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49
“맞아요. 지하철 금방 올 건데 그 잠깐을 못 참고 그렇게 사람에게 욕을 하고 우세를 줘요? 참, 강팍하게 사시네.”
나이 지긋한 여자에 이어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씩 남자에게 면박을 주며, 울먹이는 아이 엄마를 달래기 시작했다. 수세에 몰린 남자는 어버버, 당황하며 자기가 뭘 잘못했냐며 플랫폼 반대쪽으로 황망히 멀어져 갔다.
“와, 쪽수로 밀리니까 꼬리 말고 도망가는 꼴 좀 봐. 완전 강약약강 표본이네.”
학생들도 저마다 떠들며 달아난 남자를 헐뜯었다. 그와 동시에 지하철 몸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잠시 지연됐던 운행이 재개됨을 알렸다. 다들 승차하려고 뿔뿔이 흩어질 때였다.
“학생. 고마워요.”
아이 엄마가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간신히 울음을 멈춘 아기가 눈물로 얼룩진 엄마 얼굴로 손을 뻗으며 다시 칭얼거렸다.
내가 뭐라고 답하기 전에 여자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텅 빈 벤치에 주저앉고 말았다. 진이 빠져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악을 쓰며 감정을 소모한 탓일까.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술을 세게 악물었다. 탈력감과 무기력증이 엄습하며, 손가락 끝마다 잔 경련이 일어나듯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송은효.”
그래서 환청이라 여겼다.
조금만 더 앉아 있다 가야지. 딱 5분만 쉬었다가 가면 괜찮을 거야. 그럼 집에 가서 날 위해 장 집사와 용 여사가 따로 남겨 뒀을 저녁을 먹고, 그리고….
“송은효.”
이상하다. 미치지 않고서는 환청이 이렇게 연이어 들리진 않을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돌려 플랫폼 벽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권이결이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이번엔 환시인가 싶었다. 권이결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주차장 한구석을 차지한 스포츠카만 두 대였는데.
눈이 핑핑 돌았다. 나는 일어나다 현기증이 나서 벤치에 도로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속삭였다.
“아니, 안 괜찮아.”
“…….”
“배고파.”
정말로 쓰러질 것 같았다. 전철을 타고 30분 정도만 버틸 작정이었는데.
버킷햇 차양 아래 두 눈이 심해처럼 어두웠다. 그는 나를 길게 내려다보다 허리를 굽히고 내 손목을 살짝 잡았다. 하지만 강압적으로 잡아당기진 않았다.
나는 권이결이 부드럽게 이끄는 대로 플랫폼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출구 바로 앞에 있는 솥밥집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 갈래.”
다리가 후들거렸다. 당이 체내에 단 1mg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힘이 하나도 없었다. 권이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뒤따랐다.
가족 단위 손님과 어르신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식당은 넓고 깨끗했다. 권이결이 수저를 서랍에서 꺼내 내 앞에 놓아 준 뒤에야 퍼뜩 현실감이 들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것도 권이결이랑.
구수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청국장과 나물, 잡채 등 기본 반찬이 나왔다. 나는 생수병을 절반이나 비우고 서둘러 운을 뗐다.
“사장님도 드시려고요?”
“갑자기 말이 또 길어졌네. 응.”
“어… 이런 거 먹어? 청국장인데.”
“둘이 왔으니까 2인분 시켜야지.”
그는 나긋나긋 답하며 청국장을 내 국그릇에 떠서 건네었다. 안 먹는데 나 때문에 일부러 시켰단 얘긴가? 하긴 그에겐 호텔 레스토랑이나 세련된 브런치가 훨씬 어울리긴 했다.
그는 내가 오해할 거라 생각했는지 간단히 덧붙였다.
“원래 먹는 거 싫어해. 가리지 않고.”
“거긴 왜 있었어? 전철… 안 타잖아.”
