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56)
160화. 산동으로 (1)
다그닥, 덜컹.
마차가 객잔 앞에 섰다.
마부석에 앉은 사내는 퍽 눈에 익었다. 이벽이 월향과 함께 남궁세가로 향하던 내내 마차를 이끌었던 하오문의 사내였다.
허나 이벽은 마차에 타지 않는다.
마차에 타는 것은 이벽과 철면개, 취풍신개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이었다.
“케헤헤, 딱 기다려라, 대주! 지금이야 내가 약해빠져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난다지만… 다음에 볼 땐 놀라서 눈깔 뒤집어지게 해줄 테니까!”
슥, 파진성이 이벽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행여라도 내가 너보다 강해져 버리면 그땐 내가 형님이다. 알지?”
“…….”
피식, 이벽은 웃었다.
“기대하고 있지, 파진성.”
“헹, 맘에도 없는 소리하고는.”
툭, 파진성이 이벽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마차에 올라탔다.
“하여간에 협객도 좋고 질서, 공존… 뭐 다 좋은데 말야. 엄한 데서 죽지 말고 잘 살아있으라고. 최소한 내가 진 빚 다 갚을 때까지는 말야. 케헤헤!”
“오라버니.”
그리고 공손수가 다가왔다.
“뭐… 잠깐의 휴가라고 했으니 쓸데없이 긴 말은 안 할게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여러가지’로요.”
“…….”
공손수의 눈이 조용히 빛났다.
이벽은 의혈맹과의 담판을 짓기 위해 황보세가를 향하기로 했다.
허나 그간 비룡대의 행보를 둘러싼 의혹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천방, 녹림, 혈교.
그리고.
“…….”
이벽은 산서의 진량현에서 강시들과의 일전을 치른 이후 공손수와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일행은 때마침 나타난 개방의 장로 누명개에 의해 목숨을 구해졌다.
허나 그 지나친 ‘시의적절함’은…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의혹들이 쌓이고 쌓여서, 마치 어둠에 깔린 숲속을 지나는 듯했다. 허나.
어쨌건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조만간 다시 만나지.”
“네, 물론요. 그나저나 송 소저, 조금 걱정이네요. 무당이야 바로 옆의 호북이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송영영은 먼저 떠나버렸다.
비룡대 일행이 모여 대화를 나누었던 때, 파진성의 늑골에 주먹을 쑤셔 박은 뒤, 그대로 짐을 챙겨서 객잔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행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가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나타났던 것이 갑작스러웠듯, 사라지는 것 또한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신경 쓰이면 찾아가면 그만이지.”
“네?”
“오고 싶으면 오라고 하지 않았나? 초대를 받았는데 못 갈 이유는 없지.”
“…하긴 그러네요.”
피식, 공손수가 웃었다.
그리고 공손수 역시 마차에 올라탔다. 이벽은 잠시 마차를 올려다보았다.
언미희는 이미 마차 안에 타고 있었다. 그녀는 소환단을 복용했고, 이벽은 선천의 힘을 이끌어 냈다.
내력을 전혀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하여 이벽은 일주천을 마쳤고, 이내 소환단의 공력을 그녀의 단전에 안착시켰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당장에 심마를 극복하고 내력을 회복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언미희는 잠에 빠져들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언미희는 분명 잘 해낼 것이다.
허나 당분간은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며, 일행들은 그 역할을 잘해 줄 것이다.
“흠! 커흠.”
“아하하…….”
그리고 남은 두 사람이 다가왔다.
“신세 많이 졌소, 양 문주. 그리고 월향 소저.”
이벽은 포권했다.
“…핫.”
양호명이 코웃음을 쳤다.
“이제 다시 호남으로 돌아가면 금강회 놈들이랑 지지고 볶아야 하는데… 괜히 살려줬나 후회가 되는군 그래.”
“…….”
“좌우간에 잘 있게, 비룡대주. 내 며칠 있어 보니 맹주님의 뜻을 알 것도 같네. 자네는 충분히 갱생이 가능한 인물이야.”
