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74)
179화. 잃어버린 물건 (2)
그것은 사람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암기의 폭우 한가운데에,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사람 하나가 허공을 딛고 서 있었다.
이벽의 눈이 부릅떠졌다.
형상의 정체를 다시 확인했다.
허나 그것은 눈의 착각이었다.
당연하게도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관점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했다.
말하자면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하늘을 백지, 그리고 쏟아지는 암기를 먹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곳에 놀랄 만큼 또렷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우연일 리 없다.’
이벽은 직감했다.
우우웅.
그 순간, 선천의 힘이 떨었다.
무언가의 단서를 발견한 순간, 스스로를 쥐어짜며 목천의 영역을 극한까지 쥐어 짜낸 것이다.
시간이 더욱 느려졌다.
이벽은 그림을 읽어내렸다.
이내 형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끝은 자유로이 하늘을 노닐었으며, 또한 쏟아지는 암기를 희롱하듯 청강유엽검식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
아니, 그러나 다르다.
그것은… 이미 이벽이 알고 있던 청강유엽검식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발검과 회검의 경계가 없으며, 여섯 개의 묘리가 아무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터무니없다. 허나.
‘처음 보는 검이 아니다.’
그것이… 결코 허무맹랑한 환상 속의 검이 아님을 이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쿠쿵!
벼락과 같은 충격이 일었다.
그것은 화정촌을 떠나기 전날, 어둠 속에서 이진천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마지막 초식이었다.
그 순간.
이내 이벽의 눈에 비친 하늘의 형상이 이진천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이진천이 다시 검을 펼쳤다.
그날. 그 밤.
이벽은 충격에 빠졌었다.
‘어떻게 그런 검이 가능한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펼쳐지는 검무 속에서 이벽은 이진천의 검이 아닌 발을 보았다.
그의 발끝에서는 연엽보를 흡수한 청강유엽신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허나.
이제는 보였다. 그리고.
검공, 경신공, 그리고 심공.
그 모든 경계가 희미해졌다.
이윽고 이벽은 ‘온전히 하나가 된’ 선우세가 무공의 정수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쩌면.
청강검식과 청강유엽검식이 그랬으며 또한 연엽보와 청강유엽신법이 그랬듯.
선우세가의 모든 무공은 처음부터 단 하나의 검공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짜르르.
전율이 흘렀다.
이벽은 손을 뻗었다.
—형님, 죽어주십시오.
허나 그때였다.
이벽이 마침내 ‘새로운 검’을 손에 쥐려는 바로 그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림자가 속삭였다.
“싫다.”
이벽은 대답했다.
이 순간을 놓쳐선 안 된다.
허나 이 절벽은 이벽의 모든 악몽이 시작된 뿌리와 같은 장소였으므로, 그림자는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감히, 천한 몸종의 자식 주제에 그 검을 들고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다시 악몽이 말했다.
말인즉슨 악몽은… 이벽이 ‘선우세가의 검’을 쥐려 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 듯했다.
“이것은 선우세가의 검이 아니다.내 스승의 검이며, 나의 검이기도 하다. 또한.”
허나 이벽은 답했다.
“…선우협, 세가의 검이라면 이미 너에게 돌려주지 않았느냐?”
아무것도 빚진 것은 없다.
문득, 이벽은 ‘옛 검’을 떠올렸다.
그것은 일찍이 선우세가의 가주에게서 소가주에게로 이어져 내려오던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그리고.
소가주의 신분, 그리고 선우세가의 선우벽이란 신분과 함께 이제는 ‘잃어버린 물건’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였나.”
불현듯 이벽은 이해했다.
당평세가 그렇게나 누차 반복하던, 잃어버린 물건의 이름이 마침내 떠올랐다.
그리고 옛 검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당연하다는 듯 그것은 새로 얻어낸 검의 이름이 되었다.
피식, 이벽은 다시 웃었다.
악몽에게 도움을 얻고 말았다.
휘오오오.
그리고 마침내.
까마득한 절벽도 거의 끝이 났으며, 형체를 이루던 바닥은 마침내 선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다.
허나… 두려움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지척까지 이른 바닥이 아니라 하늘을 메운 암기였다.
‘뚫고 올라간다.’
이벽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청강유엽공의 내력이 강물처럼 몸 안을 휘감았다.
발검식도, 회검식도 아니다.
하늘로 나아가기 위한 검이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창공비검(蒼空飛劍).
후욱.
이벽의 몸이 솟구쳤다.
* * *
창공비검.
그것은 선우세가의 모든 가르침을 담은 무공임과 동시에 단 하나의 초식으로 수렴하는 검이었다.
