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26
윤소담이 저럴 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늘 똑같은 레퍼토리라 외울 지경이었다.
-너 학교 가서 내 얘기 입에 올리지도 마! 내가 어떤 집안, 어느 집 딸인지, 나랑 네가 사촌이란 거, 그리고 대한외고 다니고 혜윰 발레단 주니어란 말도 절대 하지 마! 아예 대한외고랑 혜윰이란 단어 쓰지도 말라고!
대답이 없을 때는 내 침묵을 들쑤시고 나섰다.
-왜 대답이 없어? 응?
-미안한데, 너만 대한외고 다니는 거 아니고 혜윰은 발레단뿐 아니라 같은 재단 갤러리랑 예술 회관에도 붙는….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닥쳐! 닥치라고!
실재하지 않는 시공은 다시 널을 뛰어 나를 다시 다섯 살짜리 꼬마로 돌려놓았다.
조현애의 악귀 같은 얼굴이 보이는 순간, 악몽이 도래하는 공포를 맛봤다. 동시에 살의가 치솟았다.
꿈속에서 나는 조현애와 정원의 돌계단 앞에 서 있었다. 계단은 어느새 까마득히 높고 가파른 낭떠러지로 변해 있었다.
나는 조현애를 계단 아래로 힘껏 밀어뜨렸다.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했다가도, 지옥에서 살아나온 망령처럼 금세 부활하곤 했다. 나는 계단 아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녀를 반복해서 다시 밀었다.
연우재 씨, 어디 있어요!
기진맥진한 가운데서도 그를 이름을 부르짖었다. 연우재 씨, 도와줘요!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살려 달라고요!
조현애는 게임기 속 두더지 같았다. 그 끈질긴 생명력에 기어이 울음이 터지며 잠에서도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고 잠옷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나는 눈물로 짭짤해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벽 한구석을 조용히 응시했다.
오랜만의 악몽 끝에 새삼 자각했다. 내 힘으로 복수한다는 게 얼마나 가망 없는 일인지. 의식 저편에서 무수히 살아나던 조현애는 곧 현실 속 이 집 사람들이었다.
복수를 도와줄 메신저가 필요했다. 내가 당한 이 모든 걸 갚아 줄 수만 있다면. 그럼 몸도 영혼도 송두리째 악마에게 팔아넘길 수 있었다. 진심이었다.
그럼 연우재에겐 넘겨주지 못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지? 심지어 악마도 아닌데.
하지만 그에게는 내 심신을 건넬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적당히 할 수가 없으니까.
시트를 그러쥔 두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일단 연우재와 엮이고 나면, 내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연우재란 늪에 깊숙이 빠져서 나 자신이 질식 직전까지, 너덜너덜하게 조각나고 망가질 때까지도 제어하지 못하리란 예감이 엄습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연우재에게 끌리고 있었다. 그동안 애써 신경 쓰지 않고 멀리하려 애썼지만,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와 점점 더 가까이하는 동안 내 감정은 더 깊어질 것이다. 복수의 조력자가 되든, 몸과 복수를 맞바꾼 스폰 관계가 되든, 그런 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내 감정 때문에 이제는 반대로 내 복수에 끌어들일 수 없었다.
언제고 끝이 날 관계 한가운데서, 내 마음은 바닥없는 미궁으로 속절없이 빨려들 터였다. 그럼 결말은 뻔하다.
한쪽은 끝이 났는데 다른 쪽은 그러지 못하는 관계처럼 비참한 것이 있을까.
* * *
일주일, 그리고 2주가 더 지났지만 연우재를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전화도 걸려 오지 않았다.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 쓰렸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게 맞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심장은 매일 착실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 균열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도서관에 들러 공부를 하다 카페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엔 학원에서 강의를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무료해서 죽을 것 같다는 핑계로 용 여사와 장 집사, 만섭 아저씨, 주방 아주머니의 일까지 도우며 녹초가 될 때까지 몸을 혹사시켰다.
그런다고 심란한 마음이 더 나아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밤에는 효과가 있었다. 악몽도,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윤부경의 귀가에 촉각을 세우며 반지하 벽난로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윤부경은 귀국해서도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말로는 일이 바빠서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닌 눈치였다.
“여자 만나는 거야. 틀림없다니까.”
후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길고양이를 기다리던 날, 직원용 거실 창 너머로 용 여사와 장 집사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긴 했어. 뻔하지. 처자식 외국에 있는 동안 귀가 따지는 사람도 없고 홀가분하니, 나쁜 짓거리 하기 딱 좋잖아? 쯧, 천벌을 받을 인간. 인성은 없고 그저 돈만 썩어날 정도로 많은 남자가 하는 짓이란….”
마침 나타난 길고양이 나비가 애옹 울었다. 안쪽에선 동관 담당 직원이 쉬러 들어왔는지, 화제가 윤태경 부부의 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동관 사모님, 사모들 모임이 있다고 방금 막 외출하셨어요. 청소도 다 끝냈고… 아이고, 허리야! 딱 10분만 누워 있다 갈게요.”
