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80)
185화. 하오문의 전령 (2)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지난 일들을 아무리 장황하게 늘어놓은들 결국 결론은 달라질 게 없음을 생각했다.
“딱히 없습니다.”
“…….”
어쨌거나 대세가 기울어버린 지금으로서는 하오문이 무리해서 자신을 감싸줘야 할 이유는 없으며.
또한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이야기해줄래요?”
초연서가 되물었다.
“공자, 사패련으로 죽으러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만일 공자에게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어떤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후욱.
이벽의 기세가 내뿜어졌다.
흠칫, 초연서의 안색이 흔들렸다.
스스스.
채 반도 비워지지 않은 밥상 위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초연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게 뭐야?’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다.
초연서는 말 그대로 당황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였으나… 눈앞에 앉은 상대는 더 이상 그가 얼마 전까지 기억하고 있던 ‘새끼 용’조차 아니었다.
“…앞서 고 노야와 대협께 가르침을 얻었고, 또한 정파무림에서도 적지 않은 인연을 얻어, 그 덕에 저는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벽이 말했다.
이벽은 강해지고 또 강해졌다.
개방주 취풍신개는 이벽을 목천의 영역으로 이끌었고, 독왕 당평세는 이벽을 다시 그 끄트머리까지 밀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칠독문 수준의 중견문파 정도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도 혼자서 괴멸시킬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것은.
불과 작년까지 그저 단전을 잃은 폐인에 불과했던 스스로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만큼 까마득한 성장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허나… 제가 스스로 맹철극과 그 세력을 몰아낼 힘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
“그것은 아직 그자와 만나본 적이 없고, 부딪혀본 적이 없으며, 무엇보다 제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훅, 이벽은 기세를 거두었다.
“확인을 해봐야겠지요.”
이벽의 눈은 호수처럼 담담했다.
때문에 초연서는 말문이 막혔다. 황급히 꺼낼 말을 찾으려 했으나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혼자서요? 거기서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도요?”
퍽 궁색한 말이 새어나갔다.
허나 이벽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이길 수 있는 상대라면 이길 것이고, 만일 이길 수 없다면… 공연히 죽는 사람을 늘릴 필요는 없겠지요.”
훗, 이벽이 웃었다.
“물론, 목숨은 귀하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듣기에 따라서는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즉,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승패에 영향을 줄 수 없으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가.’
허나 동시에.
초연서는 이해했다.
그것은 오만도, 객기도 아니었다.
외려 냉정할 만큼 철저한 자기평가에 의해 도출된 결론이었으며, 초연서 역시 반박할 수 없었다.
살심과 번뇌 속에서도 올곧은 글씨를 보여주던 소년은… 어느덧 한 명의 절대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괴물.’
초연서는 수호대주를 생각했다.
규격 외의 괴물에게 있어 시간이란 범인의 시간과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상식이나 한계를 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뤄버리며, 감히 질투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다시 이벽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목이 달아난다면… 뒷일은 하오문의 여러분들께서 열심히 싸워 남은 목숨들을 지켜야겠지요.”
“…….”
이벽이 다시 웃었다.
“…오호홋!”
초연서도 함께 웃었다.
“오호홋, 오호호홋, 어쩜!”
웃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오문은 살아남기 위해 수호대주의 패를 지닌 이벽을 ‘버린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헌데.
소년은 오히려 그런 하오문을 배려했다. 초연서는 한참을 웃었다. 부끄럽기 짝이 없었고, 무력했다.
“하아… 그래요, 공자. 우리 하오문은 근본부터가 아랫것들이에요. 무림의 틈바구니에 끼인 미천한 것들이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한데 뭉쳤고, 그렇기에 가급적 목숨이 덜 죽는 길을 택하죠.”
“…그렇군요.”
“다 변명이지만요.”
초연서의 미소가 씁쓸해졌다.
“한가족이니 뭐니…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이런 얘기를 전하게 되어 정말로 유감이에요.”
“…….”
“사실은… 저희도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보았어요. 물론, ‘공자의 스승님’께도 도움을 청해보려 했죠.”
“……!”
“허나… 우리 수호대주님께서는 또다시 종적을 감추셨더군요.”
이벽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분은 늘 그랬었죠. 도통 아무것도 말해주질 않는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애초에 왜 공자를 당금의 무림으로 내보내신 건지, 혹은.”
“…….”
“…‘무엇’과 싸우고 계신 지도요.”
이벽은 이진천을 생각했다.
무림의 중심으로 나아갈수록, 그리고 더 나은 경지로 올라설수록 그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점점 더 깊어졌다.
—막내야. 뭐가 그리 급했느냐?
