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28
27회
룸의 미닫이가 열리자 미리 와있던 김 PD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민준의 등장에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우리 민준 씨, 어서 와요. 오랜만이군요.”
준이 깍듯이 인사하며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김 PD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말씀 낮추시죠. 초면도 아니고…. 좀…..”
“아이고, 무슨 말씀을…. 대세가 되셨는데….. 허헛, 자자, 윤 실장님도 반가워요. 여긴 메인 작가 그리고 저쪽은 조연출입니다.”
김 PD와 동석한 이들 역시 설렘을 감추지 못했고 준의 인사에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준과 매니저가 자리하자 김 PD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찾아오느라 힘들었죠? 여기가 요즘 핫 플레이스라고 해서….. 하핫…. 이번 작품에 참고도 할 겸, 우리 민준 씨에게 대접도 할 겸….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아, 그리고 미리 말을 못 했는데….. 실은 여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있는 배우도 초대했어요. 민준 씨, 괜찮죠?”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배우 캐스팅에 공들이는 감독의 입장을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 매니저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미리 말을 했어야지. 김 PD 매너하고는….쯧쯧…. 사람이 진짜 마음에 안 드는 짓만 하네.’
“아이고, 고마워요. 그분은 스케줄 때문에 좀 늦는다고 하니 자, 먼저 식사들 하실까요?”
한 자리가 빈 채로 음식이 들여졌다.
코스로 나오는 것을 당연히 여겨 담담했던 이들은 요리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재료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리로 완성된 빛깔과 담는 모양새는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자, 많이들 드세요. 맛이 있어야 할 텐데…. 허헛….”
김 PD의 권유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숟가락을 들어 호박죽을 떠 넣은 매니저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깐. 뭐가 이렇게 밋밋해? 자고로 호박죽이란 달달한 맛으로 먹는 거지.’
김 PD와 동행한 이들이 준을 향해 팬임을 자청하며 떠들었지만 매니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젓가락을 들어 무채 나물을 입에 넣었다.
나물을 씹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심드렁한 채였다.
‘아놔, 장난하나? 무슨 나물이 이렇게 싱겁냐? 이집 곧 문 닫겠군. 그나저나 저 김 PD 멱살을 확 잡아버려?’
민준이 작가와 조연출의 너스레에 싱긋 웃자 덩달아 웃던 김 PD가 윤 매니저를 응시했다.
“우리 윤 실장님, 음식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하핫, 많이 드세요.”
욱한 그가 곧 반격에 나서려다 멈칫했다.
불평하며 씹어 넘긴 게 바로 몇 초 전이었건만 그는 무채 나물을 또다시 집고 있었고 호박죽은 어느새 싸악 비운 상태였다.
마치 그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한 발언이 준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감독님, 여기 음식이 참 근사한데요? 요즘 어디를 가나 너무 자극적인 맛이라서요. 오랜만에 밥다운 밥을 먹어봅니다.”
“앗, 정말이죠? 우하하…. 고마워요. 많이 들어요.”
함께 웃던 조연출이 감독의 지시에 카메라를 들어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준과 매니저가 난데없는 촬영을 궁금히 여기자 감독이 겸연쩍을 표정을 지었다.
“아직 전문가 섭외를 못 해서 말입니다. 많은 곳을 둘러보았는데 여긴 좀 특별한 것 같아서요.”
고개를 끄덕인 준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대본을 읽으면서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의 음식에 얽힌 판타지라니…..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하신 건가요?”
“아, 그 말씀, 칭찬이죠? 하하…. 뭐랄까? 음식이란…..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니까 그것을 접목한 스토리를 생각하게 된 것이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바탕이 될 것도 같았고…….”
민준이 김 PD의 설명을 호기심 있게 듣는 사이, 매니저는 젓가락질을 바쁘게 이어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스태프들도 음식들을 가만히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준에게 확답을 얻기 위해 공들이고 있던 감독도 어느새 색다른 음식에 빠져갔다.
