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5_6
“그런데, 그럼 안 되나요?”
“…….”
이번에는 테오도르의 입이 다물렸다.
테오도르는 순간 멍해져서 말을 잃고 말았다.
“벤야민 님과 대화를 나누는 게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안 될 것은 없었다.
“그러니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그녀의 대답이 너무나 논리적이어서, 테오도르는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유치하게 성질을 냈다.
“이 황궁이 모두 내 것인데, 내가 왜 비켜야 하지?”
“그럼 저희가 비키지요.”
이번에는 벤야민이 그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답하며, 이브의 어깨를 슬며시 감싸 쥐었다.
그녀의 어깨에 닿는 벤야민의 손을 보자, 테오도르의 가슴 안쪽에서 불길이 화르르 치솟았다.
“감히, 근무 시간 도중에 어딜 가려고…….”
테오도르가 결코 보내 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그들을 막아서며 스산하게 중얼거릴 때였다.
“테오!”
멀리서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눈치 없이 들려왔다.
“약혼녀분께서 찾으시는 것 같습니다, 폐하. 어서 가 보셔야지요.”
이브가 어서 카타리나에게 가 보라고 테오도르를 재촉했다.
이에 벤야민이 피식 웃었다.
테오도르는 분명 아무런 의미도 없을 그 웃음이 이상하게도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만 느껴져 불쾌했다.
두 사람은 테오도르를 두고 휘리릭 떠나 버렸다.
“폐하, 갑자기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사라지시면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테오도르는 괜히 뒤늦게 나타난 카타리나에게 성질을 버럭 냈다.
“정말로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꿍꿍이가 있어서 이브 로웰린을 내게 보낸 게 맞나?”
“네?”
그가 화를 내는 영문을 알지 못하는 카타리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반문했다.
“꿍꿍이가 있어서 보낸 거라면, 왜 다시 데려가려고…… 아니야, 됐어.”
테오도르는 홱 몸을 돌리며 반대편으로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테오도르는 한동안 계속 생각에 잠겼다.
카타리나는 벤야민 페르디난트에게 좋지 않은 의도가 있어 제게 이브 로웰린을 보낸 것이라 주장했다.
썩 믿기지 않았으나, 그녀에게서 발견된 흑마법의 흔적이 이를 뒷받침하였다.
그렇지만 조금 전 보았던 벤야민은…… 어떻게든 그녀를 다시 데려가고 싶어 하였다. 꼭 설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지? 꿍꿍이가 있어 내게 보낸 거라면 굳이 설득까지 해 가며 그녀를 데려가는 게 앞뒤가 안 맞지 않나?
테오도르는 문가에 딱딱하게 서 있는 이브 로웰린을 흘깃 쳐다보았다.
카타리나가 돌아간 뒤에야, 다시 나타난 그녀는 내내 저렇게 경직된 채로 문가에 서 있었다.
제가 없는 동안 그 남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 남자가 또 보금자리 운운하며 그녀를 꼬여내려 했을까?
조금 전의 그녀는 그 남자에게 무슨 대답을 하려 했던 걸까?
“그 남자는 그다지 좋은 남자가 아닌 것 같군.”
테오도르는 불쑥 벤야민의 흉을 보았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말이야.”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주장이었다. 자신의 꿍꿍이를 위해 연인을 황궁으로 보낸 남자가 아닌가.
“네.”
그러나 이 건방진 호위는 그녀를 위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몹시 무심하고 짤막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제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는 이보네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화가 났다.
“설마 사직을 한다는 것도 그놈이 종용한 건 아니겠지?”
생각 없이 튀어나온 물음이었으나, 스스로 여기기에도 꽤나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그래, 이브 로웰린은 나를 좋아하잖아.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한 눈으로 보았잖아.
어쩌면 벤야민은 자신의 꿍꿍이를 완성하기 위해 저 여자를 보냈다가, 저 여자가 나를 좋아하게 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걸지도 몰라.