“하필 붓을 하나 못쓰게 돼서, 급한 대로 메이크업용 붓이라도 사려고 지하 잡화점에 갔었어. 그러다 네가 개찰구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허겁지겁 나물부터 입으로 가져가다가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말을 더 잇지 않았다.
나는 주인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돌솥 뚜껑을 열고 밥을 그릇에 따로 퍼 둔 뒤 따뜻한 물을 솥에 부었다. 눌어붙은 누룽지가 한눈에도 맛있어 보였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식사에만 열중했다. 권이결은 누룽지를 조금 떠먹을 뿐 다른 음식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늘 식욕이 없는 것처럼 보이긴 했었다.
그에 비해 체격은 마르고 호리호리하면서도 유약해 보이진 않다. 그 스토커를 때려눕힐 때만 해도 힘이 엄청난 것 같았으니까.
“한심해.”
나는 누룽지까지 탈탈 털어 마신 뒤 한숨을 흘렸다.
“사장님도 내가 한심하지 않아?”
역시 밖에서는 완전히 말을 놓아 버리는 게 어색하다. 서류상만 동갑일 뿐 실은 세 살 더 연상인 걸 알기에 더 그런 듯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서서… 오전에도 괜히 손님하고 입씨름하고 아까도….”
“…처리할까? 둘 다.”
“뭐?”
귀를 의심했다. 권이결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가게 그놈이랑 전철에서 그 인간.”
한없이 정적인 목소리였다. 조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색이다. 하지만 눈빛만은 달랐다.
일견 아무런 동요를 내비치지 않았는데도, 조금씩 안개가 번져 가듯 말갛게 빛나는 시선에 기시감이 일었다. 스토커 남자를 응징할 때와 같은 눈이었다.
이 사람은….
[가까이하지 마. 내가 아는 위험한 인물 중 제일 상위야.]연우재의 당부가 다시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의 잔상을 채 떨치기도 전에 권이결이 덧붙였다.
“말만 해.”
“처리한다는 게…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지?”
뭘 생각하는데? 나는 그가 그렇게 되물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권이결은 핑퐁처럼 오가는 말장난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맞을 거야. 너는 그냥 말만 하면 돼.”
설마설마했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전신에 오한이 엄습했다. 사장의 실체에 또 한 번 직면한 충격이 실제 같지 않았다.
“농담…이지?”
“어차피 살아 있어도 득 될 것 없는 인간이잖아. 차라리 없는 게 다수를 위해 낫지 않을까.”
혼란스러웠다. 권이결의 이례적인 공격성, 그리고 극한으로 치닫는 해결 방식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예기치 않은 저녁은 식사가 끝나고, 권이결이 카운터에 밥값의 몇 배는 될 법한 현금을 놓고 돌아섰을 때였다.
그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엉겁결에 밥을 얻어먹은 데 대한 감사 인사를 건넬 겨를도 없었다.
나는 여러 생각이 뒤얽힌 실타래 속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보름이 지날 동안, 권이결은 한 번도 가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나는 한참을 방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후원으로 나왔다. 오후 8시가 넘은 하늘은 저녁과 밤의 경계 사이 있었고, 만발한 꽃들은 땅거미가 지는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웃었다.
같은 서울 하늘, 어딘가에 있을 연우재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하루가 늘 짧게 느껴졌다.
끼익,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윤소하가 버려진 안락의자 옆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나비는 미동도 없이 구석의 벽에 딱 붙어서 색색 잠든 채였다.
“오늘 R갤러리 개관식 가는 날 아니었어? 중간에 온 거야?”
응, 윤소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세워 앉았다. 어쩐지 나와 대화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그 옆에 앉았지만 먼저 운을 떼진 않았다.
“갤러리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아팠어. 연예인도 오고 웬만한 집안사람들은 다 왔는데….”
혹시라도 연우재 얘기를 하면 어떡하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의 소식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어지는 침묵을 깨고 불쑥 물었다.
“오프닝 초대전은 누구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