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Husband Hates Me, But He Lost His Memories RAW novel - Chapter 128
128
편지를 보낸다는 말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릴리는 정말로 편지를 보내왔다. 그것도 제법 꾸준히.
자신이 그 모든 편지에 답장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편지가 도착했다.
그런 식으로, 테오도르는 릴리와 서신 상의 교류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브리안의 특산품인 벌꿀을 보낼 테니 먹어 봐요. 따뜻한 차에 타서 마시면 숙면에 도움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저도 조만간 선물을 골라 보내겠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거든…….
편지의 내용은 주로 일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잘 지내느냐, 요새 잠은 잘 자고 있느냐, 식사는 잘 하느냐,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
심각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아주 단순하고 일상적인 편지 교류일 뿐이었지만, 테오도르는 언제나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하늘이 흐린 것으로 보아 내일은 새벽부터 비가 올 것 같군요. 기온이 떨어질 듯하니 감기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예전에는 툭하면 감기에 걸렸지만 요새는 잘 안 걸려요. 많이 건강해진 덕분인 것 같아요. 당신이야말로, 그 회복력을 너무 과신하지 말고…….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했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게.
어쩌면 이미 죽어 꿈을 꾸는 게 아닐까. 하지만 꿈이라기엔 모든 게 너무도 선명한데.
그리고 그녀가 전에 말했던가. 죽으면 꿈을 꿀 수 없다고.
“…….”
설핏 웃은 테오도르가 릴리의 편지에 입을 맞추었다. 이 편지에 실려온 그녀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땅이 녹고 겨울이 물러난 세상은, 완연한 봄기운으로 물들어 있었다.
* * *
예전 일을 언급하는 건 여전히 조심스럽네요. 그래도 궁금하니 물어보는 수밖에.
테오도르, 당신이 나에게 선물했던 페리도트 목걸이를 기억해요?
그때 그 목걸이를 왜 나에게 선물했던 건가요?
사실 이유를 알 것 같지만, 그때 당신이 어떤 심경이었는지가 자세히 듣고 싶어요.
회신과 함께 그 목걸이를 저에게 보내주세요.
언젠가, 당신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그때 제가 그 목걸이를 당신에게 돌려보낼게요.
* * *
벌써 4주쯤 되었나?
테오도르와 편지로 교류한 지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에서도 그는 예민하고, 신중하며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재미있어서, 그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아주 열심히 단어를 고르고, 또 여러 번 퇴고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의 편지를 받는 상대를…… 나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가 역력히 티가 났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자작님, 요새도 그 꿈을 꾸세요?”
“응? 아아……. 가끔.”
머리를 빗겨 주던 샬롯이 넌지시 물어 왔다. ‘그 꿈’이란, 테오도르와 나의 딸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오는 꿈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종종 그 꿈을 꾸곤 했고, 그 사실을 샬롯에게만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샬롯은 무척 신기해하며 ‘예지몽이 아닐까요?’ 하는 추측을 내어놓았고, 나는 그저 웃음으로 넘길 따름이었다.
예지몽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니까.
“다 됐어요, 자작님. 이제 보석함을 가져올까요?”
“응, 그러렴.”
샬롯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느샌가 내 머리는 단정하게 땋아올려져 있었다.
샬롯은 거울 속 나와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더니 잠시 후 보석함을 들고 돌아왔다.
뚜껑을 열자, 익숙한 목걸이 하나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내게 보내준 페리도트 목걸이였다.
“…….”
나는 그 목걸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당신에게 이 목걸이를 돌려보낼 날이 올까?
“어떤 보석으로 하시겠어요? 오늘 옷에는…… 이 루비가 가장 괜찮아 보이는데.”
“그래, 그걸로 하자.”
내가 빠르게 수긍하자 샬롯은 신이 나서 루비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내 목에 조심스럽게 걸어 주었다. 다음으로는 같은 디자인의 귀걸이였다. 역시나 붉은 루비로 장식되어 있었다.
“역시 자작님은 무슨 색이든 다 잘 어울리신다니까요? 다음에는 아콰마린 세트를 해 보시는 게 어때요? 그것도 분명 잘 어울리실 거예요!”
샬롯은 예나 지금이나 나를 꾸미는 데 열성이었다. 샬롯의 주장에 따르면, 예쁜 사람을 더욱 예쁘게 꾸미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나…….
여하튼, 치장을 마친 뒤 나는 샬롯과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마침 나를 발견한 집사가 꾸벅 묵례하며 말을 전해 왔다.
“손님들께서는 응접실에 계십니다.”
“그래, 별다른 일은 없었고?”
“델라크루아 공작 영애께서 저희 주방장의 신작 쿠키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 하십니다.”
그 말에 도리 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집사의 곁을 지나쳐 가며 즐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거참 다행이군. 손님들께서 돌아가실 때 선물로 포장해 드리도록.”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고서 응접실에 도착해 보니,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델라크루아 남매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또 시답지 않은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글쎄, 오빠는 체스에 재능이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오빠가 언니를 체스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니까? 그냥 포기해!”
