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400
〈 빌어먹을 환생 401화 〉 성상
성상
개선제는 끝났고, 타국에서 찾아 온 손님들도 돌아갔다.
라이언하트도 키옐과 흑사자 성으로 돌아갔다. 유진을 위해 주저치 않고 시무인에 오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국경인 흑사자 성을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저기 말이야, 저기, 우리 언제쯤 하는 거야?”
아롯의 국왕과 궁정마법사단, 마탑주들은 돌아갔지만 멜키스는 시무인에 남았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유진을 찾아와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진의 뒤를 졸졸 따르며 졸라댔다.
“뭘 말입니까.”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묻자, 멜키스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에 비굴한 미소를 지으면서 양손을 슥슥 문질렀다.
“그…… 유진아, 우리 어제 좋았잖아. 응?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는 아니야?”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어제 말이야, 어제, 연회장에서. 설마 그때 나눈 약속은 취기로 내뱉은 가벼운 거였어? 그냥 하룻밤 불장난일 뿐이었던 거야?”
멜키스는 억지로 눈물까지 쥐어짜며 유진에게 매달렸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들기 위해 억지로 밀어붙이려는 모양이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으흠.”
필사적인 어필은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멜키스는 낮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숙였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세냐 언니, 언니가 어떻게 말 좀 해 줘요. 언니도 어제 들었잖아요!”
“뭐…… 뭘…….”
“위니드 말이에요, 위니드! 언니가 유진이랑 춤추기 전에, 쟤가 저한테 위니드를 빌려주겠다, 라고 말했잖아요!”
그 말에 세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헉하고 나온 숨을 삼키고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수도 중심의 광장. 미리 고지가 된 덕에 인파는 통제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시무인 왕국기사단이 광장 전체를 빙 둘러싸며 경계를 서고 있다. 덕분에 이 넓은 광장 안에 사람은 없다시피 했지만ㅡ 그래도, 그래도, 세냐는 혹여 저 말을 누가 듣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메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사소한 것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세냐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민감한 일이다. 어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좋다고 춤을 췄어도, 그다음 날이 되면 어제의 춤이 떠올라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드는 것이 바로 세냐 메르데인이라는 인간이다.
“마음대로 기억은 날조하지 말아주십시오. ‘조건’에 따라서 빌려드리겠다고 말했지, 제가 언제 그냥 빌려준다고 했습니까?”
“너 진짜 너무한다. 내가 여태까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꼭 하나하나 조건을 덧붙여 해?”
“제가 언제 해달라고 직접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멜키스 님이 알아서 해준 거잖아요. 그리고 저는 멜키스 님께 도움을 받을 때마다,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유진, 유진아, 너 그런 말이 진짜 못된 거야. 상응하는 대가? 너와 나 사이가 그렇게 무미건조한 사이는 아니잖아! 그냥 도와주고 싶으면 도와주고, 빌려주고 싶으면 빌려주고, 그러면 좀 좋아? 당장 나를 봐! 이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님은, 널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에서 네 편에 서주기 위해 이 먼 남쪽 나라까지 날아왔다고!”
멜키스는 양팔을 방방 흔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유진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뭘 그리 생색을 내십니까, 저를 위해서 와 준 사람이 멜키스 님 혼자는 아니었잖아요. 솔직히 청색마탑주, 히리두스 우즐렌 님이야 말로 어마어마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윽…….”
“청탑주님은 제 스승도 아니시지만, 제가 유라스에서 유학할 적에 몇 번이나 마법에 관한 조언을 주셨죠. 청문회에서도 제 편에 서주셨구요.”
“으윽…….”
“이번에도 저를 위해 시무인에 와주셨는데, 청탑주님이 제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으셔요.”
“그 정도면 네가 뭐라도 좀 해줘야 하는 것 아니니? 선물이라도 보내던가 하면서 말이야.”
가만히 듣다 보니 뻔뻔함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멜키스는 실눈을 뜨고 쏘아붙였다. 유진도 생각해 보니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서 내심 생각했다.
‘신년 기념으로 선물이라도 하나 보내드려야…….’
