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3
-막내 도련님의 액받이로 데려오신 그 외손녀가 이제 열두 살이 되지요? 회개 의식은 이제 중단하세요.
-네에? 하지만 보살님, 매주에서 매달로 바뀐 지 2년밖에 안 됐잖아요. 이제는 아예 손을 대지 말란 말씀이세요?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겠습니다. 계집아이도 이제 머리가 큰 데다 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더 이어 갔다가는 오히려 액의 원한을 살 수 있어요. 제가 대신 도련님을 위해 부적 몇 개를 써 드리고 굿도 할 테니 사모님은 염려를 멈추시지요.
-네네, 그럼 보살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그저, 우리 태경이 앞날에 장애가 없고 운이 확 틔게만 해 주세요.
보살의 말을 들은 이후, 조현애도 더는 내게 회초리를 휘두르지 않았다. 그녀가 실족사로 사망한 날은 보살의 명을 받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게는 그 좆같던 회개 의식에서 해방된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날 저녁마다 그 기간의 죄를 반성하고 매를 맞았던 생고문은 조현애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막을 내렸다.
너무도 당연히, 애도의 감정은 한 톨도 없었다. 조현애가 내게 악귀처럼 굴었던 원수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핍박받는 세월 동안 내 인간성의 어떤 부분도 죽어 버렸기 때문일 터였다.
어쨌든 그때는 마냥 기쁘기만 했었다. 장례식에서 미친년처럼 깔깔 소리 내 웃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던지. 신기하기도 했다.
‘제발 죽어 버려!’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잡았다. 그리고 그 고운 한복과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를 떠올리며 빌고 또 빌었다.
죽어 버려요, 제발. 이렇게 부탁이야!
그 뒤통수 한가운데 꽂힌 비녀를 잡아 빼, 단번에 심장을 찔러 숨통을 끊고 싶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릴 만큼 간절히 빌자마자 다음 날 그렇게 맥없이 뒈져 버리다니.
신은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게 선신이든 악신이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고작 열두 살짜리 유약한 어린아이였던 나는 그제야 삶의 의욕을 찾았다.
하지만 일그러져 버린 내 영혼은 어떻게 치유해야 하나.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그 노파가 죽기 전까지, 착실하게 망가져 갔다.
조현애는 ‘액막이’란 이름으로 내 존재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고 체벌이란 이름하에 폭행을 오랜 세월 반복함으로써, 나에게 인간에 대한 불신과 강렬한 살의를 뿌리 깊이 심어 주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로도 틈틈이 자행됐던 윤부경의 폭력과 추성희의 방관, 윤소담의 일상적인 괴롭힘, 치매 증상으로 요양원에 보내지기 직전까지 날 벌레 보듯 했던 윤택근의 시선은 차라리 경미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어.
흔히 책이나 영화에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아아악! 아악!
모든 염오(厭惡)와 소망을 담아 소리 없이 토해 내는 내 절규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복수할 것이다. 이 모든 걸 반드시 갚아 주리라. 그게 이 미친 집구석에서 도망가지 않고, 거짓일 게 뻔한 추성희의 조건을 믿는 척, 아직도 여기 남아 있는 이유였다.
내가 다섯 살부터 열두 살까지 이어진 ‘회개 의식’, 아니, ‘액막이 굿’의 증거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계속된 윤부경의 폭력과 추성희의 방관, 윤소담의 일상적인 괴롭힘 역시.
그러나 증인들은 있다. 장 집사와 용 여사 부부는 날 학대하던 조현애가 죽고 새로 들어온 피고용인들이다. 반면 내가 다섯 살 때부터 근무하던 사용인들은 그 사실을 철저히 함구하며 용인 별장으로 옮겨져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집구석이 무너질 기미가 보이는 순간, 그들은 기꺼이 입을 열어 주지 않을까. 그 학대의 현장을 낱낱이 증언하고 내 복수에 기꺼이 힘을 실어 줄지 모른다.
나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무리 계란으로 바위를 내리치는 격이라 하지만, 최소한 속이 익어 단단해진 달걀은 되어 있어야 하니까.
* * *
연우재가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난 날은, 길고양이가 다가와 말을 걸 것 같은 오후였다.
실제로 고양이가 있긴 했지만 내 쪽으론 다가오지 않고 나무 그늘 아래 길게 누워 있었다. 몸 반쪽에만 따가운 초여름 볕을 쬐며 사지를 쭉 뻗은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나른한 고양이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내 부실한 내면 가득 살의와 증오가 다시 너울거렸다. 산 자를 향한 저주를 퍼부으며 도서관의 후미진 계단에 앉아 있는 스스로가 등신 같았다.
