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84
#883화
황궁의 경계가 삼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작금의 천자가 즉위한 이후, 황궁은 과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철옹성이 되었다.
무려 열 배나 불어난 수비병과 외인을 철저히 배제하는 보안.
설령 얼굴이 알려진 조정의 관리라 해도 허가받은 통행증이 없다면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곳.
몇몇 호사가들은 그런 황궁을 가리켜 감히 이렇게 칭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감옥.
하지만 황제를 향한 비난이 담겨 있는 그 멸칭(蔑稱)도 오늘만큼은 무색하게 느껴졌다.
“소속과 이름.”
“석가장에서 온 홍 모라고 합니다. 이건 함께 온 식솔들의 호패와 물품 목록입니다.”
“아, 이런 실례를. 누군가 했더니 석가장의 총관이셨구려. 가주님께서는 별래무양하시오?”
“대감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여전히 정정하시지요.”
“허허, 그렇다니 다행이오. 아쉽지만 남은 이야기는 잠시 후에 다시 나누도록 합시다. 자, 다음!”
“안녕하십니까. 대륙표국에서 온…….”
엄청난 규모의 대연회가 열리는 만큼 필요한 물건과 인력도 많아지는 법.
황궁. 그중에서도 가장 바깥의 외궁(外宮)에 속한 그곳은 지난 십여 년간 좀처럼 보지 못했던 외부인들로 북적였고,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각 부에서 차출된 관리들은 제각각의 인간 군상들을 분류했다.
물론 신분과 중요성에 따른 차별 역시 있었다.
황실 재정과 연회에 든든한 도움이 되어 줄 거상(巨商)들이 가장 환영받았고,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고자 진귀한 진상품을 가져온 이들이 두 번째였으며, 그보다 한참 후순위에는 연회의 풍류를 돋우기 위해 온 광대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각종 묘기를 부리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마희단(馬戲團)이라든지.
“제기랄. 이 나이에 마희단이라니.”
화왕 적천강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자랑스러운 열화문의 선조들께서 이 광경을 보았다면 지하에서 통곡하실…… 것 같지는 않았다.
융통성이라고는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는 구파일방 놈들과는 달리, 지금쯤 저 하늘 위에 옹기종기 모여 구름 밑을 내려다보며 낄낄 웃고 계실지도 모른다.
― 야야, 적천강 저놈 백 살 넘지 않았나?
― 한참 전에 넘었죠. 저놈이 아마 본문 역사상 최고로 장수한 놈일 겁니다. 툭하면 요절(夭折)하는 게 우리 열화문의 전통 아닙니까.
― 명색이 일인전승인데, 천하에서 가장 분노 조절 안 되는 놈들만 쏙쏙 골라다가 가르치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황궁이라, 나름대로 재미있겠는데. 저 녀석 스승이 누구였지?
― 접니다.
― 접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냐? 하늘 같은 선조가 불렀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돼?
― 죄, 죄송합니다.
― 다시.
― 십칠 대 문주, 홍. 위. 량!
뭐 대충 이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 않을까.
바짝 군기가 잡힌 스승님의 모습을 상상한 적천강은 목이 메어 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자를 잘못 키운 탓에 스승님까지…….”
그리고 그의 구슬픈 목소리에, 옆에 있던 태산이 숙연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향장육 먹고 싶다.”
“남호, 지금 당장 저 새끼를 죽이게. 노부가 허락하지.”
“정말입니까?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안 됩니다!”
신난 얼굴로 태산의 목을 조르려는 남호를 사마표가 황급히 막아선다.
몇 걸음 밖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신의가 허허 웃었다.
“정체가 발각될 일은 없겠군요. 누가 봐도 훌륭한 마희단 아닙니까.”
적천강이 불퉁한 얼굴로 대꾸했다.
“다행이고 나발이고, 이 나이에 마희단이 말이 되나?”
“그럼 제 나이에는 말이 됩니까? 그나마 노야께서는 겉모습이라도 젊지, 저는 빼도 박도 못하는 늙은이입니다.”
“…….”
“기왕 이렇게 된 것 어쩌겠습니까. 태산. 아니, 거산 저 친구의 덩치가 워낙 거대하니 마희단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의심받을 일이 없지요.”
