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
3화. 낙검문 (1)
두 사람은 곤명을 가로질렀다.
사흘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곡정에 접어들었다. 그러고도 북동쪽으로 며칠을 더 나아갔다.
여정 내내 노새들은 큰 불평도 없이 두 사람을 싣고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몇 개의 도시와 마을을 지나는 동안 이진천은 약을 팔았고 혹은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
중원 남서부 끄트머리에 위치한 운남성에는 한족뿐 아니라 다양한 이민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선우벽 역시 배워서 알고는 있었으나 막상 그들과 직접 맞닥뜨려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진천은 마치 그 지역 나고 자란 양 그들의 방언을 구사하며 태연히 섞여들곤 했다.
“아이구, 어무니. 허리가 안 좋으셔서 워째? 에이, 기분이다! 내 한 알 그냥 거저 드릴 테니 이것 한 번만 드셔 보셔유~.”
“아따 요것이 거시기 사내한테 참 좋은 건디 내 표현할 방법이 없네! 아주 그냥 팔딱팔딱! 앙?! 알아들어, 형씨?!”
“…….”
선우벽은 그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의 그만두었다. 그리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정확한 행선지도 묻지 않았다.
은인을 의심해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이미 따르기로 결심한 몸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두 사람은 노새조차 팔아치우고 직접 두 발로 길을 걸었다.
그간 선우벽의 외상은 대부분 회복되었다. 내공이 없는 몸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끼익, 끼익!
“왜? 힘드냐?”
“…아닙니다.”
이건… 예상 밖이군.
현재, 선우벽은 맨손으로 수레를 이끌고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수레 위에는 이진천이 각지에서 산 잡다한 물건들이 한가득 실려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단전이 멀쩡했다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선우벽은 이제 겨우 상처가 아문 찰나.
자연히 몰골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온몸은 땀에 푹 젖었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댄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그런 선우벽을 바라보는 이진천은 마냥 웃는 낯이었다.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
선우벽은 묵묵히 앞을 향했다.
한 번도 이런 식의 수련을 해본 적은 없지만, 당연히 여태까지와 같을 수는 없다.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그것은 선우벽의 내공이 어느 수준에 오른 이후 줄곧 잊고 있었던 생생한 감각이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
“우후후후후, 그럭저럭 밥값 정도는 할 수 있겠구만. 아둔한 것도 그 나름대로 써먹어 볼 일이야.”
무념 속에서 한 발자국씩 다리를 떼던 선우벽은 이진천의 속삭임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에 울타리가 보였다.
“다 왔다. 이곳이 앞으로 네가 살아갈 새로운 삶의 터전이다. 길을 잘 새겨두도록 해라.”
“…네, 문주님.”
꾸벅, 선우벽은 고개를 숙였다.
갈림길 앞에서 이진천을 따르기로 결심을 굳힌 순간, 선우벽은 두 가지 자격을 부여받았다.
하나는 이진천 본인을 ‘문주님’이란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이었다.
즉, 어엿한 문파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아직은 어떤 문파인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이진천 정도의 고수가 이끄는 문파가 그저 그런 집단일 리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환영한다, 이벽. 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너는 이 마을의 구성원이 된 것이다.”
울타리의 문을 지나며, 이진천이 말했다.
“…….”
이벽이라.
세가를 떠난 선우벽은 더 이상 선우 씨일 수 없고, 이진천은 선뜻 자신의 성씨를 내려주었다.
어색하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아니, 익숙해져야 한다. 이벽은 짧은 상념을 털어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산골마을이었다.
어림잡아도 호가 백여 채를 넘지 않는 한적한 촌락. 여태껏 이런 마을을 몇 개는 지나쳐왔다.
어딜 보아도 이진천 같은 기인이자 고수가 살아갈 법한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좌우간 이벽이 가쁜 숨을 고르려던 찰나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 문주!”
저만치 나무 아래에서 술병을 기울이던 노인이 아는 체를 해왔다.
“아이고, 어르신! 강녕하신지?”
“껄껄껄! 자네구만! 드디어 왔어! 원, 꽃 필 때쯤 나섰던 이가 여름이 다 되어서야 나타나다니, 그래 늦어서야 쓰나!”
“아하하, 일이 그렇게 되었습죠!”
“하여튼 자네 귀여운 제자가 아주 단단히 뿔이 났으니 각오를 해야 할… 응? 그 아인 누구인가?”
