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30)
134화. 화영지정 (1)
이벽이 검을 거둔 이후.
주루 안쪽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난자된 피를 비롯한 전투의 흔적들을 묵묵히 지우기 시작했다.
솜씨는 퍽 능숙해 보였다.
공터는 빠르게 제모습을 찾았다.
‘…하오문도인가.’
이벽은 직감했다.
이들은 무림인이 아니다.
허나 하오문이란 집단 역시 그 뿌리는 무림세력이 아니며, 그 문도들은 천하의 각계각층 속에 골고루 섞여 있다고 했다.
꾸벅.
이내 청소를 마친 사내들 중 하나가 월향에게 다가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응, 수고했어요~”
“…….”
다음 순간, 사내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빠르게 위아래를 훑어본다.
“…뭐요?”
이벽이 말했다.
문득 순간적인 위화감이 스쳤다.
꾸벅, 그때 사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벽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 다시 돌아섰다.
사내들은 의식을 잃은 남궁천수를 비롯한 숭무관의 제자들을 수습하여 어디론가 데려갔다.
“아, 죄송해요… 다들 소협에 대해 많이 궁금했나 봐요. 아무래도 무려 ‘그분’의 제자이시니까요.”
“…….”
이벽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하오문 수호대의 패를 지니고 있으나, 여전히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 우리도 이만 들어갈까요?”
“…어디로 말이오?”
“어머, 글쎄요. 기녀와 사내가 둘이 만나 함께 들어갈 만한 곳이 달리 얼마나 있겠어요?”
“…….”
“아하하, 농담이에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아서… 쓸데없는 참견이었나요?”
월향이 가볍게 웃었다.
말마따나 이벽은 퍽 어색했다.
‘주안술’이라고 했지만… 어제의 그녀와 오늘의 그녀는 외모 외에도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수호대에 적을 두고 있노라 했다.
스스로를 약장수라 소개하기를 좋아하는 이진천, 그리고 백정 고 노야와 환쟁이 초연서에 이어.
그녀는 스스로를 ‘기녀’라고 했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조금 전 그녀의 피리 소리는 평범하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이벽으로 하여금 환영을 불러일으켰으며, 날뛰던 적파심공을 거짓말처럼 가라앉혔다.
“저어… 이상한 소리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우선은 소협의 상처를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월향이 조심스레 말했다.
“…….”
이벽은 그제서야 남궁천수의 기습에 의해 입은 상처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 * *
이벽과 월향은 주루로 돌아왔다.
간밤에 묶었던 방으로 들어선 뒤 이벽은 겉옷을 벗고서 상처를 드러내었다.
“…흉터가 참 많네요, 소협은.”
“…….”
이내 월향이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이벽은 문득 약의 향이 퍽 익숙하게 느껴졌다.
“많이 아프죠? 며칠이면 씻은 듯이 나을 거예요. 뭐니 뭐니 해도 소협의 스승님께서 만드신 물건이니까요.”
“그렇군.”
그것은 그녀가 수호대원이라면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신기에 가까운 효능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이미 목숨을 구해지기도 했다.
“…소협, 혹시 제 본래 모습이 어색하신가요? 그러시다면 다시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
그녀의 외형이 어떻건 상관할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이벽은 지난밤 그녀와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비슷한 나이대를 가장한 것을 포함해 그 모든 언행들이 그저 자신을 떠보기 위한 연기였다고 생각하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소. 그보다 소저께선 내가 여기에 있고 하오문을 찾은 이유에 대해 알고 있소?”
“아, 아무래도 좋군요…….”
파르르, 웃음을 띤 월향의 눈가가 작게 흔들렸다. 허나 그녀는 곧 표정을 바로잡았다.
“험, 그야 물론 알고 있지요. 정보집단을 자처하는 우리 하오문이 정작 제 자신의 정보에 느려서야 되겠어요?”
“…….”
“그… 소협을 보필하던 언미희라는 아이가 남궁세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겠지요?”
“다행히 이야기가 빠르겠군. 헌데 소저 혼자뿐이오? 수호대의 다른 대원들은?”
“그, 그게…….”
월향은 말끝을 흐렸다.
“…….”
앞서 초연서는 말했다.
수호대의 상징인 수호령주는 일종의 ‘동원력’으로서 천하 각지 하오문도들의 인력을 빌릴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허나 상대는 무려 남궁세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무력이 되지 못하는 인력이 백 명이고 천 명이고 모여본들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벽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무력이었으며, 이벽이 아는 한 수호대야말로 사실상 하오문이 지닌 무력의 거의 전부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벽이 지닌 수호령주는 대주의 자격을 지닌 물건으로써 다른 수호대원의 힘 역시 빌릴 수 있다고 하였다. 허나.
