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34
#833화
몽롱하다.
마치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듯한 부유감이 전신을 지배한다.
그 이질적인 감각 속에서 눈을 뜬 진태경은 고장 난 TV 화면처럼 노이즈 낀 시야 너머로 펼쳐진 낯선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여긴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자 답은 금방 나왔다.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鐘乳石)과 축축한 바닥과 공기.
기존의 상식을 벗어날 만큼 넓었기에 곧장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곳은 동굴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인위적인 손길이 닿아 있는 그곳에는, 어림잡아 수만에 달하는 인파가 모여 있었다.
– 오오. 오오오……!
– 인샬라!
마치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들려오는 외침.
긴 로브를 걸친 누군가가 부르짖자, 수많은 이들이 도미노처럼 물결치듯 무릎을 꿇는다.
허리가 굽어 있는 노인도, 두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남녀도, 순진하게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던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직 그들만이 전부였다.
중동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흔하고, 평범한 이들.
그들 중 눈에 띄는 것은, 알 수 없는 문양으로 가득한 로브를 걸친 일단의 무리뿐이었다.
스륵.
긴 로브의 옷자락이 바닥을 스친다. 느슨하게 싸맨 터번 사이로 새하얀 백발을 드러낸 늙은이가 두 손을 활짝 펼쳤다.
– 신의 사자시여! 이 더럽혀진 세상을 바로 세우실 신의 철퇴시여!
그 외침을 들은 순간, 진태경은 눈 앞에 펼쳐진 낯선 광경 속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건…….’
그것은 어둠이었고, 불이었다.
드넓은 동공의 절반을 메우고도 모자라, 천장에 닿을 만큼 높게 쌓인 무수한 마정석을 장작 삼아 타오르는 불길.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짙은 어둠이 불길처럼 일렁였다.
그 안에 실린 미증유의 기운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꿈틀거렸다.
스아아아.
그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는 늙은 마법사의 눈동자가 환희에 젖었다.
전율로 몸을 떨면서도 토해 낸 마지막 외침과 함께,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빛을 내뿜었다.
– 마침내, 저희에게 임하소서!
그 순간.
쩌억.
마치 태중의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나오듯, 굳게 닫혀 있던 어둠 너머의 공간이 아가리를 벌렸다.
동시에 용틀임하듯 거세게 몸부림친 검은 불길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마정석들을 집어삼켰다.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마력(魔力)이 지면에 아로새겨진 마법진을 타고 불길로 이어졌다.
끝없이. 모든 기운을 쏟아붓고 잿가루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파스스슥.
바스러진다. 마정석의 산이 허물어진다.
진태경은 아연한 시선으로 제 역할을 다한 마력의 덩어리가 모든 힘을 잃고 흩날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거대한 폭탄이, 지난 수십여 년간 세상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흘러 들어갔던 재앙의 씨앗이 발화하는 그 광경을.
그리고 마침내 만개(滿開)한 재앙이, 갈라진 공간의 틈새로 걸어 나오는 광경을.
저벅.
새하얀 맨발이 지면을 밟았다. 인간과 다를 것 없는 두 다리와 팔. 그러나 동시에 그 누구와도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듯 번뜩이는 붉은 안광(眼光).
하아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흑발의 사내는 느릿하게 호흡했다.
기나긴 항해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뱃사람처럼. 혹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그리고 조금 전 보였던 안광이 무색할 만큼, 어느덧 새카맣게 물든 눈동자로 새로운 세상을 눈에 담았다. 주위를 둘러싼 그 모든 것을 보고 느꼈다.
희미한 햇빛이 스며드는 천장.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신께 경배하듯 축축한 바닥에 바짝 엎드린 수만 명의 사람.
마지막으로 비틀거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늙은 마법사까지.
– 아아. 아아아.
마법사, 아호메드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핏줄이 비칠 만큼 투명한 피부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용모. 그리고 그 안에서 용솟음치는 아득한 기운까지.
