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
1화. 서(序)
술시 무렵. 운남성 서산.
낮게 깔리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인영 하나가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어스름한 석양빛에 비치는 이목구비는 반듯하지만 채 앳된 모습이 가시지 않았다.
“헉, 허억, 헉…….”
약관조차 되지 못한 소년.
그러나 몰골은 엉망이었다.
오랜 시간 산속을 헤맨 듯,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연신 거친 호흡이 새어나간다.
감색의 무복은 넝마가 되어 구석구석 긁히고 할퀴어진 생채기가 비쳤다.
무엇보다도 소년의 복부는 길게 그어진 검상과 함께 시뻘겋게 물들어있었다.
손으로 틀어막고 있지만, 출혈이 멎지 않아 뚝뚝 흘러내린다. 척 보기에도 보통 위중한 상처가 아니다.
그러나 소년은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도 바쁜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슥, 서걱!
오른손에 쥔 검으로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베고 가르며 서둘러 발을 놀린다.
“이쪽이다! 흔적을 찾았다!”
그때, 등 뒤 멀지 않은 곳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으득,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추적자들은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쫓아 와있었다.
소년이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던 그때였다.
슈욱, 탁!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소년은 재빨리 몸을 숙여 피해냈다. 그러나 그 순간 소년의 몸이 휘청거렸다.
과도한 출혈로 인해 일순 균형을 잃은 것이다.
“잡았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소년에게 검이 뻗어졌다. 소년도 얼른 검을 휘둘렀다.
챙!
검과 검이 얽혀들었다.
추적자의 검은 기세등등하다. 소년의 목숨을 거두기 위한 것이므로 망설임 따윈 없다.
그 앞에서 소년의 기진맥진한 칼끝 따윈 금방이라도 꺾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소년은 밀리지 않았다.
온몸은 부서질 듯하고 기혈은 들끓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상대의 검을 놓치지 않았다.
검로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추적자와 소년의 검술은 뿌리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 합 정도가 오고 갔다.
그리고.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발검제일식(拔劍第一式).
직검(直劍).
퍼억!
“크악!”
방심한 추적자의 검이 횡으로 크게 휘둘러진 직후였다. 소년의 검이 섬광처럼 뻗어졌다.
단순한 하나의 직선.
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추적자의 복부에 어린애 주먹만 한 관통상이 새겨졌다.
털썩!
추적자가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목을 쳐야 하나?
소년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그때, 또다시 화살이 날아들었다. 가까스로 피해낸 소년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이런 등신 같은 새끼! 기껏해야 다 죽어가는 놈 하나를 못 당하고!”
등 뒤에서 악다구니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소년이 아주 잘 아는 이의 목소리였다.
왜 이렇게 되었지?
터질 것 같은 기혈을 억지로 쥐어 짜내며 소년이 생각했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을 맞이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물며 죽음 따위는.
슈슉!
다시금 화살이 날아들었다.
소년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털썩, 진흙 위로 널브러진 몸이 땅 위를 굴렀다. 아득한 통증. 울컥울컥 목구멍에서 핏물이 치솟는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어쩌면 영영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소년은 일어섰다. 그리고 달렸다.
산세를 헤치고 얼마나 달렸을까, 저만치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강렬한 빛이 스며들었다.
산속에선 해가 빨리 저문다.
빛이 보인다는 건 드디어 숲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만큼이나 내려왔으니 어쩌면.
“…….”
소년은 할 말을 잃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절벽이었다.
흡사 창끝처럼 좁고 길게 뻗어진 땅의 끝자락. 그 너머로는 까마득한 허공뿐이다.
“형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수풀 사이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추적자들을 맞이했다.
“뭡니까, 그 얼굴은? 죽을 때를 앞에 두면 좀 더 재미있는 표정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
태연자약한 미소.
추적자들의 가운데에는 또 한 명의 소년이 서 있었다. 그는 소년이 줄곧 ‘아우’라 여겨왔던 이였다.
저벅.
소년은 뒷걸음질로 절벽의 끄트머리에 섰다. 물러설 곳은 없다. 고로 칼을 겨눈다.
“하핫, 설마 아직도 포기를 못 하셨습니까? 자고로 대장부란 갈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인데 말입니다.”
후우, 소년은 숨을 들이마셨다.
한 명 한 명, 추적자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모두가 한솥밥을 먹던 얼굴들이다.
그리고 소년의 시선은 다시 중앙의 아우에게로 향했다.
“대체 왜냐? 협아.”
소년이 물었다.
왜, 하나뿐인 아우는 그에게 암습을 가해야 했는가? 무엇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왜냐구요?”
하, 아우는 코웃음을 쳤다.
“형님, 정말로 몰라서 묻는 말입니까? 끝까지 아둔하기 짝이 없군요. 하기사 형님께서 주제 파악만 잘했더라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만.”
“…….”
“그 검.”
아우의 손가락 끝이 뻗어졌다.
소년의 손에 들린 검을 가리켰다.
“감히, 천한 몸종의 자식 주제에 그 검을 들고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창공비검(蒼空飛劍).
그것은 선우세가의 가주에게서 소가주에게로 이어져 내려오는 물건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검은 소년의 부친에게서 소년의 손에 넘어왔다.
“하아, 됐습니다. 퍽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인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군요.”
“…협아.”
“아, 그래. 형님, 이렇게 하시죠.”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아우는 손뼉을 쳤다.
“그 검을 이리 가져오십시오. 형님께서 직접, 이 아우에게 바치시는 겁니다. 그리고 네발로 기어서 이 자리를 떠나십시오.”
“…….”
“그러면 목숨은 살려드리겠습니다. 뭐, 단전과 근맥 정도는 자르겠지만요. 어디 시골에 숨어 요양이나 하면서 살게는 해드리지요.”