아무튼 당장 중요한 것은 청탑주와의 관계가 아니잖은가? 유진은 슬금슬금 다시 다가오려는 멜키스를 흘겨보며 말했다.
“생각해 둔 조건은 없으십니까?”
“생각이야 해봤지. 근데 참 어렵더라, 유진아, 너는 가진 것이 너무 많잖아. 나랑 백색마탑이 가지고 있는 아티펙트라고 해봐야 네가 가진 것보다 대단하지 않아. 그렇다고 돈을 주자니, 내 전 재산을 줘봐야 네 눈에 차지 않을 것 같고.”
“그건 그렇죠. 사실 저도 당장 뭔가가 필요해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지를 둔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정령사인 멜키스가 템페스트와 계약을 맺는 것이 앞으로의 전투에서 더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폐의 마왕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정령왕 3명과 계약을 맺은 멜키스의 힘은, 세냐를 제외한 마법사들 중에서 최고전력이라 할 수 있다.
지금만 해도 그런데, 멜키스가 템페스트와 계약을 맺는 데 성공한다면? 멜키스 한 명만으로 마족이 득실거리는 전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음…… 그렇겠지.]템페스트는 멜키스를 싫어한다. 그 이유는 멜키스가 대정령사다운 품위가 없기 때문이고, ‘멜키스 엘하이어’라는 인간이…… 너무……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제쳐놓았을 때, 멜키스의 자질이 천재적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템페스트도 나름의 각오를 하고, 결의를 다졌다. 폭풍은 300년 전의 미련에 얽매여 있다. 그는 여전히 북상을 바라며, 먼 과거의 전쟁에서 거머쥐지 못한 승리를 갈망하고 있다.
언젠가 유진이 마왕성을 오를 때. 템페스트는 저번 전투에서 그랬듯이, 가능한 선에서 유진을 도울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ㅡ 다른 방법으로, 더욱 크게 전쟁을 기여할 수 있다면……. 솔직히 그쪽이 더 욕심이 났다.
“아티펙트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다……. 그렇다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뿐.”
멜키스는 천천히 양손을 들더니, 검지손가락을 들어 유진에게 빵야, 총을 쏘았다.
“나를 줄게.”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던진 말.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세냐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식었다.
뚜둑. 로브에 가려진 크리스티나의 몸에서도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이토록 반응이 좋지 않을 줄이야. 멜키스는 겨누었던 손가락을 얌전히 내리고서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 내 몸과 마음을…….”
“맞을래요?”
“진짜 너무한다. 아무리 그래도 누나한테 맞을래요는…….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지 말고 들어 봐.”
멜키스는 급히 품 안에서 펜 한 자루를 꺼내더니 허공에 글자를 휘갈겨 썼다. 그러자 글자를 적은 공간이 썩둑 잘리더니 백색의 종이가 되었다.
멜키스는 그렇게 만든 빳빳한 종이를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뭔지 알아?”
“뭔데요.”
“짜자잔! 바로 멜키스 쿠폰이야! 네가 이걸 사용한다면, 대신 죽어달라, 자살해라, 뭐 이런 부탁은 들어주지 않겠지만…… 어지간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할게.”
과연, 마법의 계약인가. 유진은 은색의 멜키스 쿠폰을 살피며 말했다.
“설마 한 번으로 끝나는 건 아니죠?”
“어…… 어?”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만약 멜키스 님이 템페스트랑 계약을 맺는다면 앞으로 수십 년은 계약이 유지될 텐데, 그걸 주선해 준 제 부탁은 딱 한 번 들어주고 끝낸다니.”
“어…… 그…… 그런가……?”
“이렇게 합시다.”
300년 전. 용병일을 할 때부터 체득한 것은, 약속이건 계약이건 한 번 기세를 잡았을 때 우기는 것이 중요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문제는 대부분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마왕이 모두 뒈질 때까지를 만기로 하죠.”
“어…… 그 전까지,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야……?”
