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57
56회
[ 어? 이지? 하하…. 먼저 전화를 하다니…. 놀랐는걸? 사실은 설렘이 더 컸지만…… ]수화기 너머, 태주의 음성은 제법 들뜬 상태였다.
이지가 그의 기분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농담할 기분 아니야. 이상형으로 날 지목하다니….. 골탕 먹이려는 거야?”
[ 훗…. 골탕 먹이다니? 내가? 너를? 이상형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한 것뿐인데 너무 까칠한 거 아니야? ]“불과 몇 주 전까진 동기라고 하더니 어느새 이상형이 된 거지? 너무 얄팍하단 느낌이 드는데? 사람 봐가면서 장난쳐.”
[……장난? ]둘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지에겐 제 말을 번복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녀로선 안하무인인 태주가 얄미울 뿐이었고 그와 신혼일기 따위에 출연해 가식을 떠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 심이지, 너 지금 굉장히 무례한 거 알아? 어떻게 사람의 진심과 장난을 구별하지 못해? ]날선 사내의 음성에 이지가 멈칫했다.
태주가 그토록 정색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가 본심일까를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안테나가 오직 민준을 향해 있는 그녀로선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그냥 넘어가기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뭐…. 기분 나빴다면…..미안.”
이지의 사과가 희미한 음성으로 마무리되었다.
[ 앞으로는 네 마음대로 생각하고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응? ]분노로 시작되었던 통화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마무리되자 이지가 잠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상의도 없이 이상형을 운운한 그에게 기분 나쁘다는 걸 내색하고 싶은 그녀였다.
하지만 결론은 어설프게나마 인정한 꼴이었다.
약이 오른 이지는 다시 폰을 들려다가 말았다.
‘강태주, 더 이상 오버하지 마. 오늘은 넘어가지만 다음엔 그렇지 못할 거야.’
말간 아침 햇살이 커튼 틈새로 소리 없이 들어와 윤설의 이마에 닿았다.
선잠이 들었던 그녀가 눈을 비비더니 몸을 일으켰다.
해인은 여전히 꿈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새벽녘 한 차례, 옥탑 방엔 잠시 불이 켜졌었다.
으레 일어날 시각에 맞춰 울린 알람 때문이었다.
드라마 촬영이 끝난 것을 비로소 깨달은 이들은 다시금 이불 속으로 들어갔던 상태였다.
윤설이 익숙한 눈길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
늘어지게 자던 해인의 후각으로 구수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음냐…. 킁킁….이게 무슨…냄새지…? 흐음…. 구수한 것이….밥 냄새인가? 하아…그러고 보니 배가 고파…….밥? 밥이라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그녀가 깜짝 놀라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해인아, 일어났구나? 공연히 잠을 깨운 건 아닌지 미안했지만…..끼니를 거른다면… 그것이 더 큰 일이 아닐까 해서 말이다.”
바로 코앞, 주방에 서있던 윤설이 겸연쩍게 웃었다.
“헐, 윤설아, 네가 정말 밥을 한 거야?”
자그마한 밥상 앞에 앉은 해인이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묻자 그녀가 싱긋 웃었다.
“저거….말이다. 네게 가르침 받은 대로 했더니…. 금세 되더구나. 어찌 저리도 신통방통한 물건이 다 있단 말이니? 불도 하나 없이 말이다. 실은…. 불을 써야 했다면 이리 하지 못했을 것이야.”
해인의 눈길이 친구가 가리킨 것을 따라갔다.
3인용 미니 밥솥이었다.
혼자 살던 집에선 밥을 해먹을 일이 없어 갖추지 못했지만 윤설이 오게 된 이후로 친구를 굶길 수 없어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이었다.
해인이 동그래진 눈으로 웃었다.
“윤설아, 정말 대단하다. 조선의 규수가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다니….우와, 난 보고도 안 믿겨지는 거 있지? 그나저나 내가 공연히 일을 벌인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해인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선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윤설이었다.
그녀는 제가 살던 시공으로 돌아갔을 때 이질감을 겪을 것이 두려워 현대 문물에 애정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물론 쉽진 않았지만 해인은 그런 친구의 마음을 이해해주었다.
밥솥을 산 건 그런 윤설을 배려한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론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윤설이 조금은 시무룩해진 해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로 염려할 것 없단다. 나야말로 공연히 고집을 부려 널 힘들게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어찌 보면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내가 겪어야 할 몫인 것을….이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스스로가 안고 가야 하는 거겠지….. 허나, 난 널 돕고 싶었을 뿐이니 만족한단다.”
“정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나도 기뻐. 히잇. 우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이게 얼마 만인지…… 맞다. 우리 그동안 밖에서 먹느라 집밥은 정말 오랜만이지?”
윤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인이 다시 한 번 까르륵 웃었다.
곧 두 사람이 숟가락을 들었다.
여전히 가스레인지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윤설은 차린 것이 밥과 김 그리고 김치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랜만의 집밥은 생각보다 맛있어 별다른 반찬이 필요치 않았다.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낸 해인이 배시시 웃었다.
“네가 해준 밥이라 더 맛있었나 봐. 원래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가만 있자, 조선의 규수에게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우와, 인증샷을 찍었어야 했는데……”
해인의 너스레에 윤설이 잔잔히 미소 지었다.
서로를 향한 배려와 신뢰는 어느새 둘의 우정을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설거지를 마칠 무렵, 스마트폰의 진동에 해인이 반응했다.
급히 고무장갑을 벗은 그녀가 실없는 사람처럼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윤설이 갸웃거렸으나 곧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챘다.
“상규 오빠……..”
친구와 함께일 땐 쾌활하기 이를 데 없던 이가 막 사귀게 된 남자 앞에선 수줍게 웃었다.
“오빠, 잘 지냈어요? 아, 저요? 그럼요. 저도 아침 일찍 일어났죠. 습관이 되어선지 눈이 떠지던데요? 네, 먹었어요. 참, 윤설이가 밥해준 거 있죠? 그럼요. 정말 맛있었어요. 오빠는 지금 뭐해요? 아…. 그렇구나. 어머, 그럼 민준 씨도 쉬시겠네요?”
벗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웃던 윤설이 멈칫하고 말았다.
민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간에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독 윤설을 당황으로 몰아넣은 건 준이만의 음성과 손길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런 것들이 제 마음을 휘젓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윤설은 그에게 아픈 말을 한 후로 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다정한 언행들이 떠오를 때면 설렘을 어쩌지 못했다.
수다를 이어가던 해인이 슬그머니 현관 밖으로 나가더니 평상에 앉아 까르륵 웃었다.
문은 닫힌 상태였지만 특유의 웃음소리는 안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저리도 좋은 것이겠지…… 해인의 얼굴이 한없이 편안해 보여. 좋은 일이로구나. 그래, 참으로 좋은 일이다.’
윤설은 벗이 팽개친 고무장갑을 제 손에 끼우고는 설거지를 이어갔다.
몇 개 되지 않는 그릇들을 씻어 엎어놓을 때까지도 해인은 들어오지 않았다.
간간히 들려오는 말소리로 여전히 통화 중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싱긋 웃던 윤설이 제 이부자리를 개더니 해인의 침대보를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철컥-
현관문이 열리며 해인이 뛰어 들어왔다.
“윤설아, 대박 소식! 우리 넷이서 드라이브 갈래? 아, 그러니까 너랑 나랑, 상규 오빠랑 민준 씨랑.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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