잠시 후, 주인장이 직접 다음 코스를 들고 오자 김 PD의 호기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저기, 사장님이 이 음식들을 모두 만드셨습니까?”
“아, 예. 어떠신지요? 처음 오신 분들은 맛이 좀 밋밋하다고들 하시는데…..”
주인 남자가 겸연쩍은 얼굴로 웃자 감독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이것이야말로 제가 찾던 것입니다. 아, 저는 YBS 드라마 PD입니다. 이번에 조선의 음식을 소재로 드라마를 준비 중인데요, 실은 자문을 아직 구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저희에게 도움을 좀 주실 수 있으실까요?”
“예에? 아이고….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이 많으실 텐데…. 그 뭐더라? 궁중음식 연구가도 계시고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흠칫 놀란 남자가 손사래를 치자 감독이 사정했다.
“아, 저희는 궁중 음식이 아니라 조선 양반가의 음식 재현이 필요합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니 선생님께서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다시금 간곡한 청이 이어지자 방에 있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주인 남자를 향했다.
지금 그들에겐 남자가 허락을 할 것인지 아닌지가 몹시 궁금할 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진땀을 흘리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실은….. 휴우…. 이거 알려지면 좀 그런데….. 저도 스승님께 배운 것입니다만….”
“예에? 스승님이 계신단 말입니까? 어디에 누구신지…”
감독이 동그래진 눈으로 묻자 남자가 미닫이 문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저쪽 테이블에 모자를 쓴 분이 바로 제 스승이십니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남자의 조심스런 손끝을 따랐고 상대를 발견한 이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섯 명 중에 넷은 야구 모자를 쓴 앳된 여성이 주인장의 스승이라는 것을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민준은 그들과 다른 이유로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저, 저 아가씨는….. 김윤설 양?!’
민속촌에서의 첫 광경은 스쳐가듯 가벼웠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생생했다.
댕기머리를 휘날리며 달려가던 모습도…..
길을 잃었다는 방송을 듣던 순간도…..
두 여자가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던 모습도……
어쩌면 별 것 아닌 것일 수도 있었지만 준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 이후로 가끔씩은 생각났고 그녀의 사연이 무엇인지도 궁금했었다.
그저 한번쯤 더 만날 수 있길 바랐지만 그마저도 바쁜 일상에 곧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다시 만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잊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녀가 지금 제법 가까이에 있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준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낯선 여자의 음성이 방으로 흘러들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고 민준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정신없이 음식의 맛을 음미하던 윤 매니저는 급기야 젓가락을 놓을 지경이었다.
“아이고, 마침 잘 오셨네요. 자, 다들 초면인가요? 우린 만난 적이 있는데…. 하핫, 이지 씨 어서 와요. 여긴 민준 씨 그리고 이쪽은 심이지 씨…..”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여자에게선 향수냄새가 은은했고 네크라인이 리본으로 장식된 원피스는 허리가 잘록했다.
민준의 낯빛이 당혹감으로 물드는 사이, 미닫이문이 스르륵 닫혔다.
못내 아쉬운 마음은 표현조차 하지 못한 채 금세 윤설과 단절되고 말았다.
“실은…. 오늘의 만남에 관해 많이 망설였습니다. 민준 씨와 이지 씨…. 스캔들에 얽혀 좀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바로 저의 확고한 결심 때문입니다. 저는 첫 구상부터 지금까지 주인공 배역으로 민준 씨랑 심이지 씨를 생각했고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제발, 제 연출작의 주인공들이 되어주세요. 부탁합니다.”
김 PD와 스태프들의 간청이 주를 이뤘던 모임이 마무리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윤 매니저가 스케줄을 핑계로 민준과 먼저 일어난 셈이었다.
룸을 벗어나 마당으로 나온 그는 다짜고짜 욕설을 날렸다.
“아 진짜, 저 사람들 뭐냐? 무슨 이런 개 같은 매너가 다 있어? 스캔들 난 사람들을 다시 붙여? 이게 말이 되냐? 어쩐지…. 내 예감이 깔끔하진 않았다니깐. 응? 야, 준아, 너 어디가? 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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