“잘 생각해 보세요, 멜키스 님. 솔직히 이 뭐냐, 멜키스 쿠폰? 이게 없어도 제가 부탁을 하면 싫다고 하실 겁니까? 들어주실 거잖아요? 설마 안 들어주실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그, 내용에 따라 조금 고민은 할 수 있겠지만…… 아마 들어주지 않을까……?”
“그렇죠? 그런데 멜키스 님, 제가 여태까지 멜키스 님한테 사적인 부탁을 한 적이 있나요? 중요한, 세상을 위한, 정의로운, 꼭, 꼭 멜키스 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만 부탁을 했었죠.”
“그건…… 그렇지.”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래서 마왕이 모두 뒈질 때까지를 만기로 하자는 거예요. 세상이 완벽하게 평화로워지면 멜키스 님의 도움이 필요할 일도 없을 테니.”
“세상이 평화로워져도 부탁할 일은 있지 않을까? 흐흐흥, 이 멜키스 님은 싸움 말고 다른 것도 잘한다구.”
“그럼 만기를 늘릴까요. 멜키스 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어떻습니까?”
“아…… 아냐, 그냥, 그래, 마왕이 다 죽을 때까지로 하자.”
앞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아득한 시간을 약속하는 것보다는 마왕이 다 죽을 때까지가 낫겠지. 이미 멜키스는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약속한 겁니다.”
“응!”
멜키스가 헤벌쭉 웃으며 대답했다. 그 즉시 유진은 망토에서 위니드를 꺼내 멜키스에게 건네주었다.
“꺄아악!”
멜키스는 위니드를 받아들고 비명을 질렀다. 벌써부터 위니드의 검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템페스트의 결의와 각오가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나 가도 되지? 응?”
“네, 가세요.”
유진은 멜키스 쿠폰을 살펴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 쿠폰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정령계와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건 이 쿠폰을 통해서 멜키스와 소통이 가능하다.
“꺄아아오!”
멜키스는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위니드를 붕붕 휘두르며 날아가 버렸다. 높은 하늘로 날아간 것을 보니, 옛날 아롯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디 높은 곳에서 템페스트와 교감을 시도하려는 모양이었다.
“당장 부탁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크리스티나는 멜키스가 날아가서 사라진 하늘 저편을 힐긋 보면서 물었다. 하지만 유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쟤가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 성격은 착한 것 같아. 그러니까, 이상한 부탁으로 골려 먹는 건 안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세냐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서클 마법의 창시자로서는 재기 넘치는 후배에게 꽤 많은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같은 마법사로서는 멜키스의 어마어마한 재능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세냐는 멜키스를 보호할 생각으로 말한 것이다.
“이상한 부탁으로 골려 먹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알몸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게 만들거나…….”
“내가 그딴 부탁을 왜 해?”
“그럼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데?”
즉석에서 짜낸 생각은 아니다. 멜키스에게 받을 수 있는 것 중 마땅한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낸 이상, 멜키스가 쿠폰을 제시하기 전부터 그녀에게 부탁할 권리를 얻을 생각이었다.
“나 대신 사막을 좀 헤집어 달라 부탁하려고.”
“……아멜리아 머윈. 그녀는 지금 라비스타에 숨어 있다고 하셨지요?”
크리스티나가 두 눈을 얇게 뜨며 말했다.
어제, 유진이 누아르를 통해 보았던 ‘꿈’. 그것에 대해서는 세냐와 크리스티나, 아니스에게도 전해두었다.
멸망의 마왕이 잠든 영지, 라비스타. 그곳에 아멜리아 머윈이 숨어 있다. 그리고ㅡ 베르무트는 사슬에 묶인 의자에 앉아, 마왕의 어전이라 할 수 있을 신전에 봉인되어 있다…….
“나하마 사막 던전은 헬무드 다음으로 흑마법사들이 많아.”
세냐의 귀환으로 인해, 아롯의 흑색마탑은 스스로 몰락했다. 흑마법사들은 현명한 세냐가 오래전에 흑색마탑의 설립에 반대했고, 여전히 흑마법사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선 아롯엔 흑마법사들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헬무드로 돌아가거나, 나마하 사막의 지하던전으로 들어갔다.
