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09
#908화
아주 잠깐,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뭐야, 이게.’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저 멀리 보이는 광경을 응시했다.
혼비백산한 얼굴로 뛰어오는 화룡각 대원들.
그리고 그 뒤를 맹렬히 쫓아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
두두두두!
지축이 울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의(黑衣)를 걸친 그들의 머릿수는 당장 보이는 머릿수만으로도 일천을 훌쩍 넘어갔고, 가까워질수록 또렷하게 느껴지는 섬뜩한 기세는 한 가지를 의미했다.
‘적!’
판단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켜진 붉은 경고등.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인들의 등장으로 순간 소강상태에 빠진 전장에 외쳤다.
정확히는 금의위들에게.
“넋 놓고 있지 말고 무기 들어!”
물론 금의위들이 내가 명령을 내렸다고 해서 고분고분 따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내 옆에는 금의위 천호씩이나 되는 높으신 분이 있다.
“집결! 즉각 집결하라!”
전장을 일깨우는 정호군의 고함을 들으며, 나는 공력을 실어 땅을 박찼다.
꽈앙!
염화일로(炎火一路).
발끝에서 터져 나온 불꽃이 공기를 태운다.
폭발로 말미암은 충격을 등에 업고 한 걸음, 또다시 한 걸음을 내뻗자 이십여 장의 거리가 사라지고 석벽 위 그림자들이 가까워졌다.
금위군(禁衛軍).
금의위와 더불어 황도를 수호하는 대국의 정예이자, 황제를 배반하고 창공이라는 거죽을 뒤집어쓴 채 살아왔던 동천마군(東天魔君)의 그늘로 숨어든 역적들.
높게 솟은 석벽 뒤에서 숨어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아 대던 그들의 활시위는, 어느덧 흑의인들과 함께 자신들의 등 뒤에서 나타난 화룡각 대원들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적어도 내가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장군, 명령을!”
하급 장교로 보이는 누군가의 다급한 부름에, 화려한 갑주를 걸친 중년인이 망설임 없이 손에 쥔 지휘봉을 휘둘렀다.
삽시간에 수십여 장의 거리를 지우며 다가오는 나를 향해서.
“발시(發矢)!”
짧은 갈등 끝에 명령이 떨어진 그 순간.
투투퉁! 솨아아악!
물경 일천에 달하는 궁수들이 몸을 돌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무수한 은빛 화살촉이 공력을 머금은 채 하늘을 뒤덮으며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완벽에 가까운 일제 사격, 그리고 초절정 고수라 해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위력까지.
하지만…….
‘상대를 맞추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꽈앙!
다시 한번 발끝에서 폭발시킨 염화일로의 화염과 함께, 나는 포탄처럼 쏘아졌다.
급격한 가속. 그리고 회피.
푸푸푸푸푹!
듣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지는 맹렬한 파공성이 등 뒤에서 울려 퍼진다.
굳이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그 자리가 수많은 화살로 빼곡히 뒤덮였을 거라는 사실쯤은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대국을 대표하는 정예 중 하나인 금위군이 고작 이 정도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도.
“이게 무슨……!”
“동요하지 마라! 발시!”
예상을 뛰어넘는 내 속도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뿐. 철저하게 훈련받은 휘하의 금위군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동시에 쾌속한 속도로 새로운 화살을 시위에 걸어 쏘아 보냈다.
솨아아악!
한 번.
푸푸푸푹!
또다시 한번.
“쏴라! 쏘란 말이다!”
“순차 사격 개시!”
투투퉁!
그리고 두 차례에 나누어 쏟아진 네 번째 화살 비마저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을 때.
쾅!
나는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솟구쳤고,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던 금위군들의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노, 놈이. 놈이 옵니다!”
“발시! 발시하라!”
그야말로 찰나였다.
도합 네 번의 발사가 퍼부어지기까지 걸린 시간도, 내가 그 빽빽한 화살 비를 뚫고 석벽 위로 도달한 것 역시도.
