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479
〈 빌어먹을 환생 480화 〉 불꽃
뜬금없게도 베르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짜 기억 속에 존재하는 모습이 아닌, 직접 보았던 모습.
용사, 무신, 올마스터, 위대한,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 화려한 수식어들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초췌하고 마모되어, 셀 수 없이 많은 사슬에 묶여 홀로 앉아 있던 모습.
베르무트가 앉아 있던 장소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멸망의 화신이 된 망령조차도, 베르무트의 소재는 추측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멸망의 신전과 연결된 곳. 어쩌면 멸망의 마왕이 봉인된 곳.
거대한.
흉터나, 칼자국처럼 보이는…… 거대한 흔적이 있는 곳. 베르무트는 바로 그 흔적 위에 앉아 있었지만, 그런 흔적으로 장소를 특정하는 것은 힘들다.
그 흔적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문은 몇 번 가졌지만 긴 고민까지는 하지 않았다. 고민한들 답을 깨우칠 수 있는 내용도 아니거니와, 베르무트 본인은 절대로 만남을 원치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찾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다.’
하멜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생각했고, 의문은 억지로 잠재웠다.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고, 찾아 헤맸다.
설마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잠재운 의문의 답을 얻게 될 줄이야.
‘검.’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이 정답이었다. 그 흔적은 검에 의한 것이다. 검을 휘둘러서 베고 남은 상흔. 당연하단 듯이 깨달아 버렸다.
그 상흔을 남긴 검은, 바로 지금 유진이 휘두른 검이다. 금속으로 만든 검이 아닌, 신력으로 벼려내서 존재와 혼에서 뽑아내는.
‘신검(神劍).’
마력의 검은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뒤늦게 방어를 떠올려 마력을 부풀렸지만, 그것으로도 가로막지 못했다. 검붉은 선이 망령의 몸에 그어졌다. 선이 꾸물거리는가 싶더니 마구잡이로 날뛰고, 그렇게 모든 것이 파괴당했다.
육체가 소멸했다. 망령의 의지는 소멸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만큼 신검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허나 육체가 소멸했어도, 망령의 혼이라 할 부분은 소멸하지 않고 남았다.
콰르르르르! 부풀었던 신력이 다시 선이 되어 사라졌다. 유진은 숨을 내뱉으며 신검을 거두었다.
한 번 휘둘렀을 뿐. 그것으로 망령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하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유진 또한 그 사실을 직감했다.
‘남아 있어.’
신검은 아직 두 번은 더 휘두를 수 있다. 연속해 휘둘러서 남은 혼을 말소할 수 있나? 유진도 가능하다면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끝내고 싶었다. 왕성에서 뛰쳐 나간 누르의 무리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오싹거림이 올라왔다. 유진은 신검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두 번 더 휘둘러서 치명상을 줄 수는 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상대는 무한한 마력을 가진 마왕. 아니, 어쩌면 마왕보다 지독한 상대. 신검은 최후를 확실하게 결정짓기 위한 공격으로 남겨야 한다.
유진의 손이 신검을 놓았다. 즉시 신력이 흩어져 되돌아왔다.
푸확! 프로미넌스가 증폭되었다. 유사 코어를 통한 이그니션. 시커먼 불꽃에 잠기며 유진은 빠르게 생각했다.
‘이그니션을 쓸까? 아니, 아냐.’
아직은 이르다. 신검과 마찬가지로 이그니션은 승부를 결정지을 때 써야 한다. 어지간한 상대라면…… 프로미넌스의 이그니션만으로 충분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앞으로 유진이 죽이겠다고 결심한 상대들은, ‘어지간한’의 범주에 들지 않는 진짜배기 괴물들뿐이다.
망령도 마찬가지다. 유진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신검으로 베어 죽였는데. 놈은ㅡ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를 새로이 구성했다.
“…….”
나타난 망령은, 신검에 베이기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가면까지 똑같이 쓰고 있었다. 타격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신검의 위력은 틀림없이 망령을 파고들었다.
‘계속 베이면 나라도 죽는다.’
동시에 다른 생각을 했다.
저 검의 정체. 유진의 정체. 하멜의 정체. 모든 것을 연결하는 머나먼 과거. 그리고, 베르무트가 앉은 장소. 그곳에 남은 커다란 상흔.
베르무트 라이언하트.
“그런가.”
망령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얼굴에 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베이는 순간에 깨달은 것들.
멸망의 마력이 쏟아져나왔다. 마력은 순식간에 검이 되었고, 망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시선으로는 쫓을 수 없다. 하지만 유진의 신성과 직관이 망령의 움직임을 읽었다.
발검해낸 빛살. 휘황한 빛이 마검을 가로막았다. 신성력을 집중시킨 성검은 마검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유진 님.] [하멜.]두 성녀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늘 높은 곳, 라이미르아의 몸체가 더욱 환한 빛을 발했다. 끝 모를만큼 거대한 신성력이 유진에게 흘러들어왔다.
