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99
98회
해인이 핸드폰을 꺼내는 동안 윤 매니저가 제 폰을 준에게 들이밀었다.
준이 잠시 당황했지만 곧 담담함을 회복했다.
“쳇, 계속해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더니만, 결국 사실이었군. 내 말이 맞지? 완전 내숭녀라고….역시 내 안목은 살아있다니까. 심이지, 줄곧 청순한 이미지 고수했는데 완전 까이게 생겼네. 까이는 게 다 뭐냐? 이 정도면 통째로 파이겠구먼?”
윤 매니저는 상기된 음성으로 떠들었지만 준에겐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다.
그의 두 눈은 애틋함에 젖어 윤설을 향했고 두 귀는 그녀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어머머…세상에나… 어쩜 이래?”
이번엔 앞좌석의 해인으로부터 흥분이 쏟아져 나왔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던 윤설이 고개를 돌려 제 벗을 향했다.
“무슨 일이니?”
“윤설아, 이 여자가 여배우인데 꽤나 조신한 이미지였거든? 그런데 글쎄 이 남자랑 잤…..아, 그렇고 그런 사이래. 참내, 그러면서 준이 씨랑 스캔들 났던 건 또 뭐래?”
내심 당황한 윤설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 이분은……”
“그래. 너도 기억하지? 우리 드라마 촬영 때 밥차랑 같이 왔던…. 얼마 전엔 우리 동네에도 왔었잖아. 러블리 걸이라더니….아흑, 배신감 쩔어. 완전 대실망!”
윤설의 낯빛에 슬픔이 감돌기 시작했다.
‘정인이 있는 몸으로…. 어찌 준이 님을 탐했던 것일까……? 다섯 해를 기다려왔다고 하질 않았던가….그 정성스런 마음이 어찌 단번에 사라질 수 있을까…..?’
윤설은 그날 자신을 찾아왔던 이지를 떠올렸다.
더없이 당당한 모습에서 준을 향한 열망을 느꼈고 오랜 시간 그만을 바라보았다는 대목에선 반박할 수 없었다.
솔직히 부럽기도 했다.
그 정도의 정성이라면 준을 부탁할 수 있으리라 여겼었다.
하지만 윤설은 이지에 대해 깊은 실망을 느낀 동시에 홀로 남을 준이 가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혼자만의 울적함을 간신히 추스르던 윤설이 제 어깨를 꼬옥 감싸는 온기에 흠칫 놀랐다.
바로 뒷좌석의 준이 손을 뻗어 그녀에게 닿은 것이었다.
은밀한 손길은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슬픔에 공감해주는 것만 같았다.
윤설이 웃으며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주 가까이에 있지만 서로를 마주볼 수 없고….곁에 앉을 수도 없는 두 사람은 기차의 좌석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서로의 온기만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빠르게 달리는 공간, 모두가 분주히 할 일들을 이어가는 사이에 윤설과 준은 한동안 그렇게 애틋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심이지의 스캔들은 연예계에 굉장한 파문을 일으키고 말았다.
특별히 그동안 조신한 이미지로 인기몰이를 제대로 해온 그녀였기에 대중의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각에선 사생활은 별개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지의 소속사는 예측조차 못한 채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격이었다.
최대한 손을 써보았지만 폭로의 상대는 오리무중이었고 대처는 매번 한 발 늦고 있었다.
상대는 스캔들뿐만 아니라 이지의 드라마 캐스팅에서 은밀히 행해졌던 돈 상납까지 폭로했다.
굉장한 측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 불거지자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져갔다.
이지가 정신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는 중단되었고 CF 계약은 파기되었으며 위약금은 수십 배로 뛰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밀 듯이 밀려오던 차기작 캐스팅 제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가 등을 돌리는 사이, 발 빠르게 대처한 이는 바로 강태주였다.
소속사를 통해 심이지와의 결혼을 발표한 것이었다.
-딩동 딩동-
이지가 겨우 몸을 일으켜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신경 안정제를 털어 넣은 후, 널브러져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대문 밖에 선 이를 확인하고는 부르르 떨고 말았다.
당연히 문을 열어주기 싫었고 그를 집안으로 들일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된 마당에 한번쯤은 대면할 필요도 있었다.
이지는 무엇보다도 그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무심히 열린 현관문 앞에 강태주가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시상식장을 방불케 할 정도의 차림이었다.
턱시도가 아닌 것만 빼면 영락없었다.
“이지,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잠깐 들어가도 될까?”
이지가 무심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따랐다.
뒷짐에 숨겨온 꽃바구니는 제법 컸다.
태주는 이지의 시선이 닿는 곳에 보란 듯이 그것을 내려놓더니 싱긋 웃었다.
“앉아도 돼?”
“앉아.”
생각보다 고분고분한 이지의 모습에 태주가 용기를 냈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널 생각하면 하루하루 피가 마를 지경이다.”
“훗, 그래서 이때다 하고 결혼 기사를 터뜨렸어? 타이밍이 기가 막히던데?”
이지가 냉소를 짓자 태주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 일에 관해 미리 상의하지 못해 미안해. 용서해줘. 오늘은 네게 용서를 구하고 또….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야.”
“들어보고 판단하지. 말해.”
태주가 고개를 들어 이지를 잠잠히 응시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슈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곧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지의 두 눈이 당황으로 일렁였다.
