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
2화. 약장수 이진천
“크허허허헝!!!!”
사내에게서 기함이 터져 나왔다.
천지를 뒤덮을 듯 웅혼하게 울려 퍼지는 음성. 선우벽은 깜짝 놀라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저 고함이 아니다. 마치 허공을 후려치는 듯한 그 음성에서 느껴지는 것은 틀림없이 내력이었다.
그것도 가늠할 수 없이 막대한.
웅성웅성.
소리에 놀란 촌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소 멀찍이서 사내와 선우벽을 둘러쌌다.
사내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거목처럼 위풍당당한 자태.
흡, 사내가 다시 숨을 들이켰다.
넙죽.
“자자! 어섭쇼, 어섭쇼!!! 물 좋고 공기 좋고 사람 좋기로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죽암촌민 여러분!! 이 이 모가 큰절 한 번 올리겠습니다!!”
사내는 대뜸 땅 위에 엎드렸다.
쿡, 사내의 팔꿈치가 넋이 나간 선우벽의 오금을 두드렸다. 선우벽의 몸이 덩달아 엎드려졌다.
“아, 공사가 다망하실 이 백주대낮에 이 몸이 염치 불고하고 왜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 섰느냐! 그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그리고 사내는 한참 동안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험! 이 몸이 의술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의 구휼에 뜻을 품은 지 어언 십오 년, 산속에서 약초를 캐던 와중 그만 발이 미끄러져 계곡에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 밑바닥에서 무려 신선을 만났지 뭡니까!”
“…….”
“자고로 지성이 감천이라고, 이 몸의 노력에 감동한 신선께서 만병을 다루는 비약의 제조법을 이 몸께 전수해주었지요. 예!”
삼척동자도 속이기 어려울 법한 허술한 이야기를, 사내는 잘도 능청스럽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등에 짊어진 나무 상자에서 얼른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그 신비의 신선환! 한 알만 먹으면 만병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갈아서 바르면 없던 살도 저절로 돋아나는!”
“뭐야, 약장수였잖아?”
“난 또. 무림고수인 줄 알았네.”
“멍충아, 이런 시골짝에 무림고수가 왜 오겠냐? 거 누굴 등 처먹으려고.”
이내 사내의 정체를 파악한 촌민들이 흥미를 잃고 돌아서기 시작했다.
“자, 잠깐! 여러분! 제 말을!”
“일 없수다. 딴 마을 가보슈.”
다급해진 사내가 손을 뻗었다.
확.
그리고 선우벽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외투를 대뜸 낚아채 버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소년의 상체가 드러났다.
“여러분! 이 아이를 보십시오!!”
스윽, 의뭉스러운 시선들이 선우벽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우벽의 몸은 온통 흉터투성이였다. 그야 사실 무가 출신의 아이로서 당연한 일.
그러나 복부 한가운데에 그어진 검상과 화살에 꿰뚫린 상처는 누가 봐도 예사 상처가 아니었다.
아물기 시작해 딱지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보는 것만으로 고통이 느껴질 만큼 흉측하다.
“이 아이는 제가 산행 중에 거둔 녀석입죠! 산적떼한테 붙잡혔다가 천운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만, 아니 글쎄, 이미 칼침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어가고 있지 뭡니까?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탕! 사내가 가슴팍을 쳤다.
“이 신선환을 먹이고 바르고 며칠을 돌본 끝에 이렇듯 사지 멀쩡하게 살려내지 않았겠습니까? 자, 여러분! 보십시오. 이게 어디 안 죽고 살아날 상처입니까?!”
“그, 그러게?”
“심하긴 하네…….”
웅성웅성.
사내는 기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쉴새 없이 혓바닥을 놀려대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약의 효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오히려 지나치게 건강해져 버렸다는 말씀!!”
그리고 사내가 눈짓했다.
선우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두 사람 앞에는 거대한 반석 위에 나무토막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대로, 선우벽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평생을 갈고닦아온 검이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검을 쥐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스윽, 콱!
“큭.”
선우벽은 칼자루를 놓치고 말았다. 칼날이 나무를 반쯤 파고든 순간, 오른팔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감돈 것이다.
“에이, 뭐야 저게?”
“뻔하다 뻔해. 딱 봐도 미리 손 써둔 나무토막 아니겠수? 그나마 제대로 자르지도 못했구만.”
“나 원, 쯔쯧. 애가 딱해서 봐주려고 해도 저렇게 어설퍼서야. 대명천지에 아직도 저런 사기를 치고 다니남?”
우우우, 야유가 터져 나왔다.
“자, 잠깐! 여러분! 한 번만! 한 번만 더!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사람들이 재차 흩어지려 하자 사내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돌아선 이들을 붙잡기는 요원하다.
“크허허허헝!!!”