‘갱생’.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허나 곧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내 양 문주의 얼굴을 봐서 다음 번 정검문이나 혹은 점창의 제자와 싸울 일이 생긴다면 한 번은 봐드리겠소.”
“…푸핫!”
양호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문득 눈빛을 번뜩였다.
“그것참 고맙군 그래. 그렇다면 나 역시 충고 한마디 하겠네. ‘과거’를 숨기고 싶다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지 않겠나?”
“……!”
이벽의 어깨가 움찔했다.
일찍이 양호명은 이벽의 청강검식에서 선우세가의 흔적을 알아보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 점창에서 수학하던 시절에 옆동네 운남 땅에도 종종 갈 일이 있어서 말일세. 어쩌면 우린 이전에도 스치듯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르네.”
“…….”
“뭐,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네만… 이름마저도 그대로에 성씨만 바꾸고 돌아다니는 건 좀 너무 허술하지 않나?”
양호명이 피식 웃었다.
이벽은 할 말을 잃었다.
운남, 그리고 선우세가의 성씨.
이미 전말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좌우지간 자네 같은 기재를 제 손으로 잘라낸 그쪽 인간들의 수준도 알만하네. 어쨌거나 자네의 ‘진짜 뿌리’가 최소한 사마외도는 아닌 셈이니 맹주께서도 기뻐하시겠지.”
“…….”
이벽은 끝끝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크하핫, 한 방 먹인 게 뿌듯하다는 듯 양호명이 유쾌하게 웃으며 마차로 올라탔다.
“소협,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지만… 하오문은 언제나 소협과 함께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필요할 땐 언제든지 찾아주세요.”
“…….”
“언제든지요.”
이내 월향이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마차에 올라탔고, 마침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벽은 한동안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은 양호명에게 과거를 들키고 말았다. 허나 어째서인지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일말의 신뢰. 혹은.
‘…선우세가.’
피식, 이벽은 웃었다.
분명히 얽히고 싶지는 않다.
허나… 지금의 이벽은 과거 선우세가의 도달점이었던 남궁세가를 봉문시키고 온 입장이었다.
천하제일검가 남궁세가를 상대로 누구의 죽음도 없이 언미희를 구했고 할 일을 해내었다.
덕분에 간덩이가 부었거나, 혹은.
그만큼 과거의 악몽과 착실히 멀어져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럼 준비 됐나? 헐헐!”
“……!”
그때, 취풍신개가 말했다.
이벽이 옆을 돌아보자 어느새 늙은 거지가 태연히 다가와 있었다.
“그럼 지체할 것 없이 움직이세. 황보혁이 그 미친개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말일세.”
“…알겠소.”
안도감을 느낄 새조차 없었다.
이벽에게는 여전히 할 일이 있었으며, 사태는 언제나 거짓말처럼 급박했다.
탓, 후우웅!
“스, 스승님—! 스승니임!!”
허나 그때였다.
등 뒤에서 고함이 들렸다.
이벽이 뒤를 돌아보자 인영 하나가 부리나케 날아들고 있었다. 물론 철면개였다.
“엥? 네놈은 뭔데 여기 있느냐?”
“뭐, 뭐라뇨… 스승님의 직전제자 아닙니까! 아니, 떠나겠노라 해놓고선 다시 여기에 계시면 아니, 그런 것보다도—!”
두 사람의 등 뒤에 착지한 철면개가 목소리를 높였다. 허나 그런 것 치고는 말의 내용은 퍽 횡설수설 했다.
“에잉, 뭐라는 거야? 됐다 이눔아! 내 바쁘니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갔다와서—”
“저, 저는요!”
취풍신개가 역정을 내자 철면개가 황급히 외쳤다.
“…뭐라?”
“전 왜 안 데려갑니까, 스승님?!”
“…….”
사제지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 아니, 그렇잖습니까! 명색이 제가 직전제자인데 왜 저는 안 데리고 가고 자꾸 비룡대주만 예뻐합니까? 예?!”