태주가 자그마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족히 2캐럿은 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가 영롱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지야, 내 아내가 되어줄래?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널 사랑하는 거, 알고 있지? 이미 예전부터 널 마음에 담고 있었어. 네가 날 밀어낼 때도 꿋꿋이 견딜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니? 이지, 넌….날 미치게 만드는 유일한 여자니까…. 그리고 너랑 함께 할 미래가 가슴 뻐근할 정도로 느껴졌기 때문이야. 하면서 매일매일 미친 듯이 좋았다. 네 얼굴, 네 말투, 네 행동….모든 것을 내 안에 담아두었지. 이제 정말로 너랑 시작하고 싶어. 이지야, 난 너 없인 안 돼. 나랑 결혼해줘.”
팔짱을 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지가 느닷없이 깔깔 웃기 시작했다.
“태주 씨, 정말 애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날 구제해주겠다는 건가? 뭐,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듯? 왜? 힘없이 추락하니까 거둬주고 싶었어? 그래도 하룻밤 정은 남아 있어서?”
“심이지! 그런 거 아니야! 상대의 진심, 그렇게 짓밟지 말랬지?”
“납득이 되는 행동을 해야 이해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당신 때문에 내 꼴만 더 우스워졌잖아.”
“뭐?”
이지가 태주를 쏘아보았다.
“기막힌 타이밍 이용해 사심 채우려는 수작이잖아! 결혼? 누구 맘대로? 이까짓 다이아에 내가 넘어갈 줄 알았니?”
“그래, 사심 없다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 이대로 사라질 거야? 네가 좋아하는 일, 모두 놓을 수 있냐고! 우리의 사생활이 다 밝혀진 마당에 너나 나나 이제 한 배를 탄 거야! 결혼은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더군다나 내가 널 사랑해! 이거 말고 또 다른 게 필요한가?”
이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돼! 이런 결과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어. 그 나쁜 년 때문에….내 인생이 꼬인 거야!”
극도로 흥분한 이지가 온몸을 파르르 떨자 태주가 그녀를 꼬옥 안았다.
“이지야, 내가 더 잘 할게. 나만 믿어.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 결혼해서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자. 이보다 더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어디 있어? 응? 사랑해. 이 바보야, 내가 널 깊이 사랑한단 말이야.”
이지가 멈칫하고 말았다.
터져 나오던 눈물은 어느새 멈춰있었다.
태주의 마지막 말이 그녀의 귀를 통해 마음으로 스며든 후의 일이었다.
흥분이 잦아들자 그가 몸을 떼더니 이지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눈물로 촉촉해진 눈이 태주를 담는 사이, 그가 서서히 다가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서로를 격렬히 탐하는 모습은 도저히 설전을 벌인 사람들 같지 않았다.
냉랭했던 분위기가 급격히 뜨거워졌다.
서로의 몸은 완전히 밀착되었고 그날처럼 입술이 얼얼해졌다.
하지만 입맞춤이 절정에 이를 무렵, 이지가 제 입술을 떼고 말았다.
태주가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이지는 그를 매섭게 밀쳐냈다.
“싫어! 결혼이라니…..내키지 않아.”
“이지! 우리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잖아. 더 이상 뭐가 필요한데?”
“몰라서 물어? 내겐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태주가 주먹을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민준’이라는 이름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발설하지 않은 건 순전히 제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250년 만의 우주 쇼, 그 열기가 뜨거운데요. 이제 3일 남았죠? 천체 망원경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천문대엔 예약이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대단하죠? 국민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뉴스를 꺼버리는 해인의 얼굴이 심란했다.
“하아….3일이라니…..미치겠네….”
이제 윤설을 마주할 날이 단 3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생각할수록 슬픔이 꾸역꾸역 밀려와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세상은 전대미문의 천문 쇼를 기쁨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해인에게 이러한 역설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녀의 가슴을 더욱 슬프게 만드는 건 바로 친구의 모습이었다.
윤설은 마치 제 임종을 준비하는 사람과 같았다.
그동안 써오던 물건들을 상자 하나에 가지런히 정리하더니 이젠 의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 올 때 입고 있던 한복은 벗의 배려로 깨끗하게 세탁되어 그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해인이 벽에 걸린 친구의 옷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탈칵-
욕실의 문이 열리자 그녀가 재빨리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해인아, 저 비누라는 거 말이다. 정말로 신기하구나.”
윤설은 깨끗해진 버선을 손에 든 채 꽤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아, 그래? 히잇. 저 아래 슈퍼 아줌마가 추천해준 거야. 때가 잘 빠진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나도 좀 애용해야겠다.”
“응, 그리 하렴. 이곳의 문물들이 많이 생각날 듯하구나.”
갑작스레 먹먹함이 밀려와 두 사람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간 또다시 눈물바다가 될 게 뻔했다.
해인이 서둘러 나섰다.
“이리 줘. 내가 잘 널어놓을게.”
“아니다. 내가 하면 될 일이다.”
“어우 야, 내가 해주고 싶단 말이야. 응?”
벗의 한 마디에 윤설이 피식 웃더니 부끄러운 얼굴로 버선을 내밀었다.
한낮의 햇빛은 더없이 찬란했다.
해인은 여느 때라면 환호했을 것들에서 슬픔을 느꼈다.
차마 친구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는 이가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지만 깨끗이 세탁된 버선이 빨랫줄에 걸리는 순간,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침대 아래에서 상자를 꺼낸 윤설이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동안 해인이 사다주었던 것들은 제법 많았다.
붓과 벼루, 종이, 만화책, 광목, 자수를 위한 재료들…..
제 온기가 담긴 물건들은 후대로 건너와 두려움과 막막함에 몸서리치던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것들을 쓰다듬은 윤설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낯설고 두려워 하루 속히 떠나고 싶던 세상이건만…..발걸음이 이토록 무거워질 줄은 몰랐구나. 그것은 아마도 좋은 이들을 만났기 때문이겠지….생각지도 못한 일은 어쩌면 하늘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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