그리고 순간 느려진 그 세상 속에서, 가장 기민하게 명령을 따라 움직인 일부 금위군이 나를 향해 쏘아 보낸 화살이 공간을 갈랐다.
아주 천천히. 나아가는 화살촉을 타고 흐르는 바람 소리마저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솨악.
공력을 머금은 채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수십여 발의 화살을 향해, 나는 손을 뻗었다.
동시에 가라앉은 심장 소리를, 옥당혈(玉堂血)이라 불리는 가슴의 정중앙에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파동을 일깨웠다.
‘멈춰라.’
그 순간.
화아아악!
보이지 않는 기운이, 공력(功力)과는 궤를 달리하는 미지의 힘이 내 의지에 따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바람을 지우고, 공기를 멈추고, 그 안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던 수십여 개의 화살을 붙잡았다.
우우웅.
대기가 몸을 떨었다. 느려졌던 시간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는다.
하지만 허공을 밟은 채 우뚝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는 무수한 눈동자들의 주인들은, 금위군은 경악에 물든 얼굴로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이, 이런 미친…….”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신음처럼 흘러나온 한마디가 무거운 침묵을 깨트린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부릅떠진 그들의 눈동자에는, 마치 보이지 않은 손에 붙잡힌 듯이 허공에 멈춰 있는 수십여 발의 화살과 그 중심에 있는 내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괴, 괴물.”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경악과 두려움. 불가해(不可解)에 가까운 존재를 목격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의문.
마지막으로,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몇몇 이들의 발악까지.
“무엇들 하느냐! 어서 놈을 쏴라!”
“하, 하지만.”
“금위군 전원! 장군의 명을 따라 저 극악무도한……!”
목에 핏대를 세우며 휘하 병력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는 일부 장교들을 향해, 나는 벼락처럼 손을 뻗었다.
아니, 정확히는 중단전(中丹田)의 기운으로 붙잡고 있던 화살을 흩뿌렸다.
쐐액 푸푸푹!
“커, 커헉.”
“크아아악!”
세찬 파공성에 뒤이어 울려 퍼지는 비명.
금위군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명성답게 그들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이 제법 뛰어난 수준에 오른 고수들이었지만, 내가 조종하듯 쏘아 보낸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카카캉!
번뜩이는 검광(劍光)과 함께 비산하듯 튕겨 나가는 화살들.
금위군 중 누구보다 화려한 갑주만큼이나 빛나는 강기로 사방에서 들이닥친 공격을 단숨에 베어 낸 중년인의 모습에, 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황도십이궁.
황실을 대표하는 열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통틀어 지칭하는 이명.
‘혹시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이라고 들어봤나?’
‘알죠. 별자리 명칭 아닙니까?’
‘황도를 대표하는 열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 바로 그 황도십이궁에 속한 이들 중 절반이 아군이고.’
그건 마삼보에게서 직접 들었던 정보 중 하나였고, 무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중년인은 자신의 대도(大刀)를 힘있게 말아 쥐었다.
“나를 알고 있나?”
“잘 알지.”
고개를 끄덕인 내가 말을 이었다.
“황제 통수 치고 암천이랑 붙어먹은 천하의 역적 새끼. 나와 내 사람들을 고슴도치로 만들고 싶었던 새끼. 그리고 잠시 후면 곧 뒈질 새끼.”
“……!”
“내 생각에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 혹시 부연 설명이 더 필요하면 직접 씨부려 봐.”
“……아니. 충분하다. 한 가지만 빼고.”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과 함께, 중년인이 나직이 덧붙였다.
“죽는 건 내가 아니야.”
그 순간.
쐐액!
중년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경지에 다다른 이들만이 펼칠 수 있는 극상승의 경신법, 이형환위(移形換位).
그가 석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침과 동시에, 어지간한 장정보다도 길고 큰 대도가 섬광처럼 공간을 뛰어넘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초인이라 칭하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속도와 힘.
그리고 도신을 빈틈없이 휘감고 있는 강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운까지.