“…푸헐! 이놈이 미쳤나? 떠줘도 해도 못 처먹는 아둔한 네놈을 탓해야지 어따 대고 성질이야?!”
“떠주긴 뭘 떠줍니까! 나이 먹고 언제 한 번 저한테 초식 반푼어치라도 가르쳐 준 적 있습니까!”
“아니 이놈이 그래도—!”
이내 삼십 줄이 넘은 거지와 노년의 거지가 서로를 향해 버럭버럭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아 됐고, 저도 데려가십쇼! 그리고 기왕에 비견개 형님도 있으니 같이 갑시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늙은이가 주책맞게 혼자 가려고—!”
“헹, 어림도 없다 이 거지놈아! 주제도 모르는 게 뻗댈 곳을 보고 뻗어야지 쪽박 깨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느냐?!”
허나 이벽은 생각했다.
사제지간의 거친 목소리 속에는 서로를 향한 걱정이 깃들어있었다.
상대는 권왕 황보혁이다.
취풍신개와 같은 천하십대고수이며, 그래선 안 되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 위험하지 않을 리 없다.
“아서라, 이놈아! 네까짓 놈이 그 자리에 끼어봤자 뭐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있을 것 같으냐? 이보게 비룡대주, 이제 그만—”
“…마, 마차!”
철면개가 황급히 외쳤다.
“그럼 마차는 누가 몹니까?! 예?! 산동까지 가는데 마부도 없이 갈 겁니까?! 설마 거지 주제에 사람을—,”
“마차? 그딴 걸 왜 몰아?”
취풍신개가 콧방귀를 뀌었다.
“걸어갈 거다, 이놈아!”
“…네, 네?”
철면개가 눈을 껌뻑거렸다.
“아, 아니… 산동까지요?”
“그래, 산동까지. 문제 있냐?”
“…….”
철면개가 당황했다.
동시에 이벽도 당황했다.
“아니, 시간이 그렇게… 걸어가기엔 사태가 많이 시급하지 않습니까?”
“푸헐! 시급하니까 걸어가는 거지. 내가 누구냐? 천하의 취풍신개다! 그까짓 거리 사흘이면 뽕을 뽑고도 남아야지!”
“…….”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나 동행하는 이벽은 물론 취풍신개가 아니었다. 밤낮 전력으로 경신공을 펼친들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낙검진천신공의 내력을 가진 이벽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불가능하지 않을’ 뿐이다.
“왜, 네놈도 오랜만에 이 사부랑 같이 정겹게 뛰고 싶으냐? 흘흘! 정 그렇다면야 내가 데려가 주마!”
“그, 그런…….”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 틈을 타 이벽이 뭐라 말을 꺼내려 했다. 어찌되었건 적진을 향해 가면서 기력을 낭비하는 일은 퍽 무의미하다.
허나 그때였다.
“다녀오십시오, 스승님! 그리고 스승님을 잘 부탁하오, 비룡대주! 그럼 불초 제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꾸벅, 철면개가 허리를 숙이며 황급히 외쳤다.
“…….”
* * *
훅.
“허헛, 헛!”
그리고.
퍽 예상대로의 상황이 펼쳐졌다.
타다닷.
이벽은 전력을 다해 청강유엽신법을 펼쳤다. 허나 그럼에도 취풍신개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아니, 속도는커녕.
위치조차 따라잡을 수 없다.
어떻게든 취풍신개가 있는 곳에 도달한 순간, 거지는 눈앞에서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미 저 앞의 작은 점이 되어있었다.
“뭘 하나, 어서 안 오고~?”
“…….”
도달하면 멀어지고, 도달하면 다시 멀어진다. 이것은 이미 ‘함께 달리는’ 것조차 아니었다.
허나.
타다닷.
이벽은 계속해서 땅을 박찼다.
일전의 소림에서 취풍신개의 뒤를 따라 절벽을 오르던 것을 생각했다.
취풍신개는 이벽을 막아섰으나, 이벽은 결국 그 벽을 넘어섰다. 그리고… 정상에 올라 이벽은 마침내 ‘하늘’을 보았다.