[보조하겠습니다.]성녀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었다. 성검은 그 어느 때보다 눈 부신 빛을 발했다. 단순히 환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지금 성검에 깃든 빛은, 월광검에도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베르무트가 쥐었을 때와 달라.’
300년 전. 베르무트도 성검을 쥐었었다. 놈은 초반에는 성검을 애용했고, 살육의 마왕을 죽이는데도 성검의 덕을 보았다. 하지만 월광검을 손에 넣은 후부터는, 성검은 거의 전투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성검도 충분히 활약할 만한 검이기는 했으나, 정체 모를 월광검의 힘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손에 쥐어진 성검은ㅡ 300년 전 베르무트의 손에 쥐었을 때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성녀와 성직자들의 신성력이 더해져서? 그 이유도 없지는 않겠지만, 유진은 다른 것을 느꼈다.
‘차별?’
의중을 알 수 없는 빛의 신은, 아무래도 베르무트보다 유진을 훨씬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꽈앙! 성검이 마검을 완전히 밀어냈다. 유진의 움직임이 빛을 이끌었다.
망령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뒤집어쓴 가면. 눈동자는 보이고 있다.
당황이나 놀람 없이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반대로 유진의 눈동자는 불꽃과 격정으로 타올랐다. 명확한 살의와 증오. 눈부신 성검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가득 담겼다.
그 순간. 유진과 망령은 기묘하게도 똑같이 움직였다. 마치 거울 앞에 선 것 같았다.
검을 쥔 자세. 유진의 입술이 비틀렸다. 당연하게도, 유진은 놈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망령도 유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서로의 검이 움직였다. 두 개의 수라광살이 시작됐다. 미치광이 같은 난무가 서로 다른 색의 검광을 내뿜었다. 신성한 빛과 불길한 마력이 서로 뒤엉켰다.
충돌에 공기가 터져나가고 튀어 나간 참격에 지면이 소멸했다. 둘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시작하고 몇 호흡, 그 순간까지 둘의 수라광살은 거울로 비춘 것처럼 똑같았다.
한순간에 달라졌다. 망령의 몸이 뒤로 밀렸다. 대등하게 충돌하던 마검이 크게 요동쳤다.
대등하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망령의 검은 바벨에서 죽은 하멜을 근본으로 두고 있다.
멸망의 마력과 섞이며, 시간 감각이 모호해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기술에 몰두했다. 멸망의 화신이 되면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직감과 직관이 강화되었다. 그 모든 것이 더해진 검기는 모론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나졌다.
반면에 유진은 어떤가. 그는 20년 넘는 시간을 유진 라이언하트로 살아왔다. 검을 쥘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아니, 검을 쥘 수 없던 갓난아기 시절조차도 머릿속에서는 검을 떠올렸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할 것인지를 몰두했다.
강적들을 넘어왔다. 쓰러트려야 할 강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유진은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며 필요한 준비를 해왔다. 수련을 게을리한 적은 없다. 검을 더 휘둘러서 얻을 것이 없는 수준이 되었음에도 굳이 검을 휘둘렀다.
암실에서, 이상적인 ‘나’를 보았다. 암실마저 극복했다. 당시에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지금 돌이켜보면 하찮게 느껴질 정도다.
그렇기에.
유진의 검은 절대로 망령의 검과 대등할 수가 없다. 대등해서는 안 된다. 그나마 놈이 받아칠 수 있던 것은 화신에 걸맞은 직감과 직관. 그리고 강대한 마력 때문이다.
그것은 빈틈없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놈에게 마왕의 직감과 직관이 있다면, 유진에게는 신성(神性)이 있다. 언제나 최선의 전투를 만들어내는 전쟁신의 성질. 유진의 눈이 더욱 찬란한 안광을 발했다.
꽈아앙! 망령의 수라광살이 무너졌다. 검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비집고 들어가 끊어버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신성력이 마검을 완전히 잘라버렸다.
검은 불꽃을 몸에 두르고, 찬란한 성검을 휘둘렀다. 빛이 긋고 나간 선에 검은 불꽃이 뒤따랐다.
꽈과광! 다시 형성된 마검이 가로막으려 했지만, 검과 검이 닿는 순간, 성검이 마검의 방향을 억지로 비틀었다.
‘패링.’
설마 이 순간에 끼어들 줄이야.
스치는 것만으로, 아니, 스칠 필요도 없이 여파만으로 산 하나는 날려버릴 힘이 담긴 공격들. 그것을 집중하고 집중하여 상대에게 꽂아 넣는 초월격의 전투.
한데, 힘이 폭사하기도 전에 정확하게 이쪽의 공격을 뒤틀었다.