“그렇게 되었네요. 다들 각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 그나마 어떻게든 일손이 비는 제가…….”
“…….”
이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어디까지나 대리일 뿐 수호대주는 아니오. 그 점은 잘 알고 있소. 허나 언 소저는 하오문의 일원이오. 남의 일도 아니거늘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너무하는군.”
이벽은 화가 났다.
누구의 판단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따지고 보면 애초에 언미희를 대표 후기지수의 자격으로 사패련에 보낸 것은 하오문이다.
“죄, 죄송해요…….”
“그런 얘길 듣고자 한 건 아니오. 어차피 소저에게 화를 낸들 소용없는 노릇이겠지.”
“하지만… 그 아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소협. 사실은… 남궁세가 측에게 이미 연락을 받았거든요.”
“……!”
덥썩, 그 순간 이벽이 월향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흠칫, 월향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남궁세가의 연락을 받았다고? 하오문이 말이오?”
“윽, 그게… 전령이 왔다고 해요. 그 아이라면 상처 하나 없이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니 소협더러 남궁세가로 찾아오란 전갈을 남겼다더군요.”
“…….”
‘보호’.
그것은 퍽 우스운 말이었다.
결국은 그녀를 통해 이벽을 노리는 남궁세가의 입장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아마… 남궁세가로서도 일이 번지는 건 막고 싶었겠죠. 그러니 하오문과 남궁세가 간의 문제로 축소시키려는 생각일 거예요.”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먼저 접촉을 해왔다는 것은 즉,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공손수의 예상과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기, 공자… 소, 손을.”
“…실례했소.”
무심코 손에 힘을 주었던 이벽은 월향이 신음을 흘리자 그제서야 어깨를 놓았다.
그리고 생각에 빠졌다.
어쨌건 언미희가 당장은 무사하리란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가슴 한켠에 안도감이 스쳤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오늘 아침 운 좋게 이쪽에서도 ‘보호’할 인질이 생겼으니… 어떻게든 서로 간의 뜻을 조율할 수 있겠지요. 다만.”
말을 잇던 월향이 문득 목소리를 달리했다.
“의혈맹이 껴선 곤란해요.”
“…….”
“그러니까… 결국은 남궁세가만의 문제로 한정시켜야 하는 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인 셈이에요.”
의혈맹.
당가도, 모용세가도, 남궁세가도.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의 처음 시작은 이벽을 향한 의혈맹주의 추포령이었다.
“걱정마시오. 이쪽에도 생각해둔 방식이 있으니.”
“…네? 어떤?”
“하오문에 남궁세가 측의 전령이 접촉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조건들을 그쪽에 전달해주시오.”
* * *
후욱.
이벽의 검이 움직였다.
청강검식의 여섯 묘리가 물 흐르듯 펼쳐졌으며, 곧이어 선우세가의 직계비전, 청강유엽검식이 이어졌다.
한 초식, 한 초식.
오롯이 무리를 담아 펼쳐낸다.
스스스.
이벽은 검끝을 스치는 바람의 흐름을 느꼈다. 선우세가의 검공은 이미 이벽의 심신에 녹아있었다.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다.
그러한 이벽의 검을 일컬어 송영영은 도가의 검들을 본떠 한데 엮어놓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허나 화는 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벽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닮은 점이 지나치게 많아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청강유엽검식의 발검식 직검은 점창의 검을, 회검식 유검은 무당의 검을 닮아있었다.
허나 동시에.
여전히 그것이 청강유엽공의 한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령 누군가의 껍데기라고 한들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뿌리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이벽은 이미 청강유엽검식의 ‘완성’을 눈으로 목도한 적이 있었다.
그날, 이진천이 펼쳤던 그 검에는 아직도 닿기는커녕 온전한 이해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후우.”
이벽은 크게 호흡했다.
그리고 마음을 휘었다.
그러자 선천의 힘이 경로를 틀며 만월무변심공을 일으켰다. 청아하고도 요사한 기운이 이벽의 안에 들어찼다.
이벽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팔절구궁필법의 경로를 따라 빈공간에 달이 차오르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흡사 밀물과 썰물처럼 사방의 풀들이 우수수 모여들고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휘어지되 변하지 않는다.