그래서 이제 와 그녀를 다시 데려가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내내 거슬리던 퍼즐 조각이 온전히 딱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이브 로웰린은 유독 딱딱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답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냄새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체향이 아닌 마력의 기운이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른 이들은 서로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손목 부근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던 벤야민의 마력 냄새가, 이제는 그녀의 온몸에서 진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자와 한 몸이라도 된 것 같은 짙은 냄새에 테오도르는 속이 뒤틀렸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만큼이나 냄새가 짙어진 거지?’
테오도르가 알기로 이만큼이나 향이 짙어지려면…….
‘아니. 아닐 거야.’
그는 애써 떠오른 가정을 지워 냈다. 생각만으로도 불쾌했다.
‘그저 긴 대화라도 나눈 거겠지. 어쩌면 그 새끼가 일부러 나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냄새를 남겼을지도 모르고.’
테오도르는 더 이상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이브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저 눈동자가 다른 남자를 담았다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났다.
문득 그는 그녀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눈, 코, 입…… 이목구비가 모두 참 예뻤다. 당연했다. 이보네를 닮았으니까.
‘아니야. 이보네가 자랐더라면 분명 더 예뻤을 거야.’
그는 잠시간 제 오랜 기억 속 어린 이보네를 떠올려 보았다.
처음 본 순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길 수 있나’ 하고 감탄했던 그 예쁜 얼굴을…….
‘이보네였다면 틀림없이 저 여자보다 훨씬 더…….’
그러나 막상 그의 상상 속에서 그려 본 이보네의 자란 모습은, 빌어먹게도 저 여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벌떡!
테오도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미쳐 버린 게 아닐까?
페르디난트가 나에게 술법이라도 건 건가?
그게 아니라면 대체 이 감정은 뭐지?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할 수 없어 이브 로웰린을 그 안에 남겨 둔 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나는 나무 위에 앉아 벤야민과 함께 불 켜진 테오도르의 침실을 보았다.
나도 이제 그의 마음을 모르겠다.
화를 냈다가, 괴롭혔다가, 경멸했다가, 집착했다가, 또 화를 냈다가…….
‘애초에 정상인이 또라이를 이해하려고 하는 게 잘못이지, 뭐.’
어차피 떠나고 나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이였다.
그래도 오늘 카타리나가 방문한 덕분에 벤야민을 만나 남은 계획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나의 사직서를 수리할 생각이 없었고, 나는 그를 피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완벽한 죽음과 함께.
역시 누가 뭐라 해도 눈앞에서 죽는 게 가장 확실하지 않겠나.
물론 테오도르의 눈을 속이는 건 어려울 테니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음을 위장할 것이다.
한편으론 오래전 이보네 체르니시아의 죽음으로 괴로워했던 그에게 다시 한번 제 죽음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비록 내가 사랑했던 테오도르와 달리 이 인성이 파탄 난 기억 잃은 테오도르는 내 죽음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 * *
테오도르와 카타리나의 약혼식 하루 전날, 황궁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에른스트를 찾아갔다. 미안하지만 에른스트도 내가 속여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어? 이보네?”
나를 발견한 에른스트가 놀라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왜?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이상하네…….”
에른스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방금 테오도르 형님을 찾아갔는데, 네가 지금쯤 내일 카타리나 양을 호위하는 일로 황궁 밖에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에른스트를 빤히 쳐다봤다.
이 거짓말 못 하고 순진한 녀석에게 도주 사실을 알렸다가 혹여나 테오도르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체르니시아에서 온 연락은 없었어?”
나는 그를 찾아온 목적이 이것인 양 물었다.
“응……. 그런데 이브, 정말 나랑 같이 안 떠날래? 그 허락을 받아 내려고 테오도르 형님을 찾았거든.”
에른스트가 내 아랫배를 힐끔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황궁에 계속 남아 일을 할 순 없잖아.”
“그래, 네 말이 맞아. 아기는 금방 태어나고 또 자라며 손이 많이 가겠지.”
“그러니까 나랑 같이 나가자.”
고맙게도 그는 더 이상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따위의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만 함께 황궁을 나가자고 재차 제안했다.
“그래서, 폐하의 허락은 받아 냈어?”
“아니…….”