그 말에는 불만 가득하던 적천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지.”
동창의 기세가 예전만큼은 못하다고는 해도, 그들이 마련해 줄 수 있는 위장 신분은 실로 다양하고 철저했다.
하지만 황궁에 입궁하기 반나절 전, 이번 일에 필요한 인피면구와 호패를 전해 주기 위해 찾아왔던 동창의 전문가는 태산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한참을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이분도 꼭 데려가야 합니까?’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어쩔 수 없이 데려가야 하네. 여기에 두고 갔다간 맹세코 사고를 칠 놈이야. 금의위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오향장육 한 접시에 싹 다 불어 버릴 테니까.’
‘태산이! 그런 배신자 아니다! 고작 한 접시에 동료를 팔아넘기지 않는다!’
‘좋다. 그럼 열 접시. 고기와 향신료 듬뿍 넣어서.’
‘으음. 으으음. 태산이. 잠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자, 봤나? 저런 새끼일세.’
‘아…….’
‘어떻게 하면 되겠나?’
‘신분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저 덩치가 있는 한 상인은 절대 안 되고, 마희단이 좋겠군요.’
‘마희단? 노부를 길거리 광대로 만들겠다고?’
‘죄, 죄송하지만 그것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수준 높은 고수들이시니 어느 정도의 기예(技藝)만 보여 줘도 마희단으로서의 구색은 충분한 셈이고요.’
‘기예라면, 기름을 입 안에 모아 두었다가 불을 뿜고 뭐 그런 걸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황궁에서 열리는 대연회라면, 그 정도로도 부족할 텐데.’
‘저희가 이미 어느 정도 손을 써 두었으니, 그럴듯하게 보이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저기 저 덩치 큰 분께서는 특히 이목이 쏠릴 테니 만일을 대비해 기예를 조금 연습해 가시는 게 좋겠군요.’
‘기예라. 예를 들면?’
‘조금 전에 말씀하셨다시피 기름을 입 안에 모아 두었다가…….’
‘저놈은 입 안에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아. 들어오는 족족 무참하게 씹고 삼켜 버리는 잔인무도한 놈이지.’
‘그럼 맨손으로 장작을 찢는다든지…….’
‘그렇다면 문제없군. 저놈은 손으로 사람을 찢어.’
‘……그런 말은 절대 황궁에서 꺼내지 마십시오. 꼭 약속하셔야 합니다.’
간절하게까지 느껴지는 신신당부 끝에 적천강과 신의, 그리고 화룡각 대원들은 새로운 이름과 얼굴을 받고 황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동창의 막강한 힘이 작용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서신에 적힌 내용들이 전부 사실이었군. 그 대단한 황궁에 이토록 쉽게 들어올 줄이야.”
적천강의 뇌까림에, 그의 옆에서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던 예쁘장한 주근깨 소녀가 대답했다.
“외궁(外宮)이라 특히 더 쉬웠을 거예요. 내궁(內宮)의 경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삼엄하거든요. 외궁을 지키는 금위군도 충분히 정예병이지만, 내궁 경비는 황제 직속 친위대인 금의위가 맡고 있죠.”
“어찌 그리 잘 아느냐?”
“제 조부님께 들었어요. 오래전에 황실에서 중요한 의뢰를 몇 번 맡긴 적이 있었거든요.”
“허어, 하기사 표왕(鏢王)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그나저나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를 지금껏 잘도 기억하고 있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보여 주지 않는, 기특해 죽겠다는 적천강의 눈빛에 긴장감이 감돌던 주화란의 얼굴에도 살짝 웃음기가 맴돌던 그때였다.
“모두 모였느냐?”
품이 넉넉한 관복으로도 가릴 수 없는 살집, 잘 키운 집돼지처럼 배가 불룩하게 나온 조정 관리가 거만한 얼굴로 좌중을 쓸어 보았다.
“본관(本官)이 이번 대연회의 풍악을 담당하게 된 바, 경사를 치르기에 앞서 너희를 심사하고 분류할 것이다.”
철컥. 철컥.
관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울려 퍼진 묵직한 쇳소리.