만월무변심공의 묘리는 스스로의 고정된 모양에 얽매이지 않되 본질을 붙드는 것에 있었다.
멈칫.
이벽의 검이 멈추었다.
“…….”
가진 검들을 점검했으되 아직 한 가지의 검이 더 남아있다. 잠시 망설임이 일었다.
허나 도망칠 수는 없다.
이벽은 살심을 일으켰다.
후우욱.
그러자 그 즉시 만월무변심공이 휘어졌다. 적파심공의 내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크.”
몸 안에서 피 냄새가 차올랐다.
이벽은 이를 악물었다. 흡사 피로 버무려진 진흙과 같은 혼탁한 기운이 혈로를 내달린다.
후웅, 훙!
이벽은 도살지도를 펼쳤다.
바람을 가르는 검의 소리가 달라졌다. 어느새 이벽의 눈앞에는 가상의 적들이 나타나 있었다.
그들은 산적들이었고 강시들이었으며, 팽가의 무인들이기도 했다. 이벽은 그들을 마구 찢어발겼다.
저미고, 깎으며, 끊고, 짓누른다.
뼈와 근육, 살점들의 경계를 타고서 검이 움직인다. 누적된 살육의 감각과 함께 쾌락이 스쳤다.
쿵, 쿵.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상의 적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느꼈을 때, 이벽은 즉시 검을 멈추었다. 허나.
휘오오오.
적파심공은 멈추기를 거부했다.
일찍이 경험했듯, 기세를 탄 적파심공은 또다시 이벽의 의지를 무시한 채 혈도를 내달렸다.
“…….”
꽈악.
이벽은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목구멍에서 피의 향이 올라온다.
만월무변심공의 가르침으로 정신을 붙들고 있으나, 마치 홍수에 휩쓸리는 묘목처럼 위태로웠다.
‘…안 되나.’
그리고… 그 홍수에 휩쓸리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벽이 내상을 각오하고서라도 억지로 기를 멈추려던 그 순간이었다.
휘이이.
피리 소리와 함께 꽃이 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환영 속의 꽃이 저물고 힘이 빠진 이벽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
피리를 쥔 월향이 다가섰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소협께선 분명히 초 대협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었는데 어째서…….”
곡조의 이름은 화영지정(花影之情)이라 하였다. 그것은 노랫가락임과 동시에 그녀의 ‘독문무공’이기도 했다.
남궁천수와의 일전에서 이벽은 끝끝내 살심을 억제하지 못했다.
월향의 연주가 아니었다면 결국은 남궁천수의 목을 베었을 것이며.
아마도 관채령을 비롯한 나머지 숭무관의 제자들 역시 멀쩡히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퍽 무서운 일이었다.
적을 죽여야 한다면 죽여야 한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판단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혈기에 놀아나는 살귀가 되어선 안 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월향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뒤 문득 이벽에게 검의 견식을 부탁했다.
퍽 의아했으나, 그녀의 눈빛으로부터 어떠한 생각을 읽어낸 이벽은 그리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짚이는 바는 있소.”
이벽은 설명했다.
돌이켜보면, 초연서의 만월무변심공을 처음 깨우쳤을 때만 해도 살기를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허나… 이벽은 암영각을 오르기에 앞서 동촌장 목일령에게서 증혈환을 받았다.
혈기는 증폭되었고.
적파심공은 강해졌으며.
통제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과연 그렇군요. 만월무변의 묘리로도 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공자에게서 비롯되지 않는 ‘불순물’이 마음에 끼어들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군.”
이벽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비록 그녀는 일신에 지닌 내력은 대단치 않았으나, 이벽이 전수받은 타 수호대원들의 무공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벌써 두 번이나 이벽의 폭주를 막아주었다.
‘…음공.’
그것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새겨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소협. 감히 말씀드리자면, 모처럼 얻은 힘이니 꽁꽁 숨겨두는 것보단 꺼내어 갈고 닦아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월향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쩌면 지금 당장 소협에게 가장 필요한 검이기도 하구요. 마침 제가 있으니 어떻게든 도움을…….”
“…그렇군.”
이벽은 다시 일어섰다.
“…주제넘은 소릴 해서 죄송해요.”
“아니, 사과할 일은 전혀 아니오. 오히려 도움을 얻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지. 무엇보다도.”
목적은 뚜렷해졌다. 강해져야 할 이유도, 방법도 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벽은 계획을 생각했다.
“천하의 남궁세가주에게 도전하려 하는 찰나에 그만한 어려움이 따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아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