나의 물음에 에른스트가 울적한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테오도르 형님은 성격이 더 이상해진 것 같아. 황궁을 나갈 때 너를 데리고 나가고 싶다 했더니, 갑자기 화를 내면서 나를 쫓아내잖아.”
“폐하의 성격이 이상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하지만…….”
“폐하가 허락해 주질 않는데 어떻게 여길 나가겠어.”
담담하게 대꾸하자 그가 나보다 더 분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조심해야 하는 때인데, 그 여자의 호위를 하라니.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를 대신해 화를 내주는 그의 모습에 나는 짧은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그냥, 고마워서.”
이게 웃을 일이냐며 비난하는 듯한 말투에도 나는 그저 그가 고마웠다.
그리고 동시에 미안했다.
이 눈물 많은 친구는 왠지 내 죽음에 정말 많이 슬퍼할 것 같아서…….
에른스트는 울보니까…….
“에른스트. 내가 없어도 잘 살아야 해.”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영영 헤어질 사람처럼 말하지 말라며 입술을 삐죽였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인사라는 걸, 에른스트는 알까.
약혼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지만 테오도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정무를 보았다.
에른스트에게 혼자만의 작별의 인사를 건넨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왜 네가 있는 거지?”
그가 의아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전에 카타리나 양을 호위하러 황궁을 나선 게 아니었나?”
“그랬는데 잠깐 잊은 게 있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혹여나 그가 나를 쫓아낼까 봐,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카타리나 양의 호위에는 문제없도록 하겠습니다. 주무실 때까지만 옆에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덧붙이는 내 얼굴 위로 쓴웃음이 번졌다.
“……오늘은 그 새끼의 냄새가 나지 않는군.”
테오도르는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나한테서 냄새가 나나?
비록 그가 날 기억하지 못하고 경멸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기억은 좋은 모습으로 남기고 싶었다. 안 좋은 냄새라도 나면 큰일이다.
나는 괜히 내 옷깃을 킁킁거려 보았으나, 딱히 무슨 냄새가 나는 건진 잘 모르겠다.
“그래. 내가 일을 마칠 때까지 여기 있도록 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그가 퍽 관대한 아량을 베풀며 말했다.
그런데 그는 도무지 일을 끝내지 않았다. 서서히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이러다 너무 시간이 늦어지면, 황궁을 탈출할 때를 놓칠 것이다.
“내일 중요한 일도 있는데, 오늘은 일찍 주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괜히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탁-! 소리 나게 서류를 덮었다.
“옆에서 종알거리는 소리에 집중이 하나도 안 되는군.”
“저 때문이 아니라 내일 약혼식을 앞두고 계셔서 마음이 들뜬 탓이겠지요.”
“…….”
테오도르는 나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그를 침실까지 호위하고 이만 돌아서려는 때였다.
“기다려.”
그가 나를 붙잡았다.
“아직 안 잘 거야.”
그는 고집스럽게 말하며 술을 내오라 했다.
시종을 시키면 될 일을 굳이 내게 시키는 심술이 참 그다웠다.
술이 동날 때마다 그것을 새로 내오는데, 양이 퍽 과했다.
“약혼식을 하루 앞둔 남자가 저래도 되는 건가.”
“뭐, 그만큼 기분이 좋으신가 보지.”
복도에 있던 기사들이 혀를 쯧쯧 차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는 원래 술을 좋아하시잖아.”
“폐하가 술을 좋아하신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되묻자 그들이 내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 이브 경은 몰랐겠네. 하긴, 이브 경이 들어온 이후로 술을 뚝 끊으셨지?”
“폐하는 원래 매일같이 술을 안 마시면 잠들지도 못할 정도였는걸.”
“…….”
나는 다시 만난 테오도르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그가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그가 기억을 잃은 뒤였다.
새삼 신기했다.
쓰레기 같은 인성과 더불어 술 마시는 습관까지 꼭꼭 숨길 만큼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해 주었던 기억을 잃기 전의 테오도르를 떠올리자 흐릿한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새 술병을 들고 돌아왔는데, 그는 테이블 위에 고개를 박고서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잠이 든 그는 더 이상 나를 노려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나를 사랑하는 눈으로 보지도 않았고, 그 다정한 목소리로 밀어를 속삭여 주지도 않았다.
