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7_1
6. 미친 황제와 아르벨라의 마녀
테오도르가 서쪽 대륙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나는 벤야민에게 제국을 떠날 것이라 선언했다.
“테오도르 황제가 없는 지금이 기회야.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황제가 자리를 비울지 알 수 없잖아.”
“하지만…… 네가 말한 곳은 너무 멀어.”
“그러니까 황제로부터 더 안전하겠지.”
“…….”
벤야민은 내가 그의 저택을 떠나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네가 정착할 만한 장소를 내가 물색할게. 페르디난트의 자금이라면 충분히…….”
끝내 내 고집을 꺾지 못한 그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라도 내게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괜찮아, 벤야민. 내가 할 수 있어.”
그러나 나는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네가 무슨 수로?’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벤야민을 향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 돈 많아.”
황궁을 떠날 때, 나는 결코 맨몸으로 나오지 않았다.
테오도르와 연인으로 지냈던 반년.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내게 달콤한 사랑의 밀어와 함께 갖은 보물들을 선물하곤 했다.
나는 그중에서 크기가 작고 가벼우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미리 챙겼다.
개중에는 알브레히트 황실의 국보급 보물도 있었다.
‘내가 훔치거나 빼앗은 게 아니라 테오도르가 억지로 안겨 준 거니까…….’
황가의 보물을 처분한다는 사실에 아주 살짝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으나, 아기를 위해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나를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아기를 위해 쓰는 거잖아?’
게다가 배 속의 아기는 무려 알브레히트 황가의 핏줄이지 않은가?
내가 아기를 테오도르의 아기로 키울 생각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아기를 위해서 황가의 보물 몇 개 정도 파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지.’
그렇게 스스로와 합의를 보자 조금 불편했던 마음이 평온해졌다.
나는 테오도르의 선물들을 처분하여 새 보금자리의 정착 자금을 마련했다.
칼리고르 왕국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한 것은 저택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곳에 위치할 것.
둘째, 호수가 보일 것.
셋째, 아기가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정원이 있을 것.
그리고 오래전 어느 몰락한 귀족이 살았다는 아르벨라 영지의 커다란 저택은 내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했다.
그렇게 나는 칼리고르 왕국 내륙에 위치한 호수를 품은 작은 영지 아르벨라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나는 소수의 사용인들까지 두며, 소소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아르벨라는 아주 작은 영지라서, 내가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 영지민들은 낯선 이주민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왕래가 아닌 고요한 평화였다.
무뚝뚝한 응대에 차츰 시큰둥한 저택의 여주인에 대한 소문들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대다수가 저택에 남자가 필요하니 어쩌니 하며 임산부에게 치근덕대는 몰염치한 작자들이었다.
부러 자제하던 검기를 소폭 끌어내 겁을 주고 쫓아내었더니, 괜히 마녀라는 소문만 돌았다.
“저 호수 앞 저택에 마녀가 산다고…….”
“예쁜 얼굴로 사람을 홀려서 잡아먹는다는데…….”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무덤가에 가서 시체와 춤을…….”
나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헛소문들에 어이가 없었다.
과거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녔던 테오도르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소문들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접근하는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오랫동안 바라던 안온한 삶이었다.
테오도르의 선물을 처분한 돈은 액수가 커서 저택을 구입하고도 풍족한 재산이 남았다.
덕분에 알브레히트와 멀리 떨어진 이곳 아르벨라 영지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낳았다.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
태어난 아기는 쌍둥이였다.
어쩐지.
배 속에 품고 있었을 때부터 유독 태동이 크고, 허리가 아프더라니.
[틀림없어요, 주인님! 배 속의 아기님은 남자아이예요!] [왜?] [왜긴요. 저는 이렇게 배 속에서부터 큰 아기는 본 적이 없다고요.]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호숫가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물에 빠질 뻔한 걸 구해 준 뒤로 얼결에 저택의 사용인이 된 로라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로라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지만, 어릴 적부터 산파였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임산부를 많이 만나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처럼 배가 많이 부른 임산부는 처음이라고 매번 신기해했다.
[큰 여자아이일 수도 있잖아?] [주인님은 여자아이가 더 좋으세요?] [음…….]고개를 갸웃하며 태어날 아기를 상상해 보았다.
‘나를 닮았으면 남자아이여도, 여자아이여도 귀여울 것 같아.’
둘 중 하나를 고르기 힘들어 끙끙 앓던 나를 위해 브리힘 신이 축복을 내려 준 걸까.
“세상에, 주인님! 이것 좀 보세요. 아기님들이 너무 예뻐요!”
