들이 내는 소리였다. 하나같이 젊은이의 목소리들. 이천백의 머릿속에 붉은 신호가 켜졌다.
‘뒤!’
이천백은 돌아섬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바람에 나부끼는 흰 수염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검도.
쾅!
‘큭.’
굉음과 함께 이천백이 정신없이 물러났다. 그에게는 손목의 통증을 느낄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쾅! 쾅! 쾅!
두 개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뇌성벽력이 울려 퍼진다.
줄줄이 뿜어져 나오는 검기가 땅을 부수고 바람을 찢었다.
쉬쉬슁!
“저게 도대체…….”
양 세력의 무인들은 싸우던 것도 잊었다. 그저 넋이 나간 얼굴로 이 엄청난 생사결을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쉴 새 없이 터지는 굉음과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검기의 향연. 그 중심에 선 두 사람의 움직임은 이제껏 본 그 누구보다 빠르고, 강했다.
누군가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절정 고수…….”
그들의 눈에는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싸움.
그러나 힘의 우위는 명백했다. 삼백여 합을 주고받았을 때, 대장로의 검이 변화를 보였다.
쉭, 서걱!
“크윽.”
이천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장로의 검이 훑고 지나간 팔뚝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하필이면.’
재빨리 검을 바꿔 잡았지만 그는 본래 우수검(右手劍)이다.
십 할의 전력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에 검을 쓰는 팔을 다쳤으니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쾅!
우드득.
단 일격에 손목이 꺾였다. 심각한 공력 소모로 약해진 검기로는 대장로를 당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천백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부상도 숱하게 겪었다. 이천백은 팔과 허리, 다리 힘을 이용해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촤아악.
이번에는 무릎이다. 힘줄이 잘려 나간 무릎이 이천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르륵 무너졌다.
그의 검이 허망하게 허공을 갈랐다.
푹. 푹푹푹.
옆구리, 어깨, 가슴.
번갯불이 전신을 쑤시고 베어 냈다. 강맹한 검기는 살과 뼈를 자르는 걸로도 모자라 내부를 진탕시켰다.
“우웨엑!”
내장 조각이 섞인 핏물을 토해 낸 이천백이 흐린 눈빛으로 대장로를 올려다봤다.
노인의 안색은 무덤덤했다. 상대를 쓰러트렸다는 희열도,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도 엿볼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결과였다.
“쿨럭, 산서제일인이 눈앞에 있었구려.”
“천하제일이 아니라면 변방의 무부(武夫)에 불과하지. 나도, 자네도 그 정도 그릇은 아니야.”
“원하는 걸 말하시오. 내 목을 주겠소. 수하들을 항복시키고,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봉문 하겠소. 그러니…….”
“불가. 내가 원하는 건 멸문일세. 풀 한 포기 남겨 두지 않는 완전한 멸문.”
“어째서……!”
“그렇게 묻지 말게. 자네가 승리했다면 멸문하는 것은 본가가 되었을 테니.”
이천백은 핏발 선 눈동자로 대장로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저 주름진 목을 꺾어 버리고 싶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는 게 전부였다.
“태원진가. 네놈들이 시작하지 않았나. 그 어린 녀석을, 내 아들을 죽였어!”
“아, 이소군. 그렇지. 그 아이가 시작이었지.”
대장로는 고소를 머금었다.
산서성을 양분하는 항산검문의 주인조차 ‘그들’의 개입을 알아채지 못했다. 죽음이 목전에 다다른 지금까지도.
– 염라대왕을 만나면 물어보게. 이소군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귓가를 파고드는 전음(傳音)에 이천백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그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죽게 될 이천백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고, 늙은이의 단순한 변덕일 수도 있다.
– 저승길 노잣돈일세. 먼 길 가는 동안 생각해 보게.
대장로는 검을 치켜세웠다. 겨울 산등성이 너머로 비춘 노을이 검신을 따라 산산이 부서졌다.
‘이것으로…….’
이천백이라는 거인의 죽음으로 항산검문은 무너진다.
저항하는 자는 죽고 항복하는 자는 사로잡힌다. 그렇게 하나의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모두가 승리에 취해 있는 그 순간에.
‘끝이다.’
마침내 대장로의 검이 움직였다.
쐐애애액-!
날카로운 파공성.
최후를 직감한 이천백은 눈을 감았다. 푸른 검기에 휩싸인 검신이 아름다운 선을 그었다.
서걱.
그러나 앞서 들린 파공성도, 검의 방향도 이천백의 예상을 벗어났다.
난데없이 등을 향해 날아온 창 한 자루를 검기로 갈라 낸 대장로의 입에서 창노한 음성이 터졌다.
“웬 놈이냐!”
다음 순간, 대답이 들려왔다.
“나다, 이 십새끼야!”
야트막한 언덕 위, 우뚝 서 있는 한 청년의 얼굴을 확인한 대장로가 신음했다.
“진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