나는 문득 마음이 아파서 울었다.
‘내가 사랑했던 테오도르는 더 이상 세상에 없잖아.’
그 사실이, 그다지도 서러웠다.
‘있지, 테오.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네가 기억을 찾는다면……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언젠가 기억을 되찾을 테오도르는……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로 그 테오도르일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떠나고 나서도 나는 잘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 친구와 다시 만나, 내가 그를 사랑했던 시간은 고작 반년 남짓.
그렇지만 그는, 기억을 되찾을 그는 1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나를 잊지 못해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 기나긴 시간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나를 좋아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나의 죽음이 되풀이되는 것은 너무 잔인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고, 그렇지만 한편으론 기억을 되찾을 그에게 나의 존재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알아서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이미 카타리나라는 새 연인이 생겼다. 아니, 그녀는 아마 그에게 단순한 연인을 넘어 인생의 동반자가 되리라.
그 여자의 배 속에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가족이 될 아이가.
나의 존재는 결국 그에게 혼란, 그 외엔 무엇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안녕, 테오…….”
내가 이 순간 눈물을 흘리는 건 나를 경멸하고 증오하던 테오도르가 아닌, 내가 한때 사랑했던 착하고 상냥한 어린 날의 비밀 친구 때문이었다.
이제 영영 다시 만날 일 없는, 기억 속에 묻혀 버린 나의 테오.
네가 내게 남긴 흔적은 모두 하나씩 지워 낼 테야. 그러니 너도 나를 잊어. 차라리 영영 잊어버려.
“왜 울고 있지?”
머리 위로 목소리 한 자락이 떨어졌다.
흐릿한 시야를 닦아 내니, 그가 일어나 있었다. 그사이 술이 좀 깼나 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계속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내게 화를 내던 테오도르마저도 소리 없이 우는 내 모습에 멈칫했다.
“몸이 아직 안 좋은 건가?”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그의 걱정이 좋아서 흐리게 웃으며 훌쩍였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독설이 날아왔다.
“질질 짜려거든 나가 울어. 듣기 싫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곧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 겁니다.”
그러니 너무 뭐라 하지 마, 테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나는 차마 그에게 전하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삼켜냈다.
모든 걸 놓아 버린 탓인지, 이런 상황에서도 그저 웃음만 피식피식 나왔다.
“사라져?”
그러나 테오도르는 웃지 않았다. 그는 흉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벤야민 페르디난트에게 가려고?”
“아니요.”
순간 그에게 들킨 건가 싶어 뜨끔했으나, 곧바로 태연한 거짓을 답했다.
테오도르는 내 말의 진의라도 파악하듯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나를 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 벤야민 페르디난트 때문이 아니라면 갑자기 호위 일은 왜 그만두겠다는 거지? 몸도 괜찮다며?”
“애초에 폐하를 호위하는 일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억지로 끌고 오시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널 끌고 왔다고?”
그가 믿기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네, 페르디난트에 방문하셨다가 기사로서의 저의 재능을 알아보셨다며 데려오셨잖아요.”
“……이브 로웰린.”
그가 이를 악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널 볼 때마다 유독 머리가 아파. 기분이 나빠져.”
“네, 네. 그러시겠지요.”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건성으로 대답하지 마.”
그러자 무엇이 그리도 그의 신경을 건드린 건지, 그가 내 턱을 움켜쥐며 제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 안에 갇혀 있는 내 잔상을 발견한 순간, 나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무슨 짓이야!”
그 짧은 입맞춤에도 테오도르는 버럭 화를 냈다.
“폐하도 전에 저한테 멋대로 입을 맞추셨잖아요.”
“너와 내가 같다고 생각하나?”
그가 씩씩거리며 내게 쏘아붙였다.
어쩌면 이 순간이 그에게 보이는 마지막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저와 폐하는 다르지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그러자 테오도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
“…….”
짧은 정적과 함께 민망함이 밀려왔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편히 주무세요.”