로라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나는 갓 태어난 아기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기들은 정말 작아서, 두 아이를 한 팔에 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예뻤다.
‘보통 아기들은 태어나면 쭈글쭈글하고 빨갛다던데…….’
내 아기들이라서 유독 예뻐 보였던 걸까?
태어난 아기들은 처음 본 순간부터 작고, 하얗고, 요정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천사처럼 작고 예쁜 생명들이 내 배에서 나왔다는 게.
“그렇게 보지만 말고 어서 안아 보세요.”
그러다가 로라가 어서 안아 보라고 내게 아기를 안겨 주었을 때.
“아……!”
나는 내 품에 포옥 안기는 그 작고 따스한 온기가 너무 좋아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울음소리에 아기들이 함께 울어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으나, 로라는 이해한다는 듯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한참 뒤, 방 안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로라가 내게 물었다.
“아기님들의 이름은 생각해 두셨나요?”
“응. 남자아이는 에르빈, 여자아이는 오딜리아야.”
남자아이가 태어날지 여자아이가 태어날지 몰라 이름을 두 개나 준비해 두었는데, 잘한 일이었다.
“어쩜 아기님들이 이렇게 주인님을 닮았지요?”
로라의 말마따나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신기할 정도로 나를 닮았다.
에르빈은 은발에 금안을 지녔고 오딜리아는 흑발에 녹안을 지닌 채로 태어났으나, 그 외에 세세한 이목구비가 모두 나를 닮았다.
유독 촘촘한 속눈썹이라든지, 살짝 처진 눈꼬리라든지, 웃을 때면 볼 윗부분에 옴폭 파이는 사랑스러운 보조개와 통통한 아랫입술 같은 게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나는 그 사실이 신기하고, 또 기뻤다.
‘테오도르를 닮지 않아 다행이지.’
아이들을 배 속에 품을 적에 제발 아기가 날 닮게 해 달라고 빌었던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건지도 모른다.
‘부디 인성도 나를 닮아야 할 텐데.’
나는 테오도르가 나의 아기들에게 물려준 것이 에르빈의 황금안과 오딜리아의 흑발뿐이기를 애타게 바랐다.
에르빈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건 오딜리아였다.
나는 막 태어난 오딜리아의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한참 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검은 머리는 아주 희귀했다.
동시에 ‘고대의 어둠’이라 불리는 테네브리스의 상징 색이기도 했다.
알브레히트 제국과 달리 서쪽 대륙에서는 검은색에 대한 경시가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테오도르도 검은 머리 때문에 흉흉한 소문들에 휩싸이기도 했었고…….’
나는 테오도르가 1황자 시절 머리 색을 마법으로 감추었던 게 생각이 났다.
며칠 뒤 벤야민이 찾아왔다.
나는 태어난 아기들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에게 물었다.
“벤야민, 혹시 너의 술법으로 오딜리아의 머리 색을 감출 수 있을까?”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야.”
벤야민에게 나와 에르빈의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아 넘겨주었다.
그러자 벤야민은 아주 손쉽게 오딜리아의 흑발을 은발로 바꾸어 주었다.
곱슬곱슬한 은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오딜리아는 꼭 나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쑥쑥 자랐고, 그렇게 내가 테오도르를 떠난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어느덧 세 살 생일을 지나, 어엿하게 말도 하고 뜀박질도 하는 훌륭한 어린이가 되었다.
* * *
“이고 지쨔(진짜) 리아 주는 고예요?”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그럼! 이건 수도에서 들여온 최고급 가죽과 솜으로 만든…….”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앙증맞은 드래곤 인형을 흔들며 거창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꺄아! 너무 기여워! 뚜래고(드래곤)!”
오딜리아는 남자의 손에 들린 드래곤 인형을 보며 초록색 두 눈을 반짝였다.
아이가 짧은 다리로 방방 뛸 때마다 곱슬거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함께 흔들렸다.
“안 대, 리아.”
에르빈이 옆에서 오딜리아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렸다.
“암꼬나 바두먼 안 대.(아무거나 받으면 안 돼.)”
세 살이 된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자랄수록 점점 더 서로를 닮아 갔다.
본래 리아의 머리카락은 테오도르의 것을 닮은 어두운 흑발이었지만, 벤야민의 술법으로 은색으로 바꾸니 두 아이가 더욱 닮아 보였다.
동성의 쌍둥이도 저렇게 서로 닮기는 힘들 것이라고, 몇 안 되는 사용인들이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하찌만, 리아는 뚜래고 이녕(인형) 갖고 싶은데……!”