—네 사형제들처럼 말이다. 마음의 돌따윈 적당히 모른 척하고, 외면도 하고, 또래들과 함께 천천히 네 나이의 즐거움을 찾아보아도 되었을 것을.
그날.
이벽에게 ‘심부름’을 명령하던 이진천이 얼굴에 떠올랐던 씁쓸한 얼굴을 생각했다.
그렇게 명령에 의해 시작된 심부름은 결국 이벽의 ‘책임’이 되었고, 목숨을 걸고 이뤄내야 하는 ‘결말’이 되었다.
“국이 식었네요.”
초연서가 말했다.
“마지막 식사 정도는 제대로 대접하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공자. 그렇다면… 공자께선 결국 우리 하오문이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나요?”
“…….”
분위기를 전환하듯 목소리는 퍽 가벼웠으나 물론 가볍게 답할 수는 없었다.
이벽은 잠시 말을 고민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신 사패련에 항복하더라도 그것은 제가 죽은 이후가 좋겠지요.”
“…….”
“그리고 만일 제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맹철극을 쓰러뜨린다면… 그때는 다시 기존 질서의 회복에 힘을 보태주십시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후욱.
그리고 그때였다.
돌연 철필이 이벽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은 직선이되 언제든 휘어질 준비가 된 곡선이기도 했다.
“……!”
또한 익숙한 경로였다.
이벽도 그 즉시 검을 뻗었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삭월(朔月).
쿠우웅.
붓끝과 검끝이 서로 맞닿았다.
완벽히 똑같은 두 초식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서로 맞닿았고, 무거운 충격파가 일며 밥상이 흔들렸다.
“…훗.”
초연서가 가볍게 웃었다.
“완숙하네요.”
“…….”
“고작해야 몇 달 만에 밑천을 따라 잡혔군요. 아니, 아마 지금의 저는 공자가 진심을 낸다면 몇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겠죠.”
팔절구궁필법.
그리고 만월무변심공.
가르침은 일찍이 초연서에게서 이벽에게로 전수되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벽의 검에서 떼어내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보여드릴 잔재주가 하나 남았네요. 실은 저도 근래에서야 겨우 얻은 깨달음이지만요.”
초연서의 어투가 의미심장해졌다.
“공자, 이번에는 공자가 먼저 절 찔러보겠어요?”
“……!”
이벽은 무언가를 느꼈다.
잠시 멈칫했으나… 거절을 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이내 잠자코 검을 뻗었다.
후욱.
다시 삭월을 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초연서의 철필 역시 삭월의 경로를 밟았다.
이내 검과 붓이 서로 가까워지며, 조금 전과 똑같은 결과를 그리기 직전이었다.
후우욱.
“……!”
삭월과 삭월이 부딪히려는 그 순간, 이벽의 검끝이 ‘휘어졌다’.
허나 이벽의 의지가 아니었다.
우우웅.
검끝이 멋대로 흔들렸고, 그 틈을 타 초연서의 붓끝이 검을 따돌리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훅.
이벽은 뒤로 몸을 뺐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허나 파고들던 철필은 이벽에게 닿기 전에 멈추었으므로 의미는 없었다.
“…어떤가요?”
“…….”
훗, 초연서가 웃었다.
허나 표정과는 달리 안 그래도 분을 칠해 새하얗던 안색은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만월이로군요.”
이벽은 답했다.
뻗은 검로가 멋대로 휘어진다.
이벽은 만월의 초식 앞에 당황하던 적들의 입장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허나.
초연서가 펼친 것은 삭월이었다.
그 끝에서 만월이 피어난 것이다.
초식과 초식 간의 간극에서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정립해낸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목천의 기예’였다.
“저는… 후우, 경지가 일천하여 제대로 펼칠 수조차 없지만… 공자라면 가능하겠죠?”
“…….”
초연서가 지친 기색을 보였다.
이벽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붓끝에서 펼쳐친 기교를 되새겼다. 지닌 검의 ‘새로운 가능성’을 검토했다.
“…이론은 알 것 같습니다.”
“이런 괴물딱지 같으니.”
“…….”
“오호홋, 농담이에요. 물론 공자 스승에 비하면야 말그대로 잔재주지만요. 그래도 어쩌면… 흑천방의 무공을 상대할 때는 퍽 유용할지도 몰라요.”
꾸벅, 이벽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협.”
“…오호홋,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요. 세상 부끄러우니까요. 그리고…….”
초연서가 가쁜 호흡을 뱉었다.
“…공자의 말대로 당분간은 항복하지 않고 버텨보도록 문주님을 설득해볼게요. 그러니… 부디 무운을 빌어요.”