“아멜리아 머윈, 그년은 라비스타에 계속 숨어 있을 수 없어. 언젠가는 버티지 못하고 라비스타를 나오게 되겠지. 그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사막왕국 나하마. 그곳에서 아멜리아 머윈에게 궁정마법사장 같은 직접적인 지위는 없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지위가 없을 뿐, 아멜리아 머윈이 술탄의 최측근이라는 것은 세상 모두가 알고 있다. 당장 아멜리아는 나이트마치에 술탄의 조언자로 참가했었다.
동시에 아멜리아는 사막의 던전 마스터. 그녀의 직접적인 제자는 없을지라도, 사실상 아멜리아의 명령에 복종하는 흑마법사들을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던전의 흑마법사 학파에 대한 정보는 키옐 정보국 소속의 첩보원들에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키옐은 나하마의 인접국이며, 나하마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을 적대하고 있다. 헬무드만 없었다면 진작에 키옐과 나하마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것이다.
“그 넓은 사막을 나 혼자 뒤지는 것보다, 멜키스 님한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편하잖아. 그분은 대지의 정령왕과 계약했으니, 사막 뒤지는 것은 나보다 훨씬 잘할걸.”
아멜리아가 없는 동안, 두더지처럼 사막에 굴을 파고 숨은 흑마법사들을 색출해 사냥한다.
아멜리아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속이 뒤집힌 아멜리아가 라비스타 밖으로 뛰쳐나오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헬무드의 눈치를 보는 나하마를 엿 먹이기 위해서.
‘눈치껏 고개 숙이고 시무인에 왔다면 봐줬을 텐데.’
헬무드 다음으로 많은 흑마법사들을 데리고 있는 개 같은 나라. 유진은 300년 전에도 나하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용병 시절에 사막 출신 어쌔신들에게 엿을 많이 먹기도 했고, 나하마가 흑마법사들이나 마족과 편을 먹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나하마랑 전쟁을 벌이실 셈입니까?”
크리스티나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롯의 마탑주는 중립에 서야 하는데…… 자칫하다가는 아롯과 나하마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수 있어. 그렇다면 마탑주들의 입장이 곤란해질걸.”
세냐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유진은 보란 듯이 제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바로 어제, 유진이 왕들에게 나눠주었던 사자의 휘장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뭐.”
이 휘장은 유진의 요구를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왕권까지 사용하며 들어주겠다는 약속이다. 세냐의 말처럼, 아롯에서 마탑주는 중립에 서야한다. 마탑주인 멜키스가 나하마를 들쑤시다가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아롯은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멜키스에게 책임을 물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 휘장을 쓴다면. 나하마 저 자식들이 흑마법사를 싸고도는 꼴이 잘못된 것이니, 까짓거 전쟁을 벌이자고 한다면?
“양아치 자식…….”
세냐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진은 아무 부정도 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저 상황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나하마가 정말로 헬무드의 종복임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잖은가?
일단은, 표면적으로 나하마는 헬무드와 별 관계가 없다. 그냥, 술탄의 조언자가 유폐의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이자 당대 유폐의 지팡이일 뿐. 그리고 흑마법사들이 사막을 참 좋아해서 그 나라에 많이 산다는 정도의 관계가 전부다.
‘지랄하네.’
유폐의 마왕은 술탄을 위해 직접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개자식의 행동거지를 보건대, 지가 전쟁은 일으키지 않아도…… 헬무드 마족들이 나하마를 돕는 것까지 통제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하마가 이리저리 얻어맞는 것을 못 참고서 전쟁을 벌인다면, 흑마법사들과 계약을 맺은 마족들이 나하마의 전쟁에 참전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것이 오히려 유진의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자…… 그럼.”
유진은 표정을 가다듬고 앞을 보았다. 멜키스에게 받을 것도 받아낸 이상, 이제는…… 광장에서의 볼일을 처리해야 한다.
“포즈…… 를 잡아야 하나…….”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의 성상은 바로 이 광장에 세우기로 했다.
유진은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는 드워프 장인들을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