어젯밤 오랜만에 조현애의 악몽에 시달렸다. 윤소담이 몰래 다녀간 반지하, 내 방바닥에 널브러진 책의 조각들도 그 악몽의 소환에 한몫한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던 책은 반으로 갈라져 엉망으로 파헤쳐져 있었다.
윤소담은 늘 그랬다. 윤부경에게 한바탕 꾸중을 듣고 나서는 항상 내게 분풀이를 하곤 했다. 어쩌겠어. 문을 잠그는 걸 까먹은 내 잘못이지, 생각하다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 그건 너무 부당하다. 잘못을 저지른 쪽이 명백한 가해자인데, 피해자가 그럴 여지를 제공했다고 자책하다니.
“죽어. 그냥.”
간밤에 내린 여름 폭우로, 등짝의 상처들이 쑤신 것도 같았다. 악몽은 결국 피바다로 끝났다.
꿈속에서 조현애에게 쫓기다 결국 뒤돌아서서 그녀를 손톱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윤소담, 윤부경도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눈을 떴을 땐 동이 트고 있었다.
“제발 다 죽어 버려.”
“누구.”
뒤통수에 와 닿는 저음에 흠칫 눈을 떴다. 그제야 발치에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휙 뒤돌아보자 연우재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여름 티셔츠에 청바지, 비스듬히 챙을 돌려 쓴 볼 캡까지 영락없는 대학생 차림새였다.
“누가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는데?”
소름이 쫙 끼쳤다. 고양이도 이보다는 더 기척을 내고 다가왔을 것이다.
“응?”
“…안녕하세요.”
어쨌든 세 살 많은 선배니까 인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뒤늦게 그가 이 학교 졸업생도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이 학교 안 다니잖아요.”
한라그룹 전 회장의 둘째 손주, 연우재가 대한외국어 고등학교 월반으로 S대 경영학과에 수석 입학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매 학기 학사 경고와 출석 불량이 반복되다 결국 휴학 중이라는 반쪽짜리 헛소문도 일파만파 퍼져 있었다.
왜 반쪽짜리 헛소문인가 하면, 비록 학과 성적은 엉망이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지인이 임시 경영 중인 CAM파트너스 사모 투자 운용사에서 ‘마이다스의 손’으로 암암리에 활약하는 까닭이었다. 학업에 성실히 임하는 대신, 돌아가신 선친이 세운 투자 회사에 올인하는 셈이다.
“이 학교 안 다니면. 그럼 여기 오면 안 되나?”
“…오늘은 회사 안 가시나 봐요.”
문득 한라그룹의 현 상황이 떠올랐다. 연우재의 고조부가 창립해 증조부가 국내 굴지의 금융사로 키운 기업이다. 현재 그룹의 회장은 그의 큰아버지인 연정호였다.
연우재의 부친 고 연정헌은 3남 2녀 중 막내였다. 장남 우선 상속 가풍에 철저히 따르느라, 더 유능했음에도 차기 회장직에서 밀려난 연정헌은 제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해 CAM파트너스를 설립했다던가.
“나한테 참 관심 많네. 내 출근까지 걱정해 주고.”
그런데 연정헌은 어떻게 사망했더라? 맞아. 빗길에 차 사고로 죽었다고 했었지. 어머니는 그보다 더 전에 돌아가시고.
“나랑 똑같네.”
혀를 깨물 뻔했다. 저도 모르게 속엣말을 뱉어 버리고 아차 싶었다. 연우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똑같다니, 뭐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공연한 소리를 지껄일 뻔했다. 세상에 조실부모한 사람이 연우재와 나,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유별난 공통점이라고.
“그럼 볼일 보세요. 저는 이만 가 봐야 해서….”
“근데 너 좀 이상하다.”
“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연우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제 아예 계단 철제 턱에 기대앉아 긴 다리를 들어, 한쪽 발목을 반대편 난간 끝에 턱하니 올려놓고 있었다.
계단 너머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의 다리를 넘어가야 했다. 혹은 몸을 한껏 구부려 그 아래로 지나가든가. 하지만 후자는 싫었다.
“뭐가요?”
“왜 나만 보면 표정이 싹 달라져? 안면몰수하는 것도 아니고.”
“…….”
“나한테 뭐 유감 있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했다. 내가 그를 어떤 얼굴로 보고 있는지 애당초 알 수가 없던 까닭이다.
“아뇨.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우리가 언제 봤다고. 보긴 봤지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럼 왜 나한테만 그렇게 다르냐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봐. 지금도.”
그의 입술 끝이 비웃듯 일그러졌다. 따가운 햇살 때문인지 이마와 광대가 동시에 지끈거렸다. 나는 내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찌푸린 미간을 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뭔가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