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83
#682화
쐐애애액!
정면으로 쇄도해 오는 진태경을 바라보며, 대설귀(大雪鬼)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그래, 오너라.’
어린놈의 세 치 혓바닥에 오랜만의 동요를 느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상대가 새파랗다 못해 핏덩이나 다름없는 약관의 애송이라는 것은 진작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대설귀가 파악한 진태경은 고금을 통틀어도 유례를 찾기 힘든 괴물이었다.
이미 아득한 무림 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거인들, 삼성(三星)과 십왕(十王)조차 최소 이립이 넘은 후에야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무시무시한 재능. 그리고 턱없이 젊은 나이.
검성 매종학의 진전을 이었다는 또 다른 천재, 화산파의 청풍과 함께 가장 위험한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향후 오십 년 안에 무신(武神)과 천마(天魔)에 필적할 괴물로 성장할 터. 반드시 지금 처리해야 한다.’
자신의 직속 상관인 남천마후가 무슨 의중으로 진태경의 생포를 명했는지, 대설귀는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다만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판단을 확신할 뿐이었다.
‘마후(魔后), 이번엔 당신이 틀렸소. 놈은…… 결코 살려 둬서는 안 되는 존재요.’
닿지 않을 한 마디와 함께, 대설귀의 소매 사이로 쌍륜(雙輪)이 거친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우우우웅!
이미 무공과 정체가 드러난 이상, 힘을 숨긴다 한들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다.
전신의 감각을 집중한 채 빠르게 가까워지는 진태경의 신형을 주시하던 대설귀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잉!
가파르게 회전하던 쌍륜(雙輪)이 주름진 손을 떠난 것은.
슈화아악!
극한의 음한지기를 한껏 머금은 쌍륜이 공간을 얼리며 쏘아졌다.
오직 대설귀의 의지에 따라 기괴한 움직임을 그린 두 개의 날붙이가 떨어져 내린 그곳에는, 어느덧 삼 장 앞까지 들이닥친 진태경이 있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푸르고 흰 섬광이 뒤섞인다.
화염과 얼음의 격돌.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쌍륜을 튕겨 낸 진태경이 안개처럼 내리깔린 수증기를 뚫고 튀어나왔다.
쐐액!
처음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쾌속한 움직임. 하지만 대설귀의 날카로운 안력(眼力)은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잠시 억누르고 있는 것일 뿐. 놈에게는 분명 내상의 여파가 남아 있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분명히 보인다. 처음과는 달리 미묘하게 흐트러진 움직임과 거칠어진 기세가.
이 순간, 대설귀의 눈동자에 비친 진태경은 상처 입은 맹수였다. 여전히 날카로운 발톱을 지녔음에도 빠르게 지쳐 가고 있는.
그리고 대설귀는 이런 맹수를 사냥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숙련된 사냥꾼이었다.
‘이대로라면 놈을 쓰러트리는 것은 시간문제.’
심지어 지금 그의 곁에는 흑수권마(黑手拳魔)라는 사냥개가 함께하고 있었다.
비록 맹수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을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사냥꾼을 대신해서 맹수에게 달려들 수 있을 만큼은 난폭한 사냥개가.
파팟!
“흑수!”
사냥꾼은 뒤로, 사냥개는 앞으로.
정확히 진태경이 다가오는 거리만큼, 훌쩍 뒤로 물러난 대설귀의 외침에 흑수권마가 진태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노옴!”
분노에 가득 찬 노호성과 함께, 강대한 공력을 머금은 수십여 개의 장력(掌力)이 쏘아졌다.
콰아아아!
파도처럼 덮쳐 오는 흑색 강기. 동시에 진태경의 손에 들려 있던 창이 흐릿해졌다.
슈화악!
선택받은 자들만이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초절정의 영역.
불과 약관 어림의 나이로 그 경지에 오른 젊은 괴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창을 내뻗었고, 창날을 휘감은 청백색의 화염은 검은 파도의 중심을 파고들었다.
퍼엉!
정확히 일점(一點)을 찌른 일격.
강기의 파도를 반으로 가르고 터트리며 쏘아지는 진태경의 모습에 대설귀는 허공을 향해 양손을 내리그었다.
그와 동시에 앞서 창날에 튕겨 나간 채 허공 어딘가를 배회하던 쌍륜이 밑으로 내리꽂혔다.
쉬이이이잉!
마치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은 움직임.
누군가는 이것을 허공섭물(虛空攝物), 혹은 줄이나 실 따위를 이용하여 펼치는 사검(絲剣)이라 부르겠지만, 둘 다 틀렸다.
쌍륜을 움직이는 것은 대설귀의 의지 그 자체였고, 오직 중단전(中丹田)의 힘으로 움직이는 쌍륜에는 한 가지 목표만이 담겨 있었다.
‘죽어라.’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얼음처럼 서늘한 살의(殺意).
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이며 섬광처럼 떨어져 내리는 두 개의 륜과 광폭한 기세를 흘리며 쏘아지는 흑수권마의 신형까지.
쉬잉! 쐐애애액!
삼면(三面)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이닥치는 세 개의 섬광.
그 죽음의 교차점에 존재하는 진태경을 바라보며 대설귀는 확신했다.
‘이대로 흑수권마와 맞붙는다면 무사하지 못할 터. 놈은 반드시 물러날 테니 그 틈을 노려서…….’
하지만 그 순간, 진태경의 움직임은 대설귀의 생각을 송두리째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파팟!
진태경은 나아갔다. 한 치의 물러섬도, 망설임도 없이.
머리 위로 날아드는 쌍륜을 향해 벼락처럼 창을 휘두르고, 절벽 끝에 몰려 달려드는 호랑이의 앞발처럼 일권(一拳)을 떨쳤다.