“내가 체스로 누님을 이기면 지겨운 맞선을 그만 보게 해주시겠다잖아. 난 꼭 체스로 누님을 이겨야 해. 그래야…….”
“앗, 릴리! 언제 왔어요?”
뒤늦게 나를 발견한 두 사람이 똑 닮은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로제는 곧 살갑게 인사를 건네 왔지만, 젠은 왜인지 굳어 있더니 별안간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리, 릴리, 그, 맞선이니 하는 건 말이죠, 제 누님이 멋대로―”
“그러고 보니 젠은 아직 약혼을 안 했네요? 서둘러야 하지 않아요?”
못내 의아해하며 묻자니, 젠은 어째선지 울상을 지었다. 그런 젠의 옆에서 로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울먹이는 젠과 박장대소하는 로제. 나는 두 사람의 반응을 좀처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어색하게 웃으며 일단 자리에 앉을 따름이었다.
로제는 숨을 헐떡일 정도로 격하게 웃더니, 이내 눈물을 쏙 빼며 중얼거렸다.
“아, 웃겨 죽겠어요. 우리 오빠 표정 좀 봐. 푸하하! 내가 의리로 이 얘긴 언니한테 안 한다. 고맙지, 오빠?”
“……그래, 참 고맙다.”
잘은 몰라도 가족끼리의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려니 한 나는 시녀를 불러 따뜻한 새 차를 내어오라 명했다. 그러고서 젠과 로제를 향해 여상하게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두 사람, 그동안 잘 지냈어요?”
젠과 로제는 한참을 나와 떠들고 놀다가 오후 3시쯤 되어서 떠나갔다. 내내 즐거운 분위기였지만, 젠이 다소 풀이 죽은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도 결혼을 서둘러야 하는 나이이니 아마 그와 관련한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내가 나서는 것은 괜한 참견이었다. 당사자인 젠과 델라크루아 가문이 알아서 할 테지.
‘그럼, 이제 슬슬…….’
젠과 로제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길.
업무는 아침에 전부 끝내 두었으니, 한가한 김에 서재로 가서 책이나 읽을까 하는데…….
“자작님! 그, 급보입니다! 네일로 부인께서……!”
예상치 못한 소식이 갑작스럽게 날아들었다.
* * *
“오셨구려. 아렌델 자작님.”
곧 꺼질 듯이 희미한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네일로 부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네일로 부인이 날 향해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늘 그렇듯, 그녀에게서는 노인의 품위와 온화함이 느껴졌다.
임종이 다가오는 이 순간조차, 세실리아 네일로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멀쩡했는데 말입니다. 이거 참…… 우리 바깥양반이 나를 일찍 데려가려고 그러는지…….”
방 한편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네일로 부인을 위해 며칠 휴가를 냈던 내 보좌관도 있었다.
늘 각 잡힌 자세로 빠릿빠릿하게 일하던 보좌관이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흐느끼고 있는 모습은, 나를 자못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네일로 부인은 그의, 그와 형제들의 어머니이고, 그들이 낳은 손주들의 할머니이니까.
그녀가 얼마나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는지를,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녀를 무척 존경하고, 또 몹시 깊은 정이 들었으므로.
때로는 ‘할머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래서 나 역시,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내가 아렌델 자작님까지 울리는구먼. 울지 마시오, 자작님.”
“……네일로 부인.”
“사람이 때가 되면 다 떠나는 법이지. 별수 있나.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다오. 다, 언젠가는 세상과 이별하게 되는 것이지.”
네일로 부인은 설핏 웃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말이지요, 사실 조금은 억울했다오. 세상사가 참…… 공평하지가 않으니. 나쁜 사람은 천수를 누리며 오래 살고, 착한 사람들은 일찍 세상을 뜨지. 우리 남편도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너무 이른 나이에 요절해 버렸지…….”
“…….”
“그래서 실은…… 크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여태 아렌델 자작님을 내심 많이 존경했다오. 자작님은, 그냥 보면 내 딸 같고 그런데, 나쁜 사람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대단한 일을 해냈단 말이지.”
껄껄 웃던 네일로 부인이 잠시 호흡이 곤란해진 듯 기침을 토했다. 의사가 황급히 다가가 처치해 주자 조금이나마 나아졌지만, 안색은 아까보다 훨씬 창백하게 변했다.
“아무튼…… 아렌델 자작님.”
“……예, 네일로 부인.”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참으려 해도 자꾸만 솟아오르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렇게 여리고 젊은 사람이…… 정말 고생이 많으셨소.”
“…….”
“내가 살아보니…… 인생은 뭐 대단한 게 없더이다. 그저 사는 동안 곁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오래 행복해야 한다오. 외롭지 말고, 오래오래 행복하시게. 꼭 그래야 해.”
“……꼭 그럴게요. 감사해요, 네일로 부인.”
이어서 네일로 부인은 그녀의 가족들과도 긴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드는 듯하더니…….
이후로 한 시간쯤 더 지나 숨을 거두었다.
아주 평화롭고 고요한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