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43
#642화
바스락.
미세한 소음과 함께 저 멀리에서부터 빠르게 가까워지는 기척.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빛살 같은 속도로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백염을 겨누었다.
즉각 공력을 끌어올린 야수묘왕의 머릿속에도 나와 같은 생각이 스치고 있을 것이다.
‘애뇌산의 망령.’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검게 물든 풀숲 너머로 언뜻 보이는 새하얀 형체를 확인한 나는 한숨과 함께 창날을 늘어트렸다.
“무야호?”
– 크앙!
사사사삭!
짧지만 강한 울음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달려온 백호가 반갑게 나를…… 그대로 스쳐 지나가더니 야수묘왕의 발치에서 발라당 배를 뒤집어 깠다.
– 헥. 헥. 헥.
“그래, 그래. 용케 찾아왔구나. 영특한 녀석 같으니.”
저 정도면 백호가 아니라 실버 리트리버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덩치는 리트리버 열 마리를 합쳐 놓은 것 같지만.
‘그나저나 이 녀석이 돌아왔다는 건…….’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읽은 듯, 한껏 재롱을 피우는 백호의 배를 쓰다듬어 주던 야수묘왕이 물었다.
“다른 이들은 어디 있느냐?”
– 그르릉.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일어난 백호가 돌연 크게 울부짖었다. 맹수의 포효가 짙은 어둠과 독무를 뚫고 울려 퍼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에서 횃불이 일렁였다.
그 개수가 어림잡아 수십에서 일백.
그리고 그 선두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궁주.”
“아버님! 무사하십니까!”
유난히도 굳은 얼굴을 한 백상과 야율목을 위시한 남만야수궁의 전사들. 뒤이어 나타난 화룡각 대원들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조장니이임!”
“무진아. 이건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내 품에 안기거나 그러면 곱게는 못 죽는다.”
“……옙.”
비련의 여주인공에 빙의된 채 달려드는 혁무진을 단박에 차단한 나는, 막 입을 열려는 다른 대원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처음부터 이야기하자면 긴데…… 여기서 들을래? 아니면 밖에서 들을래?”
대답은 들으나 마나였다.
감성 팝송이 흘러나오는 분위기 좋은 카페라면 모를까. 독무가 흘러나오는 스산한 분위기의 독혈지에서 긴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시스템은 내가 잠시 잊고 있던 퀘스트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띠링.
– 퀘스트, [님아, 그 늪을 건너지 마오]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 상당한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 [최상급 피독주x5]를 획득했습니다!
– 매우 희귀한 업적, [어케 돌아왔누]를 달성하셨습니다!
– 희귀한 칭호, [독혈지 개척자]를 획득하셨습니다!
* * *
그날, 남만의 밤은 유난히도 어둡고 길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법.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긴급히 애뇌산으로 향했던 일백의 최정예 전사가 남만야수궁으로 귀환했을 때는 동이 틀 무렵이었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간밤에 엄청난 일이 있었다더만.”
“무슨 이야기?”
“그, 왜. 글쎄 외궁 서문 쪽에 사는 몽씨 영감한테 들은 이야긴데…….”
“헉!”
“뭐여.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그 영감이 아직도 살아 있었나? 분명히 작년에 죽은 줄 알았는데.”
“아이, 싯팔.”
아침 햇살과 함께 빠르게 퍼져 나간 소문의 골자는 이랬다.
간밤에 남만의 모처에서 큰일이 벌어졌고, 백족의 대족장인 백상과 소궁주 야율목이 일백의 최정예를 이끌고 외궁을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몇 시진 만에 귀환한 그들의 선두에 자신들의 궁주인 야수묘왕과 진태경이 있었다는 것.
평소 부족들 간의 분쟁에 무력으로 개입하지 않는 남만야수궁의 특성상, 궁주가 직접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제법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소문의 내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데 문제가 생긴 곳이, 다름 아닌 애뇌산이었다더군.”
“애뇌산? 그 애뇌산을 말하는 거요?”
“그럼 남만에 다른 애뇌산도 있나? 오늘 날이 밝자마자 애뇌산에서 백 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요족 상인들이 알려 준 거니까 확실할 걸세. 밤늦게까지 장부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목격했다더군.”
오독문(五毒門)이라는 이름은 남만인들에게 있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멍에와도 같다. 이 땅의 선조들은 오독문에 맞서 싸웠고, 숱한 희생을 치른 끝에야 지금의 질서와 법칙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일이 벌어진 곳이 오독문의 옛 본거지였던 애뇌산이라니.
평소였다면 입에도 담기 싫은 금지(禁地)였지만, 그곳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런 미친. 계속 말해 보시오. 어서!”.
좌판이 끝없이 늘어선 저잣거리. 후미진 골목. 발길이 끊이지 않는 객잔…….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귀를 타고 전해졌고, 다시 또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어수선한 분위기와 소문들은, 오늘 열릴 부족 대회의를 위해 모인 부족장들도 익히 인지하고 있었다.
현재 외궁, 내궁 가릴 것 없이 떠도는 소문이 생각 이상으로 정확하다는 것 역시도.
“지금 온 사방이 그 소문으로 난리요. 모르는 사람이 없더군.”
“더 큰 문제는 그게 단순한 헛소문이 아니라는 거지. 그렇지 않소?”
대회의를 위해 일 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그들이었지만, 서로의 안부를 물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일찍이 내궁의 거대한 대전(大殿)에 각자 자리를 차지한 부족장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다들 미리 언질을 받았으니 알고 있겠지만, 이건 보통 일이 아니외다. 애뇌산. 그것도 독혈지에 있어야 할 놈들에게 벌써 일백에 달하는 정예가 희생되었으니.”