틀림없다.
눈앞의 사내야말로 신이 내린 사자요, 그야말로 신인(神人)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 선지자시여, 보고 계시나이까. 마침내 당신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
아호메드가 사내에게 양팔을 벌린 그 순간.
서걱.
전율로 가득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늙은 마법사의 육신이 썩은 통나무처럼 허물어졌다.
투둑. 툭.
조각난 팔과 다리가, 분리된 상반신과 하반신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뚱어리에서 비스듬히 미끄러진 목이 땅에 떨어졌다.
마치 실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 발치에 닿은 망자의 얼굴을, 사내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수고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수십 조각으로 나뉜 노 마법사의 시체를, 사내의 주위에서 꿈틀거리던 어둠이 끌어당겨 삼켰다. 분해하고 녹여서 소화해 냈다.
콰드드득.
뼈와 살이 분쇄되는, 끔찍한 소리가 침묵에 빠진 동굴 내부를 울렸다.
– ……!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수만 명의 인간이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공의 기쁨에 가득 차 있던 마법사들도, 꿈인 듯 현실인 듯 몽롱한 시야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본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놈이다.’
진태경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홀로 우뚝 선 저 이질적인 사내가 이 땅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라는 것을.
서서히 닫혀 가는 저 공간의 틈새 속에서, 신에게 저주받은 죽음의 세상에서 건너온 악마라는 것을.
스르륵.
핏방울 하나 없이 게걸스럽게 시체를 집어삼킨 어둠이 사내를 휘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풍스러운 흑색 비단이 되어 사내를 치장한 그것이 망토가 되어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니, 동시에 거대한 날개처럼 솟구쳤다.
파아아앗!
진태경은 보았다.
끝없이 뻗어 나가는 어둠을. 천장 틈새로 새어 들어온 햇빛을 지우고, 석상처럼 굳어 있는 인간들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죽음을.
산 것과 죽은 것.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마력의 폭풍.
산산이 부서지는 동굴과 끔찍한 비명 속에서, 진태경을 둘러싸고 있던 악몽이 조각나며 깨어졌다.
콰드드드득!
* * *
흡.
나는 눈을 뜸과 동시에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동시에 보이는 낯선 천장.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맞춰 조금씩 흔들리는 몸뚱어리.
“아.”
외마디 신음과 함께 눈을 깜빡였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한 차례 심호흡하자, 습한 열기를 머금은 공기가 폐로 스며들었다.
‘이곳은…….’
굳이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마차에 누워 있었고, 두어 달 만에 다시 느끼는 남만(南蠻) 특유의 뜨겁고 습한 공기는 익숙했다.
물론 현대와의 시간 차이를 생각한다면, 두 달이 아니라 몇 시진 정도겠지만.
‘마지막에 들었던 그 시스템 알림이, 꿈이 아니었어.’
갑작스럽게 찾아온 안도감에 맥이 탁 풀린다.
현대에서의 마지막 순간. 심력(心力)이 바닥난 나는 로그인조차 시도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아마도 시스템이 반강제적으로나마 돕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며칠 동안은 쓰러져 있었을 것이 분명 하…… 아니, 잠깐만.
‘시스템 업데이트?’
혼잡한 기억 속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는 단어.
내가 들었던 시스템 알림이 모두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변화가 생겼음이 분명하다.
황급히 상반신을 일으킨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오픈.’
그러나 설마 했던 마음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허공을 노려봐도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은 나타나지 않았고, 명령어와 동시에 울렸어야 할 맑은 종소리도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시벌.”
당혹스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갑작스러운 시스템 먹통의 원인에 대해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시스템 업데이트.
‘업데이트가 완료되기까지는 사용 불가, 뭐 그런 건가?’
어릴 때부터 몸 쓰는 걸 워낙 좋아해서 컴퓨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나지만, 업데이트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본 일이다.