* * *
“자, 이제는 결정을 내리죠.”
공손수가 말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가졌으니까요. 산을 내려 갈지 말지, 어쨌건 더는 미룰 수 없어요.”
“…….”
그리고 방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언미희와 파진성은 서로를 바라보았으나 섣불리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벽이 신 사패련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 것은 엊그제의 일이었다.
그 이후.
사파무림의 혼란 속에 호남 정검문의 안위를 걱정하게 된 양호명이 즉시 암자를 떠났다.
또한 월향 역시 산을 내려갔다. 하오문 지부를 통해 자세한 소식을 직접 확인할 모양이었다.
허나… 밤늦게서야 암자로 돌아온 월향은 일행들에게 이렇다 할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저 ‘바깥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이곳 은신처에 계속 머무르는 편이 좋다’고만 말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룡대에게는 신 사패련의 추포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말끝을 흐리는 월향에게서 공손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게 있는 듯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앞서 이벽에 대한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공손수는 짐짓 ‘화가 난 척’ 암자 밖 산의 외곽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암자를 중심으로 산 전체에 적지 않은 하오문도들이 포진해있음을 얼추 확인했다.
물론 은신처를 지키는 인력이 있다는 것 역시 ‘이상할 것까지는’ 없다.
허나… 공손수는 생각했다.
말하자면…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하오문에 의한 ‘보호’인지 ‘감금’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혹은 양쪽 다이거나.’
사파무림이 뒤집혔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리고 오늘 아침, 월향은 다시 산을 내려갔다.
그렇게 셋만이 남게 된 후 공손수는 언미희와 파진성에게 이러한 이야기들을 꺼내었고.
오늘 내로 각자의 의견을 결정하여 행방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나절이 지났다.
“…나는 반대다.”
그리고 마침내 파진성이 말했다.
“쥐방울, 네 말대로 지금 하오문 하는 꼴이 영 뻑적지근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뒤통수를 맞았다고 당장에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냐?”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진중했다.
“또… 우리가 여길 뛰쳐나간다고 해서 당장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천하의 대주님께서 홀로 사패련과 맞짱을 뜨시겠다는데 대체 우리가 뭘 할 수 있냐고?”
“…….”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자신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다만 적들이 터무니없을 뿐이다.
남궁세가를 칠 때도 결국은 제대로 된 도움이 될 수 없었으므로, 각지에서 ‘힘’을 빌려오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하물며… 지금처럼 사파 전체의 뿌리가 흔들리는 상황에선 그마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하고 빡치지만… 그냥 잠자코 숨어있는 게 최선이야. 섣불리 나서서 괜히 발목이나 붙잡느니, 우선은 눈치 잘 보면서 계속 짱박혀 있는 게 낫다고 본다.”
잠깐의 침묵이 스쳤다.
“…그래요. 놀랍게도 꽤 설득력이 있는 말을 하는군요. 파 소협 주제에.”
“케헤, 날 뭘로 보는 거야 도대체? 이 해남 최고의 수재를—”
“응, 이젠 아냐~ 낭인이야~”
“…….”
“파 소협, 그리고 수야.”
허나 그때 언미희가 말문을 텄다.
“미안하지만… 나는 가야겠어.”
“…….”
어투는 단정적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이라니?”
파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부대주?”
“그야… 저도 머릿속으로는 파 소협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봤을 때 우리의 힘으로 뭔가를 해내기는 어렵겠죠. 그러니 두 사람은 굳이 함께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언미희의 말이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언미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마주했다. 눈빛은 결연했으며 목소리는 단호했다.
“…저는 혈교에 ‘빚’이 있어요.”
“……!”
“꼭 공자 때문이 아니더라도… 놈들에게 사파가 점령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어요. 또 ‘찾아야 하는 사람’도 있구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요.”
“…하아.”
공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진량현 개방분타에서의 싸움을 생각했고, 언미희와 같은 무공을 사용하던 ‘강시’를 떠올렸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사정은 대강 짐작할 수 있었으며 그 뜻을 꺾는 것은 무리임을 직감했다. 또한.
“…헹, 본인은 이제 힘 좀 쓴다 이거지? 하기야 어쩌겠어? 다 약해빠진 우리 탓이지.”
“…아하하.”
언미희가 난처하게 웃었다.
그녀는 절정고수가 되었다.
즉, 이미 자신들과는 한데 묶일 수 없는 강자가 되었으며… 어쩌면 ‘조금이나마’ 이벽의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이후 반 시진 가량 다시 공손수가 의견을 정리했고, 이내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둠이 산 전체를 감싼 자시 무렵, 세 사람은 조용히 암자의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