‘나는 못 해.’
망령은 빠르게 인정했다.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고가 가속됐다. 직관과 직감이 동시에 답을 말했다.
패링 이후에 찾아올 공격.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는 동시에 찾아오는 뇌광.
‘라이트닝 카운터.’
그런 이름이었지. 알지만, 대응할 수는 없었다. 라이트닝 카운터는 알아도 대응할 수 없는 최속의 공격이다. 게다가 저 망토는ㅡ 유진의 기예에 최적화되어 있다.
월광검.
멸망의 빛이 번개가 되었다. 소리마저 아득히 따돌리며 쏘아진 일격이 망령의 몸을 꿰뚫었다.
똑같은 멸망의 마력, 일 텐데. 섞이지 않았다. 오히려 닿는 순간에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이유는 알고 있다. 저 검의 달빛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너무 많은 것이 섞여 있다. 저, 검은. 이제는 멸망의 검이 아니라 유진의 검이 되었다.
ㅡ콰르르르! 뒤늦게 찾아온 소리. 수백 줄기로 흩어진 월광이 회오리를 만들었다. 이 기술 역시 망령은 알고 있다. 사이클론에서 연계되는 무한연옥. 빨려 들어간 순간 수백 개의 참격이 전신을 도륙 낼 것이다.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는 와중, 마검이 마력을 내뿜었다. 똑같은 기술. 마력이 만들어내는 참격의 회오리가, 유진의 무한연옥을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려고 했다.
실패했다. 마력을 더 증폭시켜 보았지만, 결국 무한연옥이 완성되었다. 잡아먹히는 팔을 포기하고 뒤로 발을 끈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역수로 쥔 성검이 땅을 긁으며 위로 솟구쳤다.
‘드래곤버스트.’
빛이 번쩍하고 터졌다. 망령의 몸이 둘로 갈라졌다. 처음부터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해버리니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의 완성도에서 차이가 너무 커.’
망령도 나름대로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간극이 너무나도 넓다. 망령은 갈라진 곳에서부터 재가 되어 사라지는 몸을 수습하며 뒤로 뛰어올랐다.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면 무조건 내가 진다.’
이 조건에서 망령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지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멸망의 화신인 그의 마력은 끝이 없으며, 불사력은 마왕 이상이다.
하지만.
‘절대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성검은 마왕에게조차 닿는다. 유진의 것으로 변질된 월광검은 무한한 마왕의 마력마저 깎아낸다. 그리고, 전쟁신의, 용사의 신검은ㅡ 마왕의 불사력마저도 끊어낸다.
확실히 알았다.
전쟁신 아가로트. 우둔한 하멜. 그리고, 용사 유진 라이언하트.
몇 번의 전생을 거치며, 저물어버린 시대에서부터 전승된 것.
그 모든 것은, ‘지금’의 유진 라이언하트를 마왕살해에 최적화시켰다. 지금의 유진은 전생의 그 누구보다도 마왕에 대한 살의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마왕살해에 특화시켰다.
지금의 유진이라면, 과거에 존재하고 죽었던 그 어떤 마왕조차도 능히 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존재하고 죽었던.
“부족하다.”
망령이 내뱉었다. 과거의 마왕을 몇 번이나 죽이건, 그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과거에 단 한 번도 살해된 적이 없는 마왕을 죽이는 것이다.
운명의 반복을 지켜보며 인과를 엮은, 간수이자 죄인이며 마왕인 자.
몇 번이나 세상을 멸망시켜 온, 같은 마왕의 이해조차 아득히 벗어난 초상현상.
“과연, 넌 강하다.”
육체의 붕괴가 멈췄다.
“하지만 이 정도의 강함으로는 안 돼.”
유폐의 마왕을 통해 많은 진실을 알았다. 그 고약하기 짝이 없는 마왕은, 운명의 반복에 망령을 변수로 써보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너란 존재를 인정하마.
-네가 특별하고, 다음에는 존재하지 않을, 지금에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란 것을.
이해했다. 혼란스럽지만, 억지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망령은, ‘하멜’을 위한 답을 갈구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유폐의 마왕의 의지가 되기 전, 망령의 의지가 되기 전. 가장 먼저 의지로 바란 자가 있음을.
베르무트.
“부족해.”
망령의 답은 바뀌지 않는다.
나를 죽일 수 없다면.
나보다 약하다면.
이번 세계는 여기서 끝내는 것이 옳다.
망령의 기색이 바뀌었다. 마구잡이로 일렁거리던 멸망의 마력이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이 뭔 개소리를 하는 것인가 싶었던 유진은, 마력의 형상을 보고서 움직임을 멈췄다.
마력이 불꽃처럼 일렁거린다.
서서히 불길이 강해진다.
마력이, 회색의 불꽃이 되었다.
“……개새끼가.”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회색 불꽃이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