이제는 정말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돌연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채며 입을 맞춰 왔다.
“……!”
순간 놀라 숨을 홉 참는 사이.
그의 입술이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붙었다.
이제껏 내가 그를 알아 온 모든 시간 속에서도 한 번도 없었던 깊고 격한 입맞춤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그의 입맞춤에 호응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 퍼붓는 뜨거운 입맞춤 속에서 나는 등에 닿는 폭신한 것이 침대 시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가 테오도르라는 것도 함께.
굵은 손바닥이 내 얼굴을 스치고,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와 내가 입은 셔츠의 단추를 툭 건드렸다.
흠칫.
나는 양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안 돼요.”
“돼.”
다시 다가오려는 그를 향해, 나는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는…… 내일 카타리나 양과 약혼을 하잖아요.”
“그래서?”
마치 인성을 말아먹은 듯한 뻔뻔한 답변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 그럼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과…….”
“내일이면 약혼할 남자한테 먼저 입을 맞춘 건 너잖아.”
“저와 폐하는 다르잖아요? 제가 들이대도 폐하는 거절해야 맞잖아요.”
“내가, 왜?”
“아니, 그, 연인 간에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게 있고…….”
“그딴 거 몰라.”
“…….”
와, 얘는 정말…… 안 될 애로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테오도르가 기억을 잃은 건, 어쩌면…… 체르니시아의 조상신들이 날 도운 걸지도 모른다고.
카타리나가 다시 한번 더 불쌍해졌다.
“저는 폐하의 정부가 되고 싶지 않아요.”
“누가, 너 따위를?”
그가 코웃음을 치며 내게 몸을 붙였다.
“하룻밤 여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이번에는 그의 눈썹이 험악하게 치솟았다.
“벤야민 페르디난트에게는 그렇게 쉽게 내어 줬으면서.”
“내어 주다니요? 뭘요?”
“시치미 떼지 마.”
테오도르의 입술이 내 살갗을 훑었다.
“카타리나 양은 폐하의 아이를 가졌어요.”
“아까부터 계속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군.”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하지.”
테오도르는 무심하게 답하며 내게 집중했다. 그러나 이다음에 흘려보낸 나의 질문이 그를 처음으로 멈추게 했다.
“그럼 저는요?”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여자와 이런 짓도 해요?”
“뭐 어때.”
“만약 제가 폐하의 아이라도 가지게 되면 어떡하시려고.”
“그럴 일은 없어.”
“모르는 거잖아요. 혹시나.”
“…….”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소 짧지만은 않았던 고민의 끝에 그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 손으로 거두어야겠지.”
그의 웃는 얼굴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해졌다.
기억을 잃은 뒤의 그는 어지간해서는 내 앞에서 웃지 않았다. 나를 괴롭힐 때를 제외하고는.
“……거둔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글쎄.”
숨을 꿀꺽 참고 묻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게 무슨 뜻일 거 같아?”
나는 주춤거리며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설마…….”
차마 그 뒷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너무 끔찍해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댔다.
그러니까…… 내 아기를 위협하는 건 카타리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는 해도 되는 행동과 하면 안 되는 행동이 있어요.”
나도 모르게 아랫배를 감싸며 쏘아붙이자, 그의 두 눈이 가늘게 접혔다.
“나한텐 그런 거 없어.”
테오도르가 그 어느 때보다 예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더 이상 그를 피할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괜한 걱정은 집어치우고…….”
퍽-!
그의 고개가 푹 꺾이며 옆으로 쓰러졌다.
내 손에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던 흰 베개와 함께 은은한 녹색의 빛무리가 감돌고 있었다.
검기를 실은 베개에 머리를 얻어맞은 그는 기절하여 잠든 채였다.
검기를 사용한 반작용인지 가슴 부근에서 아랫배까지 이어진 몸속의 혈관이 강하게 조이는 것 같았다.
“미안, 미안해, 아기야…….”
나는 기절한 테오도르를 내버려 두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내가 사랑했던 내 남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쓰레기였다.
다시 쓸 수 없는 인성 파탄자, 인간쓰레기.
나는 그대로 황궁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