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188
〈 빌어먹을 환생 189화 〉 빛의 샘
유진은 굽힌 등을 천천히 일으켰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아직 눈동자가 뻐근했다. 할 수만 있다면 눈동자를 통째로 뽑아서 물에 씻어버리고 싶었다.
“……많군.”
유진은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멀리서부터 준동하는 기척이 대략 200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성기사들과 심문관들이다. 연결되지 않았어야 할 워프게이트가 연결되고, 유진이 넘어온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다가오는 속도가 빠르다. 유진은 벌써부터 괜한 충돌은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들은 유진의 그런 바람을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다. 보자마자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짜증 나는 말을 지껄이며 돌려보낼 것이 뻔했다.
‘……어디지?’
산속 어딘가라는 것은 알겠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근처에 성기사들과 심문관들이 있다. 이곳 어딘가에 빛의 샘이 있다. 성배와 턱뼈로 투영했던 영상…… 오래된 신전. 주변을 둘러보지만, 그런 신전은 보이지 않았다.
뻔한 일이었다. 빛의 샘에 대한 소문은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으니, 신전부터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유진은 쥐고 있던 아카샤를 들어 올렸다.
공간 곳곳에 깃들어 있는 마법이 보인다. 그중 대부분은 신성마법이라 아카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법과 신성마법, 두 종류의 마법을 결합시킨 복잡한 결계. 순수한 마법으로는 돌파가 힘들다.
그렇다면 부수면 되는 것 아닌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지만, 유진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트레치아 대성당 빛의 기둥을 무너트리고, 성배와 턱뼈를 들고 나왔다. 닫혔던 워프게이트를 연결해서 금지(禁地)일 것이 뻔한 이곳에 도착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이미 몇 개나 한참 넘었단 말이다. 이제 와서 방법이 무식하다고 주저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월광검을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망토 안에서 손에 감겨온 칼자루는 월광검이 아니었다. 성검 알테어. 그것이 멋대로 움직여 유진의 손에 제 몸을 맡겼다. 유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내가 그토록 바랐을 때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주제에. 이제 와서 뭐하자는 거냐?”
이 성검을 움직이는 것은 누구일까? 빛의 신? 만약 그런 것이라면.
유진은 알테어를 박살 내고 싶었다. 이게 얼마큼의 가치를 지니고, 어떠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다. 그러니까 산산조각 내고 싶다.
아니스의 성배와, 성녀의 턱뼈가 보여주었던 것들.
대체 언제였을지 모르는 과거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한 피의 강. 무표정한 얼굴의 아니스와, 울고 있던 크리스티나. 그 외에 존재했을 무수히 많은 소녀들.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엷었던 존재들.
가증스러운 유대.
“……신?”
유진은 빠득 이를 갈면서 성검을 뽑았다. 그렇게, 바닥에 내리찍어서 박살 내려고 했다. 그것으로 박살 나지 않는다면, 그래. 이 끔찍한 존재를 신이랍시고 숭배하는 광신도들의 피로 검신을 흠뻑 적시고 싶었다.
성검을 바닥에 내리찍으려는 순간.
엷은 빛이 검신을 휘감았다. 유진은 그 갑작스러운 빛에 움찔 놀라서 멈췄다. 천천히 번져온 빛이 유진의 몸을 감쌌다.
그렇게 빛을 발하는 것은 성검뿐만이 아니었다.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성배와 턱뼈. 그 두 개의 성유물이 성검이 발하는 빛에 호응하듯이 각각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유진은 잠시 동안 빛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걷기 시작했다.
워프게이트 근처에도 경계 중인 성기사와 심문관은 있었다. 소속은 달랐지만 임무는 같다. 하지만 부여받은 명령은 각자가 달랐다.
혈십자 기사단의 조반니. 그는 휘하 기사들에게 유진을 ‘정중히’ 설득하여 돌아갈 수 있게끔 하라고 명령했다.
말레피카룸의 아타락스는 다른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오랫동안 세르지오 로게리스 추기경을 섬겨왔고, 그가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지를 꿰고 있다. 그리고 조반니와 달리, 유진을 직접 겪어본 경험도 있었다.
정중한 설득? 그 유진 라이언하트가 설득에 따라줄 리가 없었다. 용사다운 자질은 더할 나위 없지만, 신앙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거기에 성격까지 거칠고 난폭하니, 이쪽이 아무리 정중하게 돌아가 달라고 청해도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타락스는 처음부터 무력을 동원할 것을 명령했다. 빠르게 제압하고 잡아두든지, 아니면 왔던 워프게이트로 돌려보내든지. 거칠기 짝이 없는 방법이지만, 아타락스가 생각하기에는 그편이 옳았다.