목천의 영역에 이르렀다.
훅.
“잘 달리는 것은 여전하이, 헐헐!”
“…….”
이벽은 따라잡고, 취풍신개는 다시 멀어졌다. 같은 일의 반복이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일 보.’
멀어지는 동작은 퍽 익숙했다.
그것은 자신이 목천의 영역을 끌어올려서야 간신히 한 발자국을 흉내 낼 수 있는 속도였다.
“허헛, 헛!”
허나 취풍신개에게는 모든 걸음걸음이 그와 같았다. 심지어는 그가 목천의 영역을 쓰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알 수 없었다.
쓰고 있건, 그렇지 않건.
말도 안 되는 것은 매한가지다.
‘여전히 멀구나.’
이벽은 쓰게 웃었다.
“허나 비룡대주, ‘이 앞’으로는 잘 달리는 것만으로는 안 되네. 하늘을 향해 나아간다는 건 말일세.”
“…그게 무슨 말—”
취풍신개가 씩 웃었다. 그리고 채 이벽이 되물음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다시 멀어졌다.
“…….”
이벽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해가 저물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줄곧 하루 종일, 두 사람은 북쪽을 향해 달렸다. 앞서가고 쫓아가고의 반복을 치렀다.
“…헉, 허억!”
그리고 마침내 이벽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물론, 경신공만으로 선천의 힘에 의한 내력의 흐름이 고갈되지는 않는다.
다만.
한계는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한나절을 넘게 단 한 번의 쉼도 없이 전력으로 달리자 마침내 육체가 순수한 한계에 이른 것이다.
“허억, 헉!”
심장이 터질 듯이 박동하고 근육이 찌어질 것만 같다. 그것은 칼에 베이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허나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벽은 고통 속에서 이러한 고행을 택한 취풍신개의 이유에 대해 생각을 거듭했다.
허나 곧 그런 생각도 사라졌다.
서서히 생각이 흐려진다.
그저 달리기를 반복했다.
털썩, 쿠웅.
“큭.”
어느 순간, 이벽이 쓰러졌다.
힘이 풀린 다리가 균형을 잃고 넘어진 것이다. 땅을 나뒹군 이벽이 그 즉시 다시 일어나려 했다.
허나 그때.
코앞의 땅 위에서 다 떨어진 신발 한 쌍이 잠자코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힘든가?”
“…….”
이벽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취풍신개가 작게 웃고 있었다.
“허억, 헉… 몰라서 묻소?”
“몰라서 묻네. 원, 자네가 언제쯤 힘들고 힘들지 않은지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
이벽은 침묵했다. 절대고수의 감각이란 어쩌면 진짜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힘들긴 하지만, 해야 한다면야 못할 건 없소. 적어도 절벽에서 두들겨 맞고 추락하는 것보단 훨씬 낫군.”
“그런가? 거 다행이구만, 헐헐!”
“헌데 왜 멈추셨소?”
“밥때가 되어서 말일세.”
뒤적뒤적, 취풍신개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육포 쪼가리를 꺼내었다.
“먹겠나?”
“…괜찮소. 먹으면 토할 것 같군.”
“헹, 배가 부르시구만?”
질겅, 취풍신개가 육포를 베어 물었다. 저만치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허억… 후우.”
이벽은 그대로 엎드린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찌되 었건 마침내 휴식이었다.
일 다경, 아니 그 절반이라도 휴식을 취한다면 어떻게든—
“엿차.”
허나 그때였다.
육포를 게 눈 감추듯 삼킨 취풍신개가 그 즉시 툭툭, 엉덩이를 털고 다시 일어났다.
“자 그럼.”
그리고 이벽을 향했다.
“어서 일어나게. 지금부터 약속했던 ‘훈수’를 시작하겠네.”
“…뭐요?”
이벽은 말문이 막혔다.
“…그럼 지금껏 달린 건 뭐였소?”
“뭐? 그건 그냥 달린 거지. 갈 길이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
취풍신개가 씩 웃었다.
“뭘 하나? 검 안 꺼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