오딜리아가 분홍색 드래곤 인형을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심지어 꼬리에 초록색 리본까지 달려 있는 아주 귀여운 드래곤 인형이었다.
“구래도 안 대.”
에르빈이 시큰둥한 눈으로 드래곤 인형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하자, 오딜리아가 울상이 되었다.
이에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섬주섬 무언가를 하나 더 꺼냈다.
“후후, 에르빈을 위한 선물도 여기 있지.”
“……!”
순간 에르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남자가 새로 꺼낸 것은 앙증맞은 앞니와 탐스러운 꼬리를 가진 다람쥐 인형이었다.
“이 다람쥐 인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수도에서 유행하는 연극 에 나오는 주인공 다람쥐 제리코로…….”
게다가 그 다람쥐는 짧은 앞발에 붉은 보석이 박힌 장난감 단검을 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르빈이 다람쥐 인형 앞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했다.
“말도 안 돼. 다랑지 욘짜(용사) 젤리꼬야…….”
“흥, 펑버만(평범한) 다람찌쟈나. 암꼬나 바두먼 안 된다며.”
“젤리꼬는 펑버만 다랑지 아냐!”
“아니긴. 아주 펑버만데. 뚜래고가 뿌우우 하몬 깨애액 죽을 것초롬 샌견는데.”
오딜리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자, 에르빈이 발끈했다.
“아냐! 젤리꼬는 다랑지 욘짜라고! 저 두래고가 더 펑범해!”
근래 들어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슬슬 자기주장이 강해진 터였다.
보통은 사이가 아주 좋았지만, 이따금씩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으로 툭탁툭탁 다투기도 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건 한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그 두 아이가 쌍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나는 최근 그 사실을 여실히 깨닫는 중이었다.
“자자, 둘 다 싸우지 말고. 인형이 갖고 싶니?”
남자는 양손에 각기 드래곤 인형과 다람쥐 인형을 흔들며 아이들을 홀려 댔다.
2층 창가에서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창문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아이고, 주인님……! 계단은 장식으로 있는 게 아니래도요!”
4년이나 함께 지냈으면서도 그런 나의 행동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로라가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렸다.
“데릭,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선물 같은 거 가져오지 말라고 했잖아.”
푸릇푸릇한 잔디 위로 부드럽게 착지한 뒤, 남자를 째릿 노려보며 말했다.
“오, 이브! 나의 천사님! 오늘은 하늘에서 강림하셨습니까!”
남자는 두 손을 기도하듯 꼬옥 모으며 나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데릭은 아르벨라 영주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나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들에도 불구하고 유독 끈질기게 찾아와 구애를 했다.
조금 부유하여 큰 저택에 사용인들까지 거느리고 있다지만, 무려 영주의 아들이 평민 여성에게 구애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하였다.
그러나 칼리고르는 너무나 작은 왕국이라서 귀족과 평민의 경계가 모호한 편이다.
차기 국왕이 될 왕국의 왕자마저도 평민 여자와 비밀 교제를 하고 있다고 은연중에 소문이 나도는 판국이니까.
게다가 그중에서도 이곳 아르벨라는 작디작은 시골 영지라서, 더욱 그 구분이 없었다.
“난 천사가 아니라 마녀라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 못 들었어?”
“당신이 마녀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나의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그는 쓸데없이 성실하고 근면해서, 나의 무서운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찾아왔다.
“네 영혼 같은 건 필요 없어.”
재산이라면 모를까, 저놈의 영혼을 가져서 뭐에 쓴단 말인가.
“그럼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보호자는 어떻습니까?”
“내가 보호잔데, 보호자가 왜 또 필요해?”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점점 더 자랄 텐데,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않을까요?”
“딱히?”
“남자 보호자가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아집니다. 이를테면 함께 다람쥐 용사 놀이를 할 수 있다든지…….”
데릭이 한참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할 때였다.
“벌레가 붙어 있네, 이브.”
데릭의 어깨 너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 한 자락이 들려왔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던 데릭이 소리 없이 나타난 남자를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부스스한 백색의 짧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데릭을 쳐다보고 있었다.
벤야민이었다.
“히익! 이, 이브!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데릭은 화들짝 외치고서는 냅다 줄행랑을 쳤다.
데릭은 이상하게도 벤야민만 보면 유령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달아난다.
벤야민이 딱히 위협적으로 생겼다거나, 험상궂은 외양을 지닌 것도 아닌데 의아한 노릇이다.
“마침 귀찮았는데 고마워.”
나는 벤야민을 향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나를 따라 웃는 대신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도 저런 놈이 옆에 오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애들한테 잘해. 그리고 내가 마녀여도 상관없대.”