소년은 아우를 바라보았다.
그 앳된 얼굴 한가운데에 자리한, 생전 본 적이 없는 뒤틀린 눈빛을 이제야 마주한다.
검을 준다고 한들 살려줄까?
그럴 리 없다. 소년은 아우의 눈빛 속에서 마침내 최후를 직감했다.
죽음에 이유가 있다면, 가장 가까운 이의 본심을 알지 못했다는 것일 테다. 아니, 어쩌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도망쳐왔던 게 무색할 만큼 목숨의 무게가 우스워졌다.
피식, 소년은 웃었다.
“그래, 주마.”
콰악!
소년은 검을 발치에 꽂아 넣었다.
“그 대신 네가 이리 와서 직접 가져가도록 해라. 그 정도 깜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뭐?”
“자, 어서. 가져가지 않고 뭘 하느냐, 선우협?”
땅 위에 거꾸로 꽂힌 검.
아우의 시선이 그 끝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서서히 소년에게로 움직였다. 눈빛과 눈빛이 교차했다. 아우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으드득!
아우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곧 웃는 얼굴이 되었다. 하하핫, 하고 배다른 형제는 마주 웃었다.
“그럼 죽어주십시오, 형님.”
“…….”
그리고 아우는 시선을 거두었다. 더 이상 할 말 따위는 없다는 듯, 주위의 무사들을 향했다.
“죽여.”
다시 화살이 겨누어졌다.
팽팽하게 조여드는 활시위들을 바라보며, 소년은 생각했다. 더는 남은 힘도, 검도, 의지도 없다.
하지만 역시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들지 않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되더라도.
저벅.
결심이 선 순간 소년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발이 디딜 곳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패앵! 슈슈슉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몸이 서서히 뒤로 기울어졌다.
퍼억!
화살 하나가 복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즉사에 이를만한 상처는 아니다. 고로 소년은 살해당하지는 않았다. 그저 사라질 뿐이다.
“잘… 있거라, 협아.”
* * *
선우벽. 십오 세.
운남성 곤명에 터를 잡은 무가, 선우세가의 2대 가주 선우각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어미는 몸종 출신으로 일찍이 선우벽을 낳으며 숨을 거두었다.
장자임에도 출신이 일천했으므로 본디 세가 내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선우벽은 서서히 그 비범한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가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칠 세쯤 검을 잡았던 그는 불과 십 세에 세가의 가전무공인 청강검식을 흠잡을 데 없이 펼쳐내기에 이른다.
선우세가의 기재.
이내 선우벽의 재능은 그 부친인 가주 선우각의 눈에 들었고, 직계후손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리고 결국, 세가의 비전무공인 청강유엽공을 전수 받았다.
십사 세, 재능은 나무뿌리처럼 무리를 빨아들였고, 선우벽은 청강유엽검의 기본형을 완성하며 그 싹을 틔웠다.
선우세가의 미래.
장차 운남의 패자로 우뚝 서고, 나아가서는 중원무림의 한가운데까지 세가를 이끌어 올릴 동냥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선우벽은 소가주의 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하나뿐인 아우, 그리고 세가의 무인들과 함께 사냥을 나섰던 선우벽은 믿는 이들에게 암습을 당했고, 도주했으나 실패했다.
절벽에서 발을 디뎌 추락하여 목숨을 잃었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선우벽은 눈을 떴다.
시야에 잡히는 것은 공간의 모양이 가늠되지 않는 어둠. 그리고 퀘퀘한 냄새였다.
이것이 죽음인가?
“허망하군.”
“하, 마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세상 다 산 것 같은 소릴 하네.”
낯선 목소리가 혼잣말에 답했다.
일순 선우벽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억지로 움직이지는 않는 게 좋을걸. 일단은 마취해놨지만, 그 마취가 풀리면 지옥일 테니까.”
“누, 누구?”
“뭐, 저승사자는 아니다.”
“…….”
“유감스럽지만, 너나 나나 아직 이 더러운 이승에 발을 붙이고 있거든. 원래 이 강호무림에는 몇 가지 법칙이란 게 있지.”
“그게 무슨…….”
“첫 번째, 절벽 같은 데에서 떨어진 놈은 반드시 살아남는다. 두 번째, 기연을 만나 복수를 이룬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황망함 속에서 선우벽은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죽은 게 아니라면, 이 낯선 목소리의 사내는 그의 은인이라는 뜻인가.
“뭐, 그딴 건 사실 다 개소리지만.”
선우벽이 어떻게 생각하건, 정체불명의 그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 높은 데에서 떨어지면 무림인이고 나발이고 뼛가루도 못 찾는 게 정상이지. 그저 그럴듯한 이야기가 듣기 좋게 꾸며져서 회자 될 뿐이야.”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억세게 운이 좋았다. 나를 만났고, 목숨도 붙어있고, 단전은 박살 났고.”
단전이?
일순 선우벽은 몸 안의 기혈을 점검해보았다. 그리고… 사내의 말마따나 단 한 줌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저 고갈된 것이 아니다.
그릇이 깨어졌다. 완벽하게.
일순 선우벽은 허탈함에 휩싸였다. 평생을 쌓아 올린 것이건만 잃는 것은 이렇게 쉬운가.
그러나 곧 우스워졌다. 죽음을 생각하고 절벽을 뛰어내렸으면서 그까짓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
“…그렇군요. 목숨이나마 살아남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겠지요. 은인께서는 어떤…….”
“아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꼬마야. 단전이 박살 난 건 오히려 네게 행운이란다. 이쯤 되면 나로서도 운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네?”
그러나 사내의 이야기는 다시금 선우벽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여전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선우벽은 문득 사내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너의 기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