“아이고 귀청이야!!”
“거 원! 목청 하나는 절대지경일세! 소림사 기둥뿌리도 두 동강을 내겠구만, 아주?”
“…….”
선우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의 공력은 진짜다. 비록 자신이 내공을 잃었다 한들 그 기감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 정도의 존재감은 웬만한 수준의 내력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틀림없는 고수다.
그런데 그런 고수가 지금 이 촌민들을 상대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에헤헤! 이거 참, 면목없습니다요, 여러분! 아이가 아직 회복 중인데 제가 그것을 헤아리지를 못했습니다. 아이고~”
“거 됐수! 안 산다니까!”
“에이, 그러지들 마시고! 그렇다면 대신에 뭐냐? 아이 대신 이 이 모가 직접 효능을 보여드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예?”
싹싹 두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신거리는 사내. 고수의 풍모 따위는 전당국에 팔아치운 듯한 모습이다.
“암요, 제가 만든 단약인데 설마 제가 안 먹어봤겠습니까? 산행할 때면 거의 밥 대신, 물 대신 먹었지요. 아니, 그랬더니 글쎄!”
툭, 사내의 발이 나무토막을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반석을 내려다본다.
“자, 잘 보십시오, 여러분! 무공고수가 뭐 별겁니까요? 나무를 가르고 바위를 부수면 그게 고수 아닙니까?”
흐읍, 그리고 사내가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반석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반신반의하는 시선들이 사내에게로 쏠린 순간, 날숨과 함께 사내의 주먹이 바위를 내리쳤다.
퍼억!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 속에서 야유가 퍼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쩌저적, 하고 바위의 표면에 금이 갔다. 마치 물결이 퍼지듯, 거미줄 같은 실금이 그어지다가.
쩌억!
“자, 어떻습니까요, 여러분?”
산산조각이 난 바위를 가리키며, 사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것은 분명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리 세게 내려친 것 같지도 않건만, 아무리 내가기공에 조예가 있다고 한들 웬만한 수준으론 엄두도 못 낼 경지.
“뻐, 뻔하지. 미리 손을 써둔…….”
“아냐, 저 바위는 원래부터 저기에 박혀있던 거잖아?”
“그, 그러게?”
웅성웅성, 동요가 인다.
“자, 자! 사흘만 챙겨 먹어도 몸 안의 상처가 싹! 고승도 목탁을 깨부수고 도인도 눈이 뒤집히는 바로 그 신선환! 그 가격도 놀라워라! 한 알에 단돈 다섯 푼!”
“사, 사볼까? 어차피 사기겠지만, 그래도 재밌잖아? 기껏해야 다섯 푼이고…….”
“열 개 사시면 한 알은 공짜! 자자, 수량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요!”
“나, 나 하나 줘보시오!”
“잠깐! 나도! 나는 열 개!”
“비켜! 내가 먼저야!”
* * *
“크하아! 좋다!”
선우벽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움직이는 노새 위에 앉아 연신 술병을 들이켰다. 소매로 입가를 훔쳐낸다.
질겅질겅.
“으흐흐, 그렇지. 이 맛에 사는 거지. 우화등선은 육시럴 이승의 주지육림이 백 배는 낫지~.”
품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서 씹기 시작하는 사내. 선우벽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내, 이진천은 은인이었다.
빈사의 몸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도 몇 번은 죽었어야 할 선우벽을 되살려주었다.
산맥 어딘가의 동굴 속에서 사내는 꼼짝조차 하지 못했던 선우벽을 며칠씩이나 보살펴주었다.
그리고 신기에 가까운 의약술에 힘입어, 선우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부서진 단전과 내공은 회복되지 못했지만, 불과 며칠 만에 정상적인 거동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
가공할 내력, 그리고 의술.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너도 한 모금 주랴?”
곁눈질로 선우벽을 스치는 사내.
마찬가지로 노새 한 마리를 끌며 뒤를 따르던 선우벽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끌끌, 사실 줄 생각도 없었다~”
“…….”
사내를 따라 길을 나선 지도 어느덧 보름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볼수록 사내의 언행은 선우벽의 이해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노새에 올라타 산과 들을 지나, 도시의 객잔에 들르고 이따금 마을에 들러 약을 팔기도 했다.
정말로 약을 팔았다.
온갖 열과 성을 다해서.
“은공께선… 무림인이십니까?”
“넌 내가 무림인으로 보이냐?”
피식, 코웃음을 치는 이진천.
그야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강호는커녕 세가가 자리한 곤명 바깥으로도 나가본 적이 없는 선우벽이지만, 적어도 무림인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사내의 공력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고강하지만, 평소에는 그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선우벽은 점점 더 사내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은공은 무슨. 사내놈이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부를 셈이냐?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놈아.”