나는 데릭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저 정도 성실함이면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아버지가 되어도 잘할 것 같아.”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해?”
벤야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두 눈을 끔뻑였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남자 보호자가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훨씬 많아진대.”
이를테면 다람쥐 용사 놀이라든지…….
“그럼 내가 아버지가 되어 주면 되잖아.”
“넌 안 돼.”
“왜?”
“너는 알브레히트 사람이잖아. 페르디난트의 가주고.”
“그럼 내가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아니면, 그럼 상관없는 거야?”
웃음기 없이 묻는 목소리는 퍽 진지했으며, 나를 쳐다보는 푸른 눈동자는 서늘한 빛깔을 품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그렇다고 답하면 정말로 가주직을 내던지기라도 할 것만 같은, 꼭 그런 얼굴이었다.
“진지하게 묻지 마.”
나는 그의 말을 장난으로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베냐민 삼쫀!(벤야민 삼촌!)”
마침 오딜리아가 드래곤 인형을 들고 벤야민을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안녕, 오딜리아.”
벤야민이 인사를 건넸으나, 오딜리아는 마주 인사하는 대신 그의 팔에 매달리며 씩씩댔다.
“삼쫀, 삼쫀! 에르가 자꾸 두래고(드래곤)보다 다람찌가 더 쎄다고 우겨!”
오딜리아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외쳤다.
그러자 느긋하게 뒤따라온 에르빈이 코웃음을 쳤다.
“이 다랑지는 평버만(평범한) 다랑지 아냐. 다랑지 욘짜(용사) 젤리꼬라고.”
“구래 바짜 다람찌쟈나!(그래 봤자 다람쥐잖아!)”
“다람찌가 아니라 다랑지야. 구리고 젤리꼬는 허접한 두래고 따위 단칼에 베 버리는걸.”
에르빈이 오딜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분홍색 드래곤 인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픽 웃었다.
“뚜, 뚜래고를 베 버려?”
“웅.”
“……!”
오딜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구러니까, 구론 펑버만 두래고보다 젤리꼬가 훠씬 강하단 고야.”
“말도 안 대!”
급기야 오딜리아는 벤야민을 돌아보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베냐민 삼쫀! 삼쫀이 말해 쪼! 다람찌는 뚜래고를 이길 수 엄따고!”
“다람쥐는 드래곤을 이길 수 없어, 에르빈.”
벤야민이 에르빈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젤리꼬는 구냥 다랑지 아냐. 다랑지 욘짜야.”
“……?”
벤야민이 멀뚱멀뚱 눈을 끔뻑이며 에르빈의 손에 들린 다람쥐 인형을 보았다.
그러자 에르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삼쫀…… 다랑지 욘짜 젤리꼬 몬라(몰라)?”
“…….”
벤야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구럼 벤냐민 삼쫀은 다랑지 욘짜 놀이도 같이 몬 타네(못 하네).”
에르빈이 은근히 실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역시…… 벤야민은 페르디난트의 가주란 걸 차치하고서라도,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벤야민에게 흥미가 식은 에르빈은 다람쥐 용사 놀이를 알려 주겠다며 오딜리아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갔다.
“다람쥐 용사 제리코도 모르면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제리코는 대체 누구야?”
벤야민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표정이 어쩐지 우스워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오랜만에 왔네. 한 달 만인가?”
“한 달 하고 열흘 만이야.”
벤야민은 때때로 아르벨라를 찾아와 오딜리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오딜리아의 머리 색이 그의 술식으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더 자주 찾아왔으나, 최근 들어 많이 바빠졌다.
4년 전부터 갑자기 세상에 범람한 마물 탓이었다.
“마물은, 아직도 상황이 안 좋아?”
나는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으응…….”
그러자 벤야민이 투정을 부리듯 내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대며 대답했다.
“정말 짜증 나. 마물들 때문에 자주 찾아오지도 못하고…….”
페르디난트는 과거 마물로부터 세상을 지켰던 3대 가문 중 하나였다.
벤야민은 그 페르디난트의 수장이기에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원래라면 체르니시아도 함께해야 했겠지만…….’
어느덧 응접실에 도착했다. 테이블 위에는 로라가 세팅한 디저트 트레이와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을 감추려고, 달달한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으며 의자에 앉았다.
“너도 조심해, 이브.”
벤야민이 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마물들의 힘이 강해지고 있어.”
“하지만 아직 아르벨라에는 마물들이 나타나지 않았는걸?”
“언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응, 뭐…… 조심할게.”
그의 충고를 건성으로 들으며 대답했다.