마음에는 강이 흘렀고.
발끝은 허공을 디뎠으며.
검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후우욱.
이벽의 몸이 마침내 암기의 무리에 근접했다. 지척에 이르자 그것은 비보다도 차라리 한 덩어리의 구름과 같았다.
머리 위를 드리운 죽음의 구름.
허나 이벽은 멈추지 않았다. 검과 함께 솟구친 몸이 망설임 없이 구름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쐐애애액.
그 순간 무수한 잡음이 일었다.
구름의 안쪽에서 암기는 범람하는 강물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며, 흐름에 끼어든 이벽의 존재를 용납치 않았다.
모든 방향, 모든 각도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허나 이벽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후욱.
직, 쾌, 강, 곡, 변, 유.
여섯 개의 무리가 검 끝에서, 발끝에서 교차하며 생각보다 먼저 이벽의 몸을 이끌었다.
이내 이벽은 나뭇잎이 되었다.
나뭇잎은 강물의 흐름을 타고 노닐었으며, 암기는 단 한 자루도 이벽을 스치지 못했다.
“…….”
이벽은 마침내 이진천의 형상이 그에게 보여주었던 검무가 자신의 몸에 스며들었음을 확인했다.
이벽은 만족했다. 그리고.
스윽, 일검을 뻗어 올렸다.
콰아아앙!
그 순간 구름이 ‘폭발’했다.
주변을 감싼 암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것이다. 훅, 그리고 이벽의 신형이 한 마리 용처럼 솟구쳤다.
타악.
암기의 구름을 벗어난 신형이 다시 절벽 위로 올라섰다. 마침내 땅을 디뎠다.
“…….”
이벽은 당평세를 마주했다.
당평세는 여전히 처음과 같은 자리에 선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스윽.
문득 당평세가 팔을 뻗었다.
쐐애애액.
그러자 그 순간, 하늘을 감쌌던 무수한 암기가 그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뻗어진 소매 안으로 일제히 빨려들었으며, 이내 당평세의 몸 안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었다. 마침내 하늘이 맑게 개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축하하네.”
당평세가 말했다.
“마침내 선우세가의 숙원을 이루었군. 자네라면 혹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네만… 막상 다시 보게 되니 늙은 가슴이 다 떨릴 지경이야.”
“…….”
이벽은 문득, 노인의 주름진 눈 안쪽에서 채 숨기지 못한 격정을 발견했다.
“그 검은… 자네가 잃어버린 검임과 동시에 선우세가가 잃어버린 검이기도 하네.”
‘그 검’.
이벽은 손에 쥔 검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이것은 선우세가의 검이 아니며 이진천에게서 건네받은 낙검문의 검이었다.
허나.
‘창공비검’은 자신에게 돌아왔다.
“본디 자네의 조부되는 분께서 창안하셨으며, 또한 마교도를 베어낸 ‘청강유엽검식’은 바로 그것이었네. 허나… 선우세가는 그 가르침을 잃어버렸고, 그저 파편화된 무공들과 이름뿐인 유품만이 남아버렸지.”
“…….”
이벽은 이해했다.
하늘을 수놓은 암기 속에서 이벽은 검무를 추는 이진천의 형상을 발견했다.
허나 그 그림을 그린 당사자가 묘사하려 했던 인물은 다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당평세는 선우명을 그렸고.
이벽은 이진천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것은 즉, 선우명과 이진천이 펼쳤던 청강유엽검이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
이벽은 이진천을 떠올렸다.
낙검문주, 하오문 수호대주.
그리고 약장수이자 생명의 은인.
선우세가의 2대 가주 선우각마저 익히지 못했던 검을 어째서 그가 익히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진천의 ‘정체’.
그것은 새삼스러운 의문이었다.
앞서 이벽이 그에 대해 물었을 때, 이진천은 그저 스스로 ‘선우씨’가 아니라고 말했다.
허나… 어쩌면.
“가게.”
그때, 당평세가 말했다.
“자네는 마침내 목천(目天)의 끝에 다다랐으며, 그리고 등천(登天)의 문 앞에 서 있네. 그 문을 열고 하늘에 오를 방법을 찾는 것은 온전히 자네의 몫이야.”
“……!”
“부디 무운을 비네, 그리고.”
허헛, 당평세가 웃었다.
“반드시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사파를 품고 위로 올라오게나. 한 명의 무인으로서, 기쁜 마음으로 자네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겠네.”
* * *
사파의 하늘이 뒤집혔다.
흑천방과 녹림의 고수들이 사패련을 야습했고, 흑천방주 맹철극이 사패련주 혁군악의 목을 베었다.