지금까지 보았던 금위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세와 화려한 황금빛 갑옷을 걸친 그 모습에, 적천강 일행과 마찬가지로 대연회에 참여하기 위해 온 여러 마희단은 물론 기녀(妓女)와 악사(樂士)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금의위…….”
모를 수가 없다.
천자의 상징 중 하나인 황금색을 허락받은 그들은 대국의 최정예이자, 동창과 함께 가장 막강한 권한을 누리는 감시자들이었으니까.
황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금위군과 달리, 금의위는 그리 자주 나타나지도 않을뿐더러 그 위세가 실로 대단했다.
지금 이 순간, 형형한 안광을 뿜어 내며 앞으로 나선 누군가처럼.
“금의위 천호(千戶). 정호군이라 한다.”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사방을 짓누르는 무거운 기세.
순식간에 좌중 위로 드리워진 기파보다 훨씬 앞서 그 의도를 알아차린 적천강이 신속하게 전음(傳音)을 날렸다.
― 모두 주의해라.
뚱뚱한 관리가 앞서 언급했던 심사와 분류는, 결코 평범하고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금의위로 하여금 솎아 내겠다는 거겠지. 혹시 모를 암살자들을.’
잘 차려진 잔칫상에는 언제나 날파리가 꼬이는 법.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수준에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그 날파리가 창칼을 들고 황제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천만다행히도, 이는 적천강 일행과 동창이 충분히 예상하던 바였다.
‘이럴 줄 알았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예로부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고 했다.
신의는 이와 같은 상황을 대비하여 공력을 흐트러트리는 산공독(散功毒)을 직접 제조하여 일행들에게 복용시켰고, 이미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오른 적천강은 굳이 산공독 없이도 기를 자유자재로 감출 수 있었다.
‘문제라면 태산이 저놈 하나뿐인데…….’
하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잠시 태산을 향했던 정호군의 시선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유심히 살펴보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고 해야 옳았다.
“거기, 앞으로.”
“소, 소인 말입니까요?”
기루의 총관쯤으로 보이는 뱁새 수염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자, 정호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네 뒤에 있는 기녀를 말한 것이다.”
“대, 대관절 무슨 연유로…….”
“그 이유는 저 아이가 더 잘 알겠지. 그렇지 않느냐?”
기껏해야 약관이나 넘었을까. 청초한 미모를 자랑하는 기녀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몸을 내던지듯 바닥에 엎드렸다.
“소, 소녀는 아무런 죄도 없사옵니다!”
정호군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한데, 한데 어찌…….”
“허나 네가 허리춤에 찬 향낭(香囊)에서는, 쓰디쓴 독물의 냄새가 나는구나.”
“……!”
“소명하겠느냐?”
고개를 든 기녀가 황망한 표정으로 정호군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뽑아 빛살처럼 휘둘렀다.
쐐액! 푹!
미약한 파공성과 함께 솟구치는 핏물.
자신의 목에 스스로 비녀를 박아 넣은 기녀를, 정호군은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무엇 때문이더냐.”
“십, 십이 년 전. 크륵. 아버지와 어머니, 내 동생……. 쿨럭.”
“복수라. 그래, 그렇겠지.”
“황제를 죽, 죽여야 하는.”
털썩.
연신 핏물을 토해 내던 기녀의 몸뚱어리가 힘을 잃고 널브러졌다.
한동안 말없이 시신을 내려다보던 정호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시신을 치우고, 함께 온 자들은 형옥(刑獄)에 가두어라.”
“충(忠)!”
“자, 잠깐!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는 정말 아무것도……!”
차차창!
서늘한 날붙이의 소음이 황급히 터져 나온 변명을 지워 낸다.
선택권이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절망적인 얼굴로 금의위의 인도에 따라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정호군은, 잠시 미뤄 두었던 한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 너.”
“어?”
“마희단 소속이라 했더냐.”
“으응.”
멀뚱멀뚱 눈을 굴리는 태산의 모습에, 적천강은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조금 더 지켜볼지, 아니면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지.
그리고 그가 조심스럽게 주먹을 말아 쥔 그 순간.
저 멀리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 호군이. 여기서 뭐 하니?”
익숙한 그 목소리에, 적천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씩 웃으며 걸어오는 한 청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