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15
14회
“저기…. 해인아, 염치없지만 한 가지 청을 해도 되겠니?”
“뭔데?”
“정말…. 미안하다만….. 내, 이대로는 나서기가 민망하구나. 팔과 다리를 가릴 수 있는 의복을 입을 수 있겠니? 또한 쓰개치마도 좀……”
“풉! 앗, 미안. 미안. 쓰개치마에 빵 터졌네. 윤설아, 여기에선 그런 거 없어도 돼. 그렇지만 반팔은 아무래도 불편했던 모양이구나. 긴팔 꺼내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한낮엔 아직 더울 텐데 괜찮겠니?”
쓰개치마 소리에 해인이 왜 웃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윤설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해인에게 긴 옷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은 안심이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나선 길이었다.
날씨까지 화창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웃던 윤설은 골목 끝에서부터 더 이상 걸음을 걷지 못했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양 옆으로 우뚝 솟은 집들에 놀란 가슴이 겨우 진정되던 찰나였다.
그것도 해인의 설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제 시야에 담긴 것들은 그녀의 설명이 더 많이 필요함을 일깨워주었다.
살며시 떨고 있는 팔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해인이 윤설의 팔에 팔짱을 낀 것이었다.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해인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친구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윤설아, 많이 놀랐니?”
“으,응.”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은 길……
그 위를 빠르게 오가는 정체 모를 것들……
길 주변에 늘어선 나무들…..
그리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그들의 의복들……
시선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윤설에겐 상상을 초월해 파격, 그 자체였다.
“다시…… 돌아갈까?”
해인의 물음에 윤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간신히 용기를 낸 이유는 벗의 진심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다.
사흘 내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고민해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처소 안에서 웅크리고만 있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니. 가볼 것이야. 헌데…. 해인아, 나를 좀 잡아주겠니? 너무 떨리는구나.”
“그래, 당연하지. 내가 붙잡아줄게. 자, 이러면 괜찮지?”
해인이 윤설의 팔짱을 끼며 싱긋 웃자 윤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설아, 내가 천천히 설명해줄게. 처음이라 그렇지 계속 보다보면 너도 익숙해질 거야. 내가 만약 조선으로 갔다면 너보다 더했을 걸? 크큭….”
스무 살, 동갑내기 둘이서 팔짱을 낀 채 걷기 시작했다.
해인은 제 눈에 보이는 족족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윤설에게 설명했고 그것을 듣는 조선의 소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귀담아들었다.
갑자기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바람에 혼란스럽긴 했다.
하지만 윤설은 그토록 궁금히 여겼던 후대의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제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가 힘들었다.
길을 걸어가던 윤설과 해인이 까르륵 웃자 주변을 지나던 이들이 무심코 그들을 응시하다가 다시금 동그래진 눈으로 돌아보았다.
누가 보아도 다정한 친구 사이로 비춰졌지만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윤설의 패션과 기다랗게 땋아 내린 댕기머리 때문이었다.
달력의 숫자는 가을이었지만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젊은 아가씨가 팔다리를 모두 덮는 긴 옷으로 다니는 것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기다랗게 땋은 머리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비주얼은 아니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윤설아, 정말 웃긴다. 푸하하…. 자동차를 멧돼지로 알았다니….. 어쩐지 네가 자꾸만 멧돼지 얘길 하기에 난 무슨 소린가 했다니깐. 솔직히 말하면, 정신 줄을 살짝 놓은 사람 같기도 했어. 앗, 미안.”
“아니다. 이제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구나. 그래도 멧돼지가 아니라서 다행이지 않니? 휴우…. 정말로 안심이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진짜 멧돼지가 나온다면 으윽…. 끔찍할 것 같아.”
시원한 웃음 덕분에 긴장을 풀게 된 윤설은 말이 끌지 않는 탈 것에 올라타고 가면서도 한동안 동그래진 눈을 어쩌지 못했다.
투명한 차창을 통해 바깥의 풍경이 그대로 담겼다.
조선에서 온 아씨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유리창에 제 손가락을 갖다 대며 감탄을 연발했다.
꿈만 같은 일들은 조신한 그녀를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진지한 감동이 옅게 새어나올 때마다 주변에 앉아 있던 이들이 번갈아 두 아가씨들을 훑어보았다.
1시간이 넘도록 달려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자 해인이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윤설아, 이곳을 첫 번째 코스로 정한 건, 바로 고향을 그리워할 너를 위해서야. 마음에 들면 좋겠다. 짠……. 어때?”
주변을 살펴보기에 바빠 해인의 가리킴을 뒤늦게 따라간 윤설의 시선이 순식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굴 위로는 곧 울 듯 말 듯,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정이 펼쳐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린 채 고개를 가로젓던 윤설이 제 벗을 바라보았다.
“해인아! 너! 너….. 드디어 알아낸 것이로구나!”
“으,응?”
“최선을 다해 나를 돕겠다더니! 그래, 네가 드디어 나를 돌려보내 줄 방법을 찾은 것이야! 고맙구나. 고마워. 해인아! 후대와 이렇게 연결된 문이 있었다니…. 널 만난 것이 참으로 천운이었구나. 미안하다만, 난 어서 부모님을 뵈어야할 듯하다.”
뜻 모를 소리를 늘어놓던 윤설이 거의 뜀박질에 가까운 걸음으로 커다란 기와지붕의 대문으로 들어갔다.
“유, 윤설아! 윤설아! 그게 아닌데……. 같이 가!”
두 아가씨들이 지나간 지붕 아래로 의 현판이 선명했다.
세팅을 마친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동시 녹음 마이크가 감독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태프들 역시 숨죽인 채 대기 중이었다.
이번 신은 중대한 판결을 앞두고 고뇌하는 젊은 판관의 모습을 그릴 예정이었다.
주인공의 정의감과 올곧음이 도드라져야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잘 담아내야 하는 것은 감독에게 의무이자 부담이었다.
높다란 누각에서 감정 선을 잡고 있는 민준 역시 그런 의미를 잘 알기에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대사가 단 한 마디 밖에 없는 이번 신에선 오로지 눈빛과 표정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만 했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를 끊임없이 되뇌며 약자를 보호하려는 판관의 성정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그였다.
실제 본인이라면 어떨까를 고민하던 그는 이미 젊은 판관, 그 자체였다.
“자, 스탠바이!”
감독의 사인에 민준을 둘러싼 조명이 불을 밝혔다.
과하지 않은 빛은 고뇌에 빠진 판관의 모습을 멋지게 받쳐주었다.
모니터를 확인한 감독이 힘찬 음성으로 “큐”를 외치자 준이 감정을 표현해내기 시작했다.
담담한 눈빛엔 따스함과 냉철함이 공존했고 조금 굳어진 얼굴 위로는 고뇌가 피어났다.
한껏 몰입한 감독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모니터를 응시했다.
준의 연기에 꽤나 만족한 얼굴이었다.
덩달아 숨죽이고 있던 스태프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표현력은 신인이나 다름없는 배우에게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젊은 판관이 시선을 조금 들어 먼 곳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앞날을 염려하는 마음을 막 표현하려는 찰나, 빠르게 스쳐가는 누군가가 민준의 시선에 담겼다.
배역과 완전히 하나가 된 그였다.
완벽한 감정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다른 곳을 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것을 차단하려는 마음에 홀연히 담긴 것은 바로 기나긴 댕기머리였다.
흔치 않은 것에 반응해 그의 시선이 흔들리는 순간, 갑자기 한 여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윤설아아……… 같이 가……… 기다려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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