“하지만 제가 은공을 어찌…….”
“그야 네가 결정하기 나름이지.”
이진천의 낯이 선우벽을 향했다.
짐작건대 서른 남짓.
실제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는 청년의 기색이 채 가시지 않았다.
다소 추레한 행색이지만, 시종일관 미소가 감도는 얼굴에 자리한 호남형의 인상을 가리지는 못한다.
“뭐야. 아직도 못 정했냐?”
사내는 스스로를 ‘기연’이라 소개했다. 그야 목숨을 구명 받은 것만으로도 기연이라면 기연이다.
하지만 선우벽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 그는 자신을 따를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을 주겠노라 했다.
기연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며.
충분히 숙고한 뒤, 스스로 판단하여 결심이 들었을 때에 답을 하라고 했다.
“보다시피 난 약장수다. 뭐, 그 밖에도 이것저것 겸업 중이긴 하지만. 여하튼 날 따라오면 밥값 정도는 하게 해줄 수 있다.”
“…….”
“아님 뭐, 어떻게 하고 싶으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름을 고민했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절치부심 검을 익히고 무예를 갈고 닦아 가솔들을 지키고 언젠가 세가를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끈다.
선우벽은 그런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과거는 뱃속의 단전과 함께 통째로 뜯겨 나갔다.
지금의 선우벽은 앞으로의 일은커녕 자기 자신이 누군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망망대해에 던져진 듯한 기분.
“복수하고 싶으냐?”
이진천이 말했다.
“네 배때지에 칼을 꽂은 네 동생을 포함해, 너를 배신했거나 지켜주지 못한 가문의 혈육들을 모조리 도륙해서 씨를 말려버리고 싶냐 이 말이다.”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복수를 목표로 해야 하는가.
선우벽은 생각했다. 지난 일을 생각해본들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처음 보는 뒤틀린 얼굴로 자신의 척살을 명령하던 협. 어린 시절 제 몸보다 큰 검을 질질 끌며 자신의 뒤를 쫓던 협.
두 모습은 하나로 겹쳐지지 않았다. 다시 만나면 그 아이에게 검을 박아넣을 수 있을까?
“아둔하기 짝이 없구나.”
하암, 이진천이 하품을 했다.
“모양새를 보니 칼질은 쬐끔 할 줄 아는 것 같지만, 그 외에는 정말 천치 그 자체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선우벽은 웃었다.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복수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입은바 은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
“은공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약장수가 되라 하시면 기꺼이 받들겠—”
“하!”
터엉!
일순 콧방귀와 함께 텅 빈 술병이 날아들었다. 선우벽의 이마를 두드리고 땅에 떨어졌다.
“너 약장수가 우습냐?”
“…예?”
“사람을 죽이는 건 칼질 한 방이면 충분하지. 하지만 죽어가는 이를 살려내는 건 의원에게도 쉬운 일이 아냐. 죽은 이를 되살리는 건 화타와 편작이 와도 불가능하지. 단약의 무게는 목숨의 무게다.”
“…….”
“착각하지 마라. 너같이 머리가 느린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약장수가 못 돼.”
“그, 그러면 은공께서는 제게…….”
“뭐겠냐? 그나마 타고난 재능이 칼질뿐이라면 그거라도 열심히 배워서 제 밥값을 해야겠지.”
검.
그것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던 선우벽의 지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재능이 있었고 뜻이 있었다.
그러나… 선우벽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선우벽은 나무토막 하나 쉬이 잘라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끌끌, 표정하고는. 네가 단전이 없지 손이 없냐 팔이 없냐? 아니면 무슨 빌어먹을 놈의 천하제일인이라도 될 생각이었냐?”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선우벽은 생각했다.
이런 지경이 되었음에도 검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자신이 있었다.
혹은 검이 아닌 다른 어떤 길이 자신에게 있는지, 선우벽은 알 수 없었다.
계속 갈 수 있을까?
아직도 자격이 남아있을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날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새가 울었고 노새 두 마리는 순하게 길을 따랐다.
“뭐, 하기에 따라서는 못 될 것도 없긴 하다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진천이 혼잣말처럼 말을 흘렸다. 그리고 문득 앞서가던 그의 노새가 자리에 멈춰 섰다.
퍼뜩 상념에서 깬 선우벽이 앞을 향했다. 정면에는 어느새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나 있었다.
“내가 가르쳐줄 것은 별거 없다. 칼 쓰는 법, 그리고 덤으로 사는 법을 조금 가르쳐주마. 하지만 공짜는 아냐. 언젠가 대가는 치러야 한다.”
“…은공.”
“그러니 이제 선택해라. 기왕에 살아난 목숨, 네 나름대로 알아서 세상과 부딪혀볼지, 아니면 이 기이한 인연을 받아들일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