“천년지주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솔직히 본인으로서는 쉽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이오. 하나도 아니고 다섯 마리라는 부분에서는 더더욱.”
“믿기 힘들겠지만 전부 틀림없는 사실이오. 놈들의 사체도 남아 있다고 하니 거짓일 수가 없지. 애뇌산에 주둔하고 있던 전사들의 죽음에 진노한 궁주께서 독혈지까지 쫓아가 놈들을 추살했다고 했소.”
막힘없이 대답한 중년의 부족장이 나직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무림맹에서 온 그 젊은 한족. 열화신룡 진태경도 함께.”
이 자리에 모인 부족장들은 크기를 막론하고 남만의 일부분을 다스리는 영주들이다. 그들 역시 당연하게도 젊은 이방인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호오.”
“음.”
“크흠.”
어떤 부족장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부족장은 불편한 헛기침과 함께 괜히 허공만 응시했다.
하지만 며칠 전의 분위기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면,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빌어먹을 한족 놈’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소 한족을 꺼리는 부족장들조차 알고 있었다. 이번 사건 해결에 있어 진태경의 공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그가 아니었다면 이번 일이 이토록 빠르게 끝나지는 않았을 거요. 어쩌면 섣부르게 뒤쫓아 간 궁주께서 도리어 화를 입으셨을지도 모르…….”
쾅!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굉음에 이어지려던 목소리가 파묻혔다.
동시에 삼십여 쌍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진태경이 언급되던 때부터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던 부족장 하나가 돌탁자를 두드린 것이다.
“내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불편해서 못 들어 주겠군. 말조심하게, 장 족장. 궁주께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분이시니까. 아니, 남만의 모두가 마찬가지지. 나약한 한족 놈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대화를 주도하고 있던 중년의 부족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용맹하고 자부심 넘치는 말, 참으로 감명 깊게 들었네. 한데 그 나약한 한족 놈이 독혈지에서 천년지주 두 마리와 수천의 독물을 처리했다는 말은 못 들었나? 그가 바로 그 화왕(火王)의 진전을 이은 중원의 이름난 전사라는 건?”
“그, 그건…….”
“그리고 오 년 전, 궁주께서 친히 중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족의 영역을 침범한 게 누군가? 자네 아닌가? 주둥이가 독사에 물렸어도 말은 바로 하자고. 자네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궁주가 아니라 백상 대족장일세. 자네가 그의 충견(忠犬)이라는 건 남만 모두가 알아.”
“뭣이? 충견! 이 개새끼가!”
“개새끼? 이 오독문이 남긴 독 찌꺼기 같은 새끼가 어딜……!”
쾅!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두 부족장이 서로를 향해 칼이라도 뽑아 들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그 순간.
구구궁!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석문(石門)이 열리고, 세 인영이 대전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저벅.
어느새 고요해진 내부를 울리는 발걸음. 선두에서 문득 걸음을 멈춘 사내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냉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대화를 방해한 모양이군.”
“……!”
“……!”
“개의치 말고 계속하게.”
그러나 어디에서도 목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가던 고성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무거운 침묵이 주위를 짓눌렀다. 동시에 대립하고 있던 두 부족장의 표정에 희비가 엇갈렸다.
“오셨습니까, 백상 대족장님.”
굽실거리는 충견을 힐끗 바라본 백상이 중년의 부족장을 응시했다.
“흥미로운 대화였네. 계속 듣고 싶을 만큼.”
“…….”
“못 본 사이 많이 과묵해진 모양이군, 장 족장.”
입술을 깨문 중년의 부족장이 고개를 숙였다.
“백상 대족장님을 뵙습니다.”
백상의 우측에 시립 해 있던 요족의 대족장, 요희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보이지도 않나 보네. 안 그래요, 흑웅 오라버니?”
“으응? 어어. 그럼 안 되지. 우리 어여쁜 요희를 앞에 두고도 예의를 갖추지 않다니. 그러면 안 돼.”
요희를 바라보며 헤벌쭉 웃고 있던 흑웅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를 향한 백상의 서늘한 시선에 통통한 몸을 움츠려야 했다.
“죄, 죄송합니다. 백 숙부. 한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에이. 잘못은 무슨. 우리 착하고 잘생긴 흑웅 오라버니는 잘못한 거 없어요. 그렇죠?”
“그, 그렇지. 요희 말이 맞지.”
말없이 두 사람을 응시하던 백상은 혀를 차며 잠시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수십 명이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탁자에 존재하는 유일한 상석(上席). 그로부터 가장 가까운 세 개의 자리가 바로 궁주를 제외한 세 대족장들의 위치다.
드르륵. 탁.
앞서 차례대로 도착한 스물여덟 명의 부족장. 그리고 지금 막 도착한 세 명의 대족장까지. 도합 서른한 개의 자리가 저마다의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매해 보아 왔던 이 익숙한 풍경 속에서, 백상은 문득 이질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두 자리가 비는군.”
불쑥 흘러나온 한마디.
처음에는 그 누구도 백상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부족장들이 느꼈던 의아함은, 뒤이어 들려온 요희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사라졌다.
“그러게요. 희한하네. 왜 두 자리가 빌까?”
대회의에서 마련되는 자리는 오직 서른두 개뿐이었다.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족장이 아니라면 소궁주조차 시립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 단 하나만 남아 있어야 할 빈자리가, 오늘은 두 개다.
“도대체 왜…….”
그리고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의문이 담긴 중얼거림이 흘러나온 그 순간.
구구궁.
또다시 움직이는 거대한 석문 너머, 비로소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백상의 눈동자가 깊숙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