다만 이 정도로까지 당황스러운 건, 도무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하나의 프로그램이니까 업데이트를 할 수도 있긴 한데.’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걸 만들고 업데이트까지 하나 싶지만,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아니, 어쩌면 이건 당연한 일이다.
두 세상을 연결하고 게임처럼 레벨 업도 시켜 주는, 이런 정신 나간 시스템도 존재하는데 업데이트 정도는 약과지.
더군다나…….
‘그런 일까지 벌어졌으니까.’
나는 문득 떠올렸다. 도플갱어를 소멸시킨 직후, 시스템이 내게 알려 주었던 그 믿을 수 없는 정보들을.
더불어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끝끝내 막지 못한, 거대하고도 끔찍한 재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꾸욱.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아귀. 새하얗게 물든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동시에 악몽으로 찾아왔던 꿈속의 광경이 눈앞을 스쳤다.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내가 본 그 광경들이 시스템이 내 꿈을 통해 은밀하게 전달한 현실인지, 아니면 혼란스러운 내 무의식이 빚어낸 악몽인지.
혹은, 예지몽(叡智夢)이라 부르는 무언가인지.
하지만 그저 악몽이길 바라는 마음과는 달리, 나는 이미 본능적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어.’
노이즈 낀 시야 속에서도 똑똑히 보았다. 선명하게 기억난다.
수많은 마정석과 마법진을 매개체 삼아 잠시나마 벌어진 공간의 틈새, 그리고 끔찍하리만치 거대한 마력을 휘감은 채 아무런 저항도 못 하는 수만 명의 광신도를 도륙하던 사내의 모습이.
아니, 어째서인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악마의 모습이.
‘설마.’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한 존재의 이름을, 나는 애써 지워 냈다.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도플갱어와 대화를 나누며 느꼈던 태도와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해 보았을 때, 그 사내의 이름은 아스모데우스가 아니다.
만에 하나. 정말 놈의 정체가 마왕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구화산(九華山)에 틀어박혀 수련했듯, 무림에서 일 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더라도 현대에서는 고작 며칠이 흐를 뿐이다.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시간은 내 편이었다.
‘암천(暗天)은 내 편이 아니겠지만.’
내심 중얼거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내부를 둘러보았다.
요새 남만야수궁에서 차박이라도 유행하는지, 과장 좀 보태서 대형 객잔의 별채만큼이나 넓은 공간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뭐 조용해서 좋긴 한데, 다들 어디 간 거야?’
응당 곁에 있어야 할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지 않는다.
화룡각의 인원들도. 호법을 선답시고 옆자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어야 할 혁무진과 내 고백에 현대를 선계(仙界)로 이해하고 입이 쩍 벌어졌던 적천강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응?’
몸도 풀 겸 마차 안을 어슬렁거리던 그때, 나는 문득 귓가를 파고드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 중원은 이미 대지모신님이 폐기 처분 했어요. 지금 중원 무림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냐, 우리 조장님. 대태원진가의 열화신룡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오오. 오오오.”
이게 도대체 뭔 소리지.
나는 웅성거림 속에서 유독 크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 열화신룡 믿고 따르는 것이 누구냐. 바로 나요. 왜 그런지 아시오? 나는 조장님의 보좌를 딱 잡고 살기 때문에! 가장 신뢰하는 수하이기 때문에 딱 잡고 있어요.”
“딱 잡아? 어떻게 말이오?”
“조장님. 꼼짝 마! 열화신룡 까불면 나한테 죽어! 내가 이렇게 우리 조장님하고 친하단 말이에요. 엄청나게 친해.”
“허어어.”
“대지모신의 아들이 누구냐, 바로 열화신룡. 그런데 그 열화신룡을 꽉 붙잡고 있는 것이 누구냐!”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그 순간. 나는 창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듣다 보니까 궁금하네. 그게 누군데.”
혁무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 혁무……어, 시발.”
“시발?”
“아.”
“아?”
따라와,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