나는 오랫동안 페르디난트에 지내면서 진명을 꼭꼭 숨겨 왔다.
때문에 벤야민은 내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도, 검기를 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걱정하는 거겠지.
‘딱히 마물이 나타난다 해도…… 검으로 때려죽이면 되는 거 아냐?’
마물과 직접 맞닥뜨려 본 적은 없지만, 검기를 발현하지 못한 일반 기사들도 대여섯이 모이면 맞설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 들었다.
그다지 위협적이진 않을 것 같았다.
하필 마물이 범람한 때와 테오도르가 미쳤다는 4년 전의 시점이 일치했다.
덕분에 알브레히트 황제가 고대 어둠의 현신이라는 오래전의 괴소문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이 먼 서쪽 대륙까지 흉흉하게 나도는 소문들에 되도록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데에는 체력도 정신력도 많이 소모된다.
테오도르 같은 인간에게 신경을 쏟기에는 나의 아주 작은 시간 하나도 아쉬웠다.
* * *
얼마 뒤.
벤야민이 머무는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데릭은,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다시 나타났다.
“선물입니다, 이브.”
그의 손에 하얀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람쥐 용사 제리코?”
에르빈이 좋아하는 의 공연 초대장이 있었다.
“네, 이브. 이번 주말에 아르벨라 시가지에 공연 팀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좋아할 거예요.”
“티켓이 네 장이나 있는데?”
“네! 아주 구하기 어려운 초대장을 네 장이나 구해 왔지요.”
“흠…… 네 장이라…….”
나는 네 장의 초대장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럼 나랑 에르빈, 리아…… 그리고 한 장이 남으니까…….”
“네, 셋이서 공연을 보면 한 장이 남지요!”
내게 맞장구치는 데릭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로라까지 넷이서 함께 볼 수 있겠어! 고마워, 데릭.”
“아…….”
순간 데릭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눈에 띄는 그의 변화에 나는 두 눈을 뾰족하게 치켜떴다.
“왜 울상이야? 이제 와서 티켓이 아까운 건 아니지?”
는 에르빈이 예전부터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공연이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줬다가 뺏으려는 데릭의 심보가 고약하여 노려보자, 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휴, 그럴 리가요. 모쪼록 즐거운 나들이 하고 오세요.”
그러나 말과 달리 내 손에 들린 네 장의 초대권을 쳐다보는 데릭의 시선이 몹시 집요하고 애달팠다.
나는 그가 말을 바꾸기 전에 재빨리 초대권을 봉투 안에 다시 집어넣으며 방긋 웃었다.
“그래.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네게 고마워할 거야. 돌아올 때 네 선물도 사 올게.”
데릭은 기뻐하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모를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흐흐흐’ 웃었다.
그리고 그 주 주말. 우리는 모처럼 시가지로 나들이를 나갔다.
작년 가을,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생일 이후로 처음 나가는 시가지 나들이였다.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간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리아는 두래고(드래곤) 보고 싶어요!”
“우리가 보러 가는 거 멍총한 두래고 아니고 다랑지 욘짜(용사) 젤리꼬야!”
“뚜래고 멍총이 아니야! 멍총인 에르야!”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마차에 막 올라타면서부터 티격태격 다투기 시작했다.
“리아, 가족에게 그런 나쁜 말은 하면 안 돼.”
“녜. 구론데 에르가 몬저 두래고 멍총하다 했어요.”
오딜리아는 데릭에게 선물받은 핑크색 드래곤 인형을 끌어안으며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잔뜩 심통이 난 모습이 꼭 화가 난 아기 다람쥐처럼 사랑스러웠다.
“에르, 리아가 에르가 한 말 때문에 속상한가 봐.”
“리아, 화나써?”
에르빈이 오딜리아에게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사이, 나는 아이들이 멀미하지 않도록 정방향으로 나란히 앉히고 그 맞은편에 로라와 함께 앉았다.
예전에는 마차보다 말을 더 선호했으나, 아이들을 낳은 이후로는 넓고 편안한 마차를 즐겨 탔다.
호수 저택은 아르벨라에서도 가장 한적하고 외진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시가지까지 나가려면 시간이 조금 걸렸다.
“에르 나빠. 자꾸만 두래고 무시하쟈나. 리아 논니려고(놀리려고) 구러는 고지?”
오딜리아는 드래곤 인형 위로 턱 끝을 파묻고서 에르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에르빈이 오딜리아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구, 구론 고 아냐.”
“…….”
“구냥 안녀(알려) 주려고…… 젤리꼬가…….”
“…….”
“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