‘강하다.’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이름 모를 중년인이 어느 정도 수준의 강자인지. 또한 지금의 경지에 올라 금위군을 이끄는 수장이 되기까지 얼마나 고된 수련을 거쳤을지.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저자의 대도는 결코 내 몸에 닿지 못한다.
어느 산맥의 정경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그보다 높은 위치에서 굽어보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니.
쏴아악!
단 한 걸음. 그것으로 족했다.
공간을 일그러트리며 들이닥친 대도는 텅 빈 허공을 평지처럼 밟으며 움직인 내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줄기줄기 뿜어진 강기만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스쳤다.
치직.
불에 덴 듯한 통증.
이미 넝마가 된 의복 사이로 드러나 있던 살갗이 강대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진다. 터져 나가며 핏방울을 흩뿌린다.
내 것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핏물과 함께 뒤섞이며.
그륵, 컥.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중년인의 몸뚱어리가 파르르 떨렸다. 황소처럼 두꺼운 목에는 조금 전만 하더라도 찾아볼 수 없던 무언가가 삐죽 솟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차갑게 번뜩이는 무언가가.
“크륵. 이, 이건.”
간신히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유지하는 와중에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화살촉을 더듬는 그를, 나는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았더니 마음이 불편하더라고. 하나는 돌려줄 테니까 가져가.”
“허, 허공섭물(虛空攝物)?”
“비슷하긴 한데, 달라.”
툭.
나는 손가락으로 비틀거리는 그의 가슴 정중앙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훨씬 더 어렵고, 확실한 거지.”
“……중단전. 중단전이로군.”
쿨럭.
한 움큼의 핏물을 토해 낸 중년인이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아직 놓지 않은 대도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꺼져 가는 목소리와 함께.
“나, 나는 황도십이궁의 금우궁(金牛宮)이자, 금위군 친군지휘사사(直衛親軍指揮使司)이며, 그 누구보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천주를 위해 신명을 다하는…….”
그리고 그 뒷말은, 영영 끝맺어지지 못했다.
스륵.
손아귀에서 미끄러진 대도가 먼저였을까.
아니면 눈앞에 짙게 드리워진 죽음과 함께 기울어진 몸뚱어리가 먼저였을까.
누가 먼저 지면에 처박혔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주인과 병장기는 한 몸이 되어 추락했고, 나는 곧이어 지상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음을 들으며 석벽 위로 발을 내디뎠다.
정확히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금위군들의 한가운데로.
흐읍.
누군가가 헛숨을 삼킨다. 석벽 위를 가득 메운 그들에게서 무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두려움과 분노, 경악. 마지막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혼란도.
그리고 저 혼란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일 것이다.
‘저들 모두가 암천의 끄나풀은 아니다.’
당장 이 전장에 있는 배신자들의 숫자만 물경 수천.
제아무리 동천마군이 창공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기간 황실에 있었다고는 하나, 이들 모두가 처음부터 암천의 개로 길러진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대국의 황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포섭. 강압. 혹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
아마도 암천은 그렇게 저들을 길들였을 테고, 놈들이 사용했던 당근과 채찍은 이제 내 손에 들어왔다.
“다른 것 몰라도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다.”
불쑥 입을 연 나는 금위군 모두를 향해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황실의 편에 선다면, 역적이 되는 것만은 어떻게 해서는 막아 주지.”
그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을 뻗었다.
살기를 띤 채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다가오던 금위군 장교를 향해.
쉭. 쿠웅.
한 줄기 파공성이 울려 퍼졌고, 하나의 시체가 늘어났다.
나는 지풍(指風)에 미간을 관통당한 채 쓰러진 시체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손?”
“……!”
“……!”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나는 석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물론, 마지막으로 꼭 필요한 한 마디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너희들이 봤을 때 진짜 이 새끼는 악질이다 싶은 놈은 지금 당장 쳐내라.”
“예, 예?”
“죽이라고, 너희가 직접.”
“……!”
그래.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나는 서로를 곁눈질하는 금위군들�을 뒤로 하고 달려나갔다.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을 피해 도망쳐 오는 화룡각 대원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쐐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