전에 헛것을 보고 발작을 일으켰던 문지혜는 신경 쇠약 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호전되는 듯했다.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다.
“상무님 쪽은 별일 없지? 하기야 무슨 일이 있었으면 오 주임이 진작 말했겠지.”
“네. 늘 똑같죠. 상무님이야 뭐… 사모님만 조용하시면 만사 순조롭고 잠잠하니까요.”
화제는 이내 연예계 가십으로 옮겨갔고 나도 쫑긋 세웠던 귀에서 긴장을 풀었다. 의식은 윤태경 부부에서 다시 윤부경의 행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확실하다면 그 물적 증거도 입수하면 좋을 텐데. 방법이 없을까?
“나비야.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응?”
냐아아-. 내 멋대로 나비라 이름 붙인 고양이가 내 손에 머리를 비비며 낮게 울었다. 몽실몽실하고 말랑한 치즈 빛깔 머리통이 무더위 속에서도 뜨끈하니 기분 좋았다.
나는 황태채를 주머니에서 꺼내 나비에게 먹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장 너머로 여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시야를 흐렸다.
영원할 것 같던 여름도 어느새 물이 올라 절정에 달해 있었다. 시간만은 정말 누구에게나 공평하구나, 새삼 깨달았다.
자기애성, 경계성, 반사회적, 행동장애, 회피성, 의존성, 연극성, 조현형, 강박성 성격 장애, 중증의 의처증, 파렴치한 오입쟁이, 참으로 다양한 증상들이 밀집된 한 일가의 구성원들에게도.
어떻게든 증거를 하나라도 더 잡아 놓고 조질 거라 복수를 꿈꾸는 회피형 애착 유형인 내게도. 그리고 군 입대를 준비하고 있을 그 남자에게도.
“아, 그치만 너에겐 공평하지 않겠구나. 개랑 고양이는 인간에게 수명을 빼앗겨서 우리보다 삶이 짧으니까.”
나비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황태채에다 몰래 주는 사료까지 다 먹고 입맛을 쩝쩝 다시다 앞발을 날름날름 핥았다.
어느 구전 동화였더라. 원래는 개와 고양이, 인간 모두에게 30년의 수명이 주어졌지만 인간이 욕심을 부려서 그들의 것까지 빼앗아 가는 바람에 6, 70년까지 늘어났다는 얘기를 본 기억이 났다.
“나비야, 언니 이제 갈게. 이따 다른 이모가 사료 또 덜어 놓으실 거야.”
조막만 한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나비는 실눈을 뜨고 두 귀를 쫑긋 펼쳤다. 명줄이 짧아진 대신 단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하게, 걱정 없이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너도 소중한 하나의 생명이니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는 저만의 가치와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아이가 하필 이 집 후원에 자리 잡은 것도, 나와 만난 것도 특별한 인연일 테니.
* * *
여름은 지루한 듯 빠르게 흘렀다.
8월로 넘어간 첫날, 윤소하가 혼자 슈트 케이스를 끌며 서광재로 돌아왔다. 윤진하와 윤소담, 추성희와 유럽을 돌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귀국을 감행했다는 모양이다.
그녀는 윤태경과 문지혜 부부를 제외하고, 이 집에서 내게 유일하게 무해한 사람이었다. 나와 가깝지도 않았지만 윤소담처럼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 애는 기실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윤소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외톨이란 면에서 분열성 성격 장애에 속했다. 타인과 엮이기 싫어하고 휴일에도 외출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애착 유형은 나처럼 회피형일 것도 같다.
똑같은 부모 아래 자랐어도 쌍둥이는 완전히 달랐다. 어쨌든 내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한, 나도 그녀에게 필요 이상의 악의를 품을 필요는 없으리라. 이 집을 향한 복수심과는 별개로.
윤소하는 늘 2층 제 구역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하프를 연주하는 일도 거의 없는 듯 보였다.
그래서 한밤중에 잠옷 차림으로 후원에 나와 있는 걸 발견했을 땐 깜짝 놀랐다. 몽유병에 걸린 게 아닌가, 반지하 창으로 한참을 내다보기도 했다.
다음 날 창고에서 나비에게 밥 주는 걸 들켰을 땐 더 깜짝 놀랐다.
큰일이네. 윤부경이 알았다간 길길이 날뛰며 곳곳에 쥐약을 뿌려 둘 텐데.
그는 윤소하가 귀국했는데도 여전히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윤소하를 통해, 그의 말마따나 ‘털 달린 더러운 짐승 새끼’에 대해 알게 되면 절대 가만있지 않으리라.
“누구 고양이야? 장 집사 아줌마?”
나비는 낯선 사람의 기척에 부리나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망했다, 아찔함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누가 키우는 건 아니고… 가끔 창고 틈으로 들어오면 이렇게 밥을 줘. 사료는 내가 샀고. 장 집사님하고 용 여사님은 아셔.”
“…….”
“가엾잖아.”
동정심을 유발할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윤소하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뒤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창고에서 나가기 직전 뜻밖의 말을 뱉었다.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
이르지 않겠다는 소리에 나는 고마워, 반사적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