이러한 소식은 사패련이 자리한 귀주에서부터 이내 장강 이남의 사파무림 전체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그리고.
사파무림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사태는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심지어는 본래부터 흑천방을 지지하던 세력들조차 그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녹림’이란 세력이 흑천방의 우군이 되어 신 사패련의 두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모두가 숨을 죽였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폭풍전야와 같은 침묵 속에서 신경전이 벌어졌다.
개중에서도 특히.
하오문은 아예 종적을 감추었다.
사태가 알려진 이후, 각 지역의 지부를 포함해 대외적으로 하오문도임이 알려진 이들이 일제히 ‘증발’한 것이다.
물론, 하오문 수호대의 일원인 기녀 월향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함께 하고 있던 비룡대원들 또한 행방이 묘연해졌다.
“하아.”
공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네요.”
“아하하…….”
월향이 머쓱하게 웃었다.
철혈쌍괴를 물리친 비룡대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지껄였던 말들이 대부분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차이가 있었다면, 누군지도 모를 ‘녹림왕’이란 인물이 사패련주 목을 베었다며 떵떵거리던 혈괴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 혁군악을 쓰러뜨렸다고 알려진 것은 흑천방주 맹철극이었다.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속단할 수는 없었다. 좌우간 중요한 사실은.
천하가 뒤집혔다는 것이다.
월향은 그 즉시 마차를 돌렸다.
인근의 산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자 이내 작은 암자가 나타났다. 인기척은 없었으되 관리의 손길이 느껴졌다.
은신을 위한 시설인 듯했다.
일행은 숨어든 채 며칠을 지냈다.
간간이 정체를 위장한 하오문도들이 올라와 생필품 따위를 보급했고 소식을 전했다.
허나… 좋은 소식 따윈 없었다.
분위기는 점점 신 사패련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무르익었으며, 또한 의혈맹으로 향했던 이벽과 취풍신개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우리…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건가요? 대체 하오문주께선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죠?”
다시 공손수가 말했다.
앞서 하오문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녹림, 그리고 혈교를 추적해왔다.
허나… 흑천방과의 연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부지불식간에 혁군악이란 버팀목을 잃고 말았다.
장기판의 왕을 잃어버렸다.
“죄송해요. 다만 저희로서도 어떻게든 살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말씀밖에는…….”
“하아.”
‘살길’이라.
공손수는 말을 삼켰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더 이상 무턱대고 하오문을 믿고 있어선 안 될지도 모른다.
‘남의 일은 아니지만.’
사패련 전복 사태가 벌어지자, 암영각은 그 즉시 대대적으로 모든 외부 대원들에게 귀환 명령을 알렸다.
이는 즉, 어느 세력이건 혼란을 틈타 암영각의 무인들에게 손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임과 동시에.
자신으로 하여금 비룡대를 ‘손절’하라는 각주의 신호이기도 했다. 공손수는 머리가 아파졌다.
“뭐… 그래도 쥐방울 넌 나보단 낫잖아? 케헤헤!”
그때, 한켠에 드러누워 빈둥대던 파진성이 말했다.
해남검파에선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사실상 파진성 따윈 ‘버리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너희들 꽁무니에 붙은 순간부터 이미 사문과는 어긋나긴 했지만… 난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낭인 신세라고. 케헤헤.”
피식, 공손수는 작게 웃었다.
“…그러게요. 이대로 정말 흑천방이 사파무림을 잡는다면 저도 결국 살수 신세가 되겠지만요. 어느 쪽이 나을지는 과연—”
콰아앙!
그때였다.
바깥에서 굉음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일행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무 몇 그루가 쓰러져 있는 것과 함께, 작은 인영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언니?”
언미희였다.
“더는 못 참겠어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죠? 지금 이 순간에도 공자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서라도 찾으러—”
“정신 차리게.”
그때,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언미희의 말을 끊었다. 암자의 지붕에 걸터앉은 양호명이었다.
“그 나이에 절정의 성취를 얻었으니, 세상에 적수가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은 이해하네. 허나… 경거망동은 죽음을 재촉할 뿐이야.”
“…….”
침묵이 감돌았다.
서서히 장내를 채우기 시작하는 긴장 속에서 일행들은 각자 할 말을 생각했다.
타다닷.
“…헉, 허억!”
허나 침묵을 깬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이었다.
어느덧 퍽 낯이 익숙해진 하오문의 사내가 산길을 헤치며 장내로 들이닥친 것이다.
“드, 드디어 찾았습니다! 비, 비룡대주께서 살아 계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