꽈앙! 콰드드득!
곧이어 대설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터어엉!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번쩍이는 섬광 속, 진태경의 어깨너머로 솟구치는 한 자루의 창.
쉬이이익! 서걱!
그리고 손에서 놓쳐 버린 애병을 뒤로한 채, 흑수권마와 격돌한 진태경의 어깨를 벼락처럼 가로지르는 쌍륜을.
서걱! 푸화아악!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선홍빛 핏물과 비틀거리는 신형.
순식간에 벌어진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토록 냉철했던 대설귀조차 석벽 깊숙이 파고든 쌍륜을 회수하지 못하고 멈칫했다.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대설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자신이 같은 입장이었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회피를 택했을 테니까.
그러나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구구구궁!
진태경과 흑수권마. 두 초절정 고수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기파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허공에서 맞닿은 각자의 일권은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백중세(伯仲勢).
순간 뇌리를 스치는 세 글자와 함께, 대설귀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쉬익!
지금의 진태경은 연이은 부상으로 지쳐 있는 상태.
같은 초절정 고수임에도 명백하게 한 수 아래인 흑수권마가 잠시나마 동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고, 대설귀는 예상보다 일찍 찾아온 기회를 놓칠 만큼 어설픈 사냥꾼이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적기(適期).’
비록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맹수라 해도, 맹수는 맹수다. 흑수권마라는 사냥개는 결코 저 어린 맹수를 당해 내지 못한다.
맹수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사냥꾼이 나서지 않는다면.
‘놈을 죽여야 한다. 지금 당장.’
찰나의 순간 이루어진 판단은 냉정했고, 나아가는 신형은 섬전과도 같았다.
파스슥. 내딛는 걸음마다 대설귀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음한지기가 공기를 얼린다.
단 삼보(三步) 만에 이십여 장의 거리를 지우며 쏘아진 그는, 흑수권마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한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태경.’
보인다. 느껴진다.
하아. 하.
거친 호흡과 창백한 얼굴. 쌍륜이 스치듯 머물다 떠난 상반신은 선홍빛 핏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어느덧 코앞까지 들이닥친 사냥꾼의 존재를 발견한 맹수의 눈동자는 잘게 흔들렸다.
‘내 판단이 옳았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대설귀의 눈동자에 확신이 깃들었다.
열화신룡 진태경. 열화문의 계승자이자 화왕 적천강의 후인.
먼 훗날, 언젠가 새로운 무신(武神)이 되어 천하를 굽어볼 중원의 신룡은 구름 위의 존재가 되기 전에 죽을 것이다.
다름 아닌 오늘 이 자리에서.
바야흐로…… 사냥의 시간이다.
스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잠시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와 대지에 냉기를 불어넣고, 산천초목을 서리로 뒤덮을 바람이.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 절망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심어 주는 설풍(雪風)이었다.
‘왔다. 그가 왔어!’
흑수권마는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려는 환호를 간신히 참았다.
그는 평소 대설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평상시 대설귀가 보인 태도를 생각하면 이런 표현조차 후하다.
항상 종놈을 대하는 듯한 고압적인 말투와 자신을 한참 밑으로 보는 듯한 눈빛. 무공만 따라 줬다면 진즉 남천마후의 눈을 피해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대설귀의 존재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흑수권마는 어느새 황급히 신형을 빼려는 진태경을 바라보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열화문의 제자 놈. 네놈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한다.’
콰드득!
찰나의 순간, 갈고리처럼 펼쳐진 손이 막 떨어지려던 진태경의 주먹을 감싸 안았다.
흑수권마가 권법만큼이나 오랜 세월 익혀 온 금나수(禁拿囚)다.
치지지직. 용암과도 같은 열기에 금방이라도 두 손이 타오를 것 같았지만, 흑수권마는 개의치 않았다.
단 한 순간이면 충분하다. 그럼 이 고통도, 진태경의 목숨도 끝장날 테니까.
흑수권마는 진태경의 부릅떠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환호하듯 외쳤다.
“선배!”
그리고 대설귀는 흑수권마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오직 극한의 음한지기만으로 만들어낸 빙검(氷劍)을, 흑수권마의 등에 쑤셔 넣는 것으로.
퍼걱!
“……!”
느려진 세상 속, 한 줄기 파육음과 동시에 덜컥 굳는 흑수권마의 신형.
하지만 대설귀에게 있어 임무를 다한 사냥개의 반응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 고통과 경악으로 부릅떠진 눈을 한 진태경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분명 그랬어야 할 터였다.
먼 옛날, 대설산에서 마주했던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미 죽음을 맞이한 흑수권마처럼.
강대한 음한지기를 품은 빙검에 꿰뚫려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대설귀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내리깐 그의 시선이 도달한 곳에, 자신의 가슴에 닿아 있는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
대설귀가 내지른 빙검과 동시에, 아니. 그보다 미세하게 앞서 흑수권마의 가슴을 관통한 그 손은, 붉으면서도 푸르렀고 푸르면서도 눈부셨다.
화륵.
뜨겁다. 살과 뼈. 육신 안의 영혼마저 타들어 갈 만큼.
핏물을 머금고 타오르는 청백색의 겁화를 바라보며, 대설귀는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다음 순간, 진태경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좀 더 위로 찔렀어야지. 나한테 경험치를 줄 생각이 아니었다면.”
뭐?
대설귀는 다시 한번 묻고 싶었지만, 진태경은 그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퍼엉!
전신을 불태우는 듯한 끔찍한 열기 너머, 대설귀는 볼 수 있었다.
‘저건.’
허물어지는 흑수권마의 몸뚱어리와, 진태경의 상반신에 걸쳐진 정체모를 붉은 갑옷을.
콰드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