유진이 성검을 들고 걷기 시작했을 때.
수풀 속에서 6명이 튀어나왔다. 혈십자 제복을 입은 성기사 3명과, 붉은 로브를 두르고 군모를 쓴 심문관 3명. 그들 중에서 유진이 알고 있는 얼굴은 없었지만, 6명은 당연히 유진을 알아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님.”
성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유진의 손에 들려 빛을 발하고 있는 성검에서 잠깐의 경외를 느꼈다. 그리고 반대편 손에서 함께 빛을 발하는 사발을 보고서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유진의 앞을 가로막은 6명은 저 사발이 아니스가 사용하던 성배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곳에 함부로 침입하셔서는 안 됩니다.”
“부디 이대로 돌아가 주십…….”
성기사들의 말이 이어지는 도중, 심문관들이 땅을 박찼다. 휘날리는 붉은 망토의 안쪽에서 빛이 번쩍였다. 서로 논의되지 않았던 기습이다. 게다가 저들의 움직임은 제압을 위한 것 치고는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먼저 덤벼주는 것이 좋았다.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심문관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지만,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딴 것은 유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ㅡ콰직!
성기사들이 보기에, 저것은 무식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폭력이었다. 기교 따위는 일절 없이, 흉악할 정도로 뭉쳐낸 마나를 휘두르고, 내리찍었다. 그것뿐이었다.
고작 그런 공격인데, 심문관들 누구도 저항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 명은 바닥에 처박히고, 다른 한 명은 옆으로 날아가 나무를 박살 내고 땅을 뒹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몸을 던졌던 방향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성기사들은 등골이 오싹거리는 것을 느끼며 태세를 바꾸었다. 머릿속으로 외는 기도가 신성력을 일으켰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밤이 어두웠지만, 성기사들의 몸을 감싸는 신성한 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들이 일으키는 빛은 유진이 두른 빛과 비교하자면 하찮고 엷었다.
성기사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빛의 밝기에서 차이가 나서? 아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서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으킨 신성력은 용기를 북돋고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주지만,
다가오는 유진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순간.
그 얼굴.
일그러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요하리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성기사들은 유진에게서 도저히 용사라고 믿을 수 없을 끔찍한 살의와 분노를 느꼈다.
몸에 두른 빛은 인간으로서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했다. 본능이, 지금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울부짖었다.
단순히 말하자면 각오가 부족했던 것이다. 성기사들은 유진과 싸우기보다는, 대화로 설득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너무 물렀다. 그래서 직면했을 때, 마음이 버티지 못하고 꺾여 버렸다.
다른 기사도 아니고, 굳건한 신앙심을 자랑하는 혈십자 기사단의 성기사들의 본능을 통제하고 짓밟을 만큼. 지금 유진이 발하는 살의가 흉포하고 폭발적이었다.
……꿀꺽.
3명의 성기사들은 포식자 앞의 피식자처럼 굳어서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침을 삼키고, 그렇게…… 유진이 자신들을 지나칠 때까지 서 있었다.
결계에 둘러싸인 숲을 나아갔다. 월광검을 써서 결계째로 박살 내버릴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 없이, 성검의 빛이 결계의 길을 밝혀주었다.
왼손에 든 2개의 성유물도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 여러 종류의 결계가 복합적으로 섞여 앞을 가로막고 있다. 유진의 감각으로도 당장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뿌연 안개 속을 걷는 것만 같은…… 아니, 느낌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유진은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오르막길인지, 내리막길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정말로 맞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진도 여태까지 여러 마법과 결계를 접해 보았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결계는 처음이었다.
“……역시 통째로 부수는 것이 나았어.”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월광검을 뽑지는 않았다. 만약 성검 혼자서만 빛을 내며 길을 밝히려 했다면,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월광검을 뽑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길을 밝히는 것은 성검뿐만이 아니었다.
성배. ……뭔가…… 기묘한 느낌이었다. 오른손에 든 성검이 발하는 빛이 횃불이라면, 왼손의 성배와 턱뼈는…… 마치, 그 자체가 손을 잡아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렇게 길을 안내하는 것만 같았다.
“……이건…….”
유진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앞을 보았다.
“기적인가?”
유진은.