“후후, 새 제자입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문득 노인의 시선이 이벽의 위아래를 훑었다. 수레에 시선이 닿자 으흐흐, 하고 웃음을 흘린다.
“그래. 잘 됐구만. 잘 됐어! 우리 화정촌에 온 것을 환영한다 꼬마야.”
“…감사합니다, 어르신.”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시골 노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이 노인도 이진천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공력을 숨긴 고수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당연하다는 듯 이진천에게 ‘문주’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앗! 문주! 이 문주 아닌가!”
“문주님! 제가 부탁한 물건이요!”
“아이고, 문주님! 어딜 갔다 이제 오셔요! 우리 바깥양반이 문주님을 얼마나 찾았는지!”
게다가.
두 사람이 마을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내내, 마주치는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문주님’을 반겼다.
이진천은 그 모든 환대에 웃고 화답하며, 때로는 수레로 싣고 온 물건들을 나눠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누구도 무림인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다. 역시 지극히 평범한 촌민들일 뿐이다.
“자, 여기다.”
다소 황망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이벽은 잠자코 이진천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을 중심의 어느 대문 앞에서 마침내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춰섰다.
[樂劍門(낙검문)]멋들어진 글씨체의 현판.
문자 그대로 읽자면 ‘즐거운 검문’이라는 뜻이 된다.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이곳이 네 새로운 사문이다.”
“…네, 문주님.”
끼익, 이벽은 문을 열었다.
휘이익!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안쪽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이벽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거기에 검은 없다.
퍼억, 툭!
날아든 공이 이벽의 얼굴에 부딪혔다. 그리고 땅에 떨어졌다. 데구르르, 구른다.
“…….”
이벽은 황망한 기분으로 문 안쪽을 둘러보았다. 무림문파라고 하기에는 퍽 규모가 작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몇 개의 집칸이 딸린, 조금 큼직할 뿐인 여염집 같았다.
그리고 연무장으로 보이는 공터에는 열댓 명 가량의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이벽보다는 서너 살 아래.
그 시선들이 이쪽을, 정확히는 공을 향하고 있다. 어느 모로 보아도 무공을 수련 중이던 모습은 아니다.
“엥? 뭐야 저 녀석?”
“우리 마을 사람 아닌 것 같은데?”
“앗, 문주님! 문주님이다!”
그때, 이진천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순 이벽을 향한 모든 관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르르르.
“문주님! 맛있는 거 사 왔어요?! 저 삼재검 다 뗐어요! 책거리해요!”
“저도! 저도요!”
“으흐흐, 그래그래. 우리 귀염둥이 고객… 아니, 속가제자들! 잘 있었어? 밥 잘 먹고 무공 쪼금만 하고 엄마 말씀 잘 듣고?”
몇몇이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이벽을 무시하고 그대로 이진천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말 그대로 원숭이처럼 매달렸다.
무림문파의 기강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대낮부터 당연하다는 듯 연무장 한가운데에 굴러다니는 공.
“…….”
쿵, 쿵, 쿵.
그때 무겁게 땅이 울렸다.
저만치에서 거구의 인영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흡사 작은 산이 걸어오는 듯한 위압감.
처음으로 무림인 같은 모습을 한 이가 나타났다. 이벽은 거한이 반가워지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꾸벅.
거한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문주님.”
“이야, 어쩜 대웅이는 키가 더 컸냐? 콩나물도 아니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구만?”
다음 순간, 거한의 시선이 이벽에게로 향했다. 이벽은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거한을 마주했다.
의외로 나이가 많지 않은 듯, 얼굴에는 아직 앳된 구석이 남아있었다.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긴장이 일어난다.
“아, 그래. 인사해라. 이 녀석은—”
휭휭휭!
채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또다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벽이 눈치를 챈 순간. 그 물건은 이미 번개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터엉!
그리고 대문에 틀어박혔다.
이진천이 황급히 물러섰기에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저 물건이 틀어박힌 곳은 문이 아니라 그의 정수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 부엌칼이.
“피해? 지금 피했어요?”
“이, 이야, 소미야. 우리 사랑스러운 대제자! 잘 있었어? 나 많이 보고 싶었지?”
멀찍이에 소녀가 서 있었다.
이벽과 동갑이거나 한두 살 위.