기적이라는 말이 싫었다. 옛날부터 그랬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일으킬 수 없는, 그런 비상식적이고 신기한 일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전장에서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대부분이 비슷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싸움에서 승리하거나.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을 쓰러트리거나. 죽었어야 할 상황에서 살아남거나. 유진이, 하멜이 전생에 겪은 기적은 대부분이 그런 것이었다.
하멜은 그런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길 수 없을 싸움에서 승리한 것?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강한 적을 쓰러트린 것? 잘 싸웠기 때문이다. 죽었어야 할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 생사를 확인하지 않은 적이 병신이라서.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날 구하려 발악해서.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냐.
-하멜. 제가 지금 당신을 치료하고 있는 것은, 제게 당신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다름 아닌 빛의 신께서 주신 것이니, 제 존재 자체가 기적의 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야. 씨X 고생은 우리가 하고 싸움도 우리가 하고 치료는 네가 하는데, 왜 그걸 전부 신이 일으킨 기적이라며 떠받들어야 하는데?
-……신앙의 문제로 당신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멜. 당신이 버러지처럼 끈질기고 지긋지긋하며 고집이 센 새끼라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너 방금 나한테 새끼라고 하지 않았냐?
-하멜. 당신은 결국 자신이 잘났고 노력해서 해낸 것이 은혜로운 빛의 신께서 기적을 내린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 싫다는 것이잖습니까? 그거야말로 오만한…….
-나 말고 우리.
-……네?
-우리가 잘났고 노력해서 해낸 거야. 이길 수 없던 싸움에서 이긴 건 우리가 잘 싸워서. 지금 네가 날 치료하는 건 그냥 네가 여기 있어서야. 네가 기적의 증명이라고? 그게 시X 뭔 개소리야? 너는 기적이 아니라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잖아. 안 그래?
-……하……!
-뭐 불만 있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서 시X 네가 모시는 그 잘난 신 데리고 와봐. 못 하잖아? 어? 근데 뭔 놈의 빌어먹을 기적 타령…….
-그럼 이렇게 합시다.
그때 아니스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기억한다.
-……이 모든 것이, 신의 기적은 아닙니다. 하멜. 당신이 말한 것처럼…… 당신이, 아니, 우리가…… 후후. 그것도 사실은 오만하죠. 그냥, 모두가…… 네. 모두가 이뤄낸 것입니다. 그것에 아주…… 아주 약간. 신의 뜻이…… 자그마한 기적이 더해진 것입니다.
아니스는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아니스가 신앙과 기적에 관해서 제 뜻을 밀어붙이지 않고 조금이나마 물러서고, 인정하며, 납득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자그마한 기적.
유진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자리에 멈췄다.
아니스는 언제나 신과, 빛과, 기적에 대해 말했다. 항상 똑같은 얼굴로 웃으면서 자신이 섬기는 신께 기도를 올렸다.
아니스는 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렇게 보였다. 다른 누구보다 아니스가 신의 존재에 대해 간절했다. 그래야만 했다.
아니스는 그 시대에 죽은 모든 이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을 대신해 성혈을 흘리고, 신을 대신해 빛으로 어둠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신 다음으로 찬란한 빛이 되어, 천국에 들지 못하는 이들까지 대신해 밝혀주고 천국에 인도하겠다고 말했다.
……가끔은 신과 천국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시대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너무 많이 죽었다. 어딜 가도 전장이었다. 마물이 사람을 죽이고 몬스터가 사람을 죽이고 마족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였다.
그래서 아니스는 신의 존재를 의심했다. 전지전능한 신은 세상을 구하고자 강림하지 않았다. 신은 자신의 어린 양이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려주지 않았다. 모든 어둠을 밝힐 빛이어야 할 신은 그 시커먼 시대는 밝혀주지 않았다.
매일같이 해가 저물어 황혼을 지나 밤이 되고, 동트기 전 여명에 세상이 차츰 밝아가지만. 그렇게 밝음을 맞이한 세상은 지난밤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변치 않는 매일에 절망하고.
취기를 이기려 들지 않고, 오히려 무너지려 할 때.
하멜은 처음으로 신이란 작자의 기적을 인정했다. 베르무트. 놈의 존재야말로 신이 내린 기적이라고. 신은 정말로 세상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베르무트를 내려 세상을 구하려 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아니스.”
전투가 격렬하고 길 때면 항상 술을 마셨다.
지옥이라 해도 좋을 싸움이 끝나면. 아니스는 언제나 등에서 피를 쏟았다. 다행히 아니스가 흘리는 피의 냄새는 사방 가득한 피 냄새에 가려졌다.