평범한 시골 여인네의 차림새를 하고 있지만, 척 봐도 내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 정도의 미인.
하지만 그 여리여리한 몸은 현재 분노에 젖어 격하게 떨리고 있다.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덥썩.
“으아아아! 이 썩을 놈의 인간아! 문주란 인간이 살림은 나 몰라라 몇 개월씩이나 유람질을 해?! 아주 살판 났지? 앙?!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거야?!”
“으억 잠깐! 소미야! 침착해! 애들도 보잖아! 이거 돈! 나 열심히 돈 벌어왔다니까?!”
“흥! 어디 내놔봐요!”
다짜고짜 이진천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대기 시작하는 소녀. 그리고 이진천의 주머니를 덥석 낚아챈다.
쨍그랑! 쨍그랑!
“흥! 이까짓 푼돈! 몇 푼 되지도 않는구만! 뻔하지 뭐! 또 보나 마나 기루에라도 눌러 붙어서 흥청망청 노셨겠지!”
주머니를 털자 얼마 남지 않은 동전 몇 푼이 땅에 떨어졌다. 더욱 광분해서 한참을 흔들다가는 문득 소녀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효, 내 팔자야.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갖고 이런 산골짜기에서 식모살이를…, 응? 뭐예요, 이 꾀죄죄한 꼬맹이는?”
“으응. 그게…, 네 새로운 사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콰득!
“커윽!”
“이 인간이! 군식구를 또 늘려?!”
* * *
탁!
소녀가 밥상을 내려놓았다.
상위에는 세 그릇의 잡곡밥과 맑은 국물, 그리고 몇 가지 간단한 찬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자, 먹어. 밥.”
하아, 들릴 듯 말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소녀는 상 한 쪽에 주저앉았다.
“사저, 문주님은?”
“알 게 뭐니 그런 소 같은 인간? 퍼질러 잠들었는데 배고프면 알아서 풀이나 뜯어 먹으라지.”
“…….”
거한과 소녀.
이벽은 함께 상을 마주한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두 사람은 사형제지간인가.
“왜? 반찬이 불만이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소녀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흥, 아니기는. 딱 봐도 어디 부잣집에서 살다 온 도련님 같은데. 미안하지만 이 동네에서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야.”
“….”
달그락달그락!
이진천은 잠자코 수저를 들었다.
허기진 탓인지 보기보다 맛이 좋았다. 말을 꺼내려다 문득 이벽은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됐어. 얘기하지 마. 너에 대해선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대충 다 상상이 되니까.”
입을 떼기도 전에 가로막혔다.
“뻔하지 뭐. 너, 단전 없지?”
꿈틀.
이벽은 진심으로 놀랐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원래 어디 명망깨나 있는 동네에서 무공으로 신동 소리 좀 듣다가 말 못 할 사정으로 단전 잃고 우리 문주님한테 주워진 거지?”
“…….”
이벽이 벙찐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어떻게 아냐고? 왜냐하면 우리도 비슷하거든. 나도 없어, 단전. 그리고 얘도.”
“…….”
“나쁜 말은 안 할게.”
탁, 소녀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 다 먹고 한숨 자고, 내일 아침에 산을 내려가. 여비 정도는 챙겨줄 테니 말야.”
“…왜지?”
그것은 부드러운 축객령이었다.
그런가. 이 소녀는 이벽을 문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널 위해 하는 말이야. 단전이 없어도 무공을 익힐 수 있다… 그런 헛소리에 놀아났다간 네 인생은 나락으로 빠질걸. 순 사기꾼이야 그 인간.”
“…….”
“사저, 그건 아닌 것 같아. 문주님을 나쁘게 헐뜯는 건 좀…….”
“아, 시끄러 곰탱아!”
탁!
잠자코 밥을 먹던 거한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순간 소녀의 숟가락이 거한의 손등을 두드렸다.
“하아~ 뭐, 그래. 확실히 말도 안 되긴 하지. 우리 잘난 문주님께선 단전도 없고 기혈도 엉망진창인 주제에 온갖 정체모를 무공을 펑펑 써대니까. 하지만 그건…….”
“…잠깐 뭐라고?”
“응? 뭐가? 내 말이 이상해?”
“문주님께, 단전이 없다고?”
“어? 뭐야. 설마 너, 그럼 그런 것도 모르면서 여기까지 쭐레쭐레 따라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