아니스가 수도복을 벗고 피에 흠뻑 젖은 등을 보여줄 때. 하멜은 그녀의 성흔이 이전과 비교해 얼마큼이나 더 번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성흔에서 흐르는 피를 닦고, 연고를 바를 때에도 아니스는 술을 마셨다.
“술이라도 가져와야 했을까.”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얗고 자그마한 손이 유진의 왼손을 잡아 이끌었다. 소녀에게서 피의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피로 흠뻑 젖었던 흰옷도, 지금은 새하얗고 말끔했다.
그래서 유진은 울고 싶었다. 잡아끄는 손에 온기는 없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고 있다. 지금 보이는 저 등. 찰랑거리는 금발. 바로 코앞에 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면서 눈에만 보이는 저 소녀가.
결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이…… 잔혹하고 자그마한 기적이. 신이 베푼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너는…….”
어린 소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해서 걸어나가며, 유진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천천히 안개가 걷혀간다. 하나 유진은 그딴 것에 시선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왼손을 잡아끄는 소녀의 손과, 팔과, 등과, 머리카락을 보았다.
“……천국에…… 갔겠지?”
이 배덕을 부디 눈감아 주소서. 감아주지 못하신다면 천국에 들기 위한 과업을 당신의 종인 제 어깨에 더욱 올려주소서. 언젠가의 재회를 같은 곳에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소서.
“천국에서…… 천사가 된 거겠지?”
어느새 유진은 숲이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성검이 보여주었던 꿈. 아니스가 외던 기도문.
-우리가 갈 수 없다면 대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다른 누구보다 아니스, 네가 천국에 가야 한다.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진은 전생의 아니스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안다.
아니스를 위해서도 천국은 실재해야 했다.
아니스는 바라던 대로 신 다음으로 찬란한 빛이 되어, 천국을 밝히고 있어야 했다.
-우리는 분명히, 낙원에서 재회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떨그렁.
성배가 손에서 떨어졌다. 성배와 안에 담겨 있던 턱뼈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녀가 이끌고 온 곳은 어딘가의 지하였다.
결계가 만들어내는 환각이 아니다.
유진은 눈앞에 있는 것을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았다. 저것을, 어떤 감정으로, 어떤 얼굴로, 어떤 생각으로 보아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맡고 싶지 않은 피의 냄새. 다행히도 지금 코끝을 감도는 피 냄새는 유진의 것이었다. 꽉 씹은 입술에서, 부릅뜬 눈에서 피가 흘렀다.
봐야 해.
머릿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 유진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벽을 메운 여러 개의 파이프가…… 물웅덩이와 닿아 있다. 파이프가 물을 끌어 올린다. 파이프를 지난 물이, 여과장치를 거쳐서…… 다시 샘으로 떨어진다. 유진이 들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리였다.
많은 여과장치.
많은 파이프.
그렇게 정수를 반복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중앙파이프가 샘에서 물을 끌어올려, 어딘가를 향해 흘려보낸다.
그건 기괴하면서 끔찍한 파이프오르간을 연상시켰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파이프와 연결된 여과장치‘들’. 유진은 허공에 열매처럼 매달린 새하얀 구체들을 보았다.
그 구체들의 안에.
“…….”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내 손에 뭐가 쥐어져 있는 거지.
발밑에 굴러다니는 것.
내 앞에 있는 것.
저 위에 있는 것.
파이프가 연결된 어딘가에서.
또옥.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유진은 한 번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샘 위에 수많은 소녀들이 서 있었다. 여전히 소녀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똑바로 선 아니스와,
울고 있는 크리스티나가 보였다.
“가엾게도.”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저 지독한 여자는, 지금 유진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유진도 답을 갈구하지 않았다.
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아프고 힘들었을 겁니다. 지금도 그럴 테죠.”
울고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아니스가 가까이 다가갔다. 수많은 소녀들이 아니스와 함께 걸었다. 하나씩, 하나씩 소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눈처럼 녹아내려, 샘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아니스와 크리스티나는 녹아내리지 않고 여전히 존재했다.
“하멜.”
아니스는 울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뒤편에 섰다. 그러고는 양팔을 벌려, 크리스티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겁니까?”
그 지독한 질문을 남기고,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진은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땅에 떨어트렸던 성배와 턱뼈는 어느새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스러져 있었다.
“…….”
무엇을 할 거냐니.
아니스다운 질문이었다. ‘무엇’을 바라는 것은 바로 자신인 주제에, 그걸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는데.
유진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살의뿐인 불꽃이 눈동자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