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22)
228화. 마음이 찢어지다
이윽고 겨울이 되었다.
날카로운 추위 속에서도 이벽은 하루하루 낙검문주로서의 규칙적인 생활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무림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 생각의 물꼬를 터버리면, 꼬리를 물고 이어질 생각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진천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선.
마을 바깥의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야만 한다. 고로 이벽은 생각을 무디게 유지했다.
그러한 감각 속에서.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오빠.”
그리고 다시 어느 날.
왕수련이 이벽의 팔을 붙들었다.
“우리 오늘 낚시하러 가요.”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은요, 오빠가 낚시에 취미를 들인 것 같아서 예전에도 몇 번 같이 하자고 말했었는데…….”
“…….”
이벽은 침묵했다.
그것은 이진천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의 일로, 이벽은 이진천에게서 ‘미끼 없이 물고기를 낚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한때나마 퍽 심취했었다.
허나 이진천이 죽고 사형제들이 마을을 떠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낚시를 가지 않았다.
그것은 마음이 무뎌지기 위해.
이벽이 놔버린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러기엔 날이 춥지 않나?”
이벽이 간신히 답했다. 허나.
“…무슨 이상한 소리예요?”
왕수련의 손끝이 위를 가리켰다.
“봐요. 벌써 봄이에요.”
“……!”
이벽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어느덧 겨울이 모두 지나가고 나뭇가지에 붉은 매화가 만개했음을 발견했다.
즉, 다시 일 년이 지났다.
허나 자신은 그 사실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벽은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좀 피곤하군. 다음에—”
“오빠, 지금 안 가면.”
허나 그때.
왕수련이 목소리를 달리했다.
“두 번 다시는… 같이 가자고 안 할 거예요.”
“……!”
그리고 그제서야.
이벽은 눈앞의 왕수련을 보았다.
표정이며 몸짓이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목소리가 작게 떨리고 있음을 마침내 눈치챘다.
“…알았다.”
이벽은 처소로 향했다.
먼지 쌓인 낚싯대를 챙겼다.
그리고 왕수련과 함께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와중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리고.
쏴아아아.
이내 두 사람은 상류에 이르렀다.
계절은 이미 봄이므로 당연하게도 살얼음 따윈 없었으며, 주변에는 매화와 파릇한 잎들이 만연했다.
“…….”
풍경은.
과거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허나 이벽은 시선을 위로 향했다.
저만치 너른 바위 위에는… 나른한 표정의 이진천이 낚싯대를 기울인 채 앉아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막내야.
욱씬.
마음이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이야, 날씨 좋다~”
그때 왕수련이 말했다.
기지개를 켜며 크게 호흡했다.
“여기까지 올라와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네요. 어렸을 때는 동생들이랑 물장구도 많이 치고 그랬는데… 그립다, 그쵸?”
“…….”
이벽은 왕수련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의향을 읽을 수 없었다.
“수련, 낚시를 배우고 싶나?”
이벽이 물었다. 허나.
“아니요. 전혀.”
왕수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가 한켠에 웅크리고 앉았다.
“뭐랄까 그냥… 오빠가 낚시하는 걸 구경하고 싶어서요.”
“…….”
“빨리해봐요. 어서요.”
턱을 받친 채 헤실헤실 웃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아직은 심중의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저벅.
이벽은 물가로 다가갔다.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마음의 흐름에 귀를 기울였다.
우우웅.
선천의 힘이 응답했다.
그리고 이벽의 의지를 따라 혈로를 타고 상단전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목천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이윽고 감각이 선명해졌다.
물소리와 빛, 매화의 향기, 그리고 흩날리는 봄바람 등이 감각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훅, 퐁당.
이벽은 낚싯바늘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낚시의 요령을 되새겼다.
청강유엽검식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묘리를 내력 없이 사용하여 물고기를 꿰어내야 한다.
이벽은 집중을 시작했다. 그리고.
휙.
휘익, 풍덩.
“…….”
이후 한동안 실패를 거듭했다.
물고기는 좀처럼 바늘에 걸려들지 않았고, 물었다 싶다가도 건져 올리려는 순간 빠져나가 버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 처음으로 낚시를 배웠을 때의 이벽은 고작 손가락만 한 피라미 하나를 낚아내느라 전심전력을 짜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후.
반년 이상의 시간 동안 낚싯대를 손에 대지도 않았으므로 다시 실력이 퇴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
그렇게.
피라미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채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침묵 속에서 하릴없이 흘러버렸다.
“…낚이질 않는군.”
머쓱해진 이벽이 말했다.
“그러게요, 아하하.”
“…실력이 예전 같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조금 더 노력해보마.”
“아뇨, 무리할 필요까지는 없구요. 안 되는 걸 떼를 쓴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아하하, 왕수련이 웃었다.
“하지만 좀 아쉽긴 하네요. 은근히 기대했는데…….”
“…….”
이벽은 문득 책임감을 느꼈다.
슥, 이내 낚싯대를 거두고 한켠에 내려놓았다. 필요하다면 낚시가 아니더라도 물고기를 잡는 법은 얼마든지 있다.
저벅.
이벽은 물가로 한 걸음 다가섰다.
“잠깐요, 오빠. 정지. 잠깐만요.”
허나 그때 왕수련이 말했다.
이벽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지금 직접 물로 뛰어들려는 거 아니죠?”
“…맞다.”
이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푸훗!”
왕수련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핫! 아하핫!”
* * *
왕수련은 한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청아한 웃음소리가 산속을 채웠다.
“아~ 오빠는 정말 그대로네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 같으면서도 거의 변하질 않아요.”
한참을 웃다가.
이내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근데 그거 알아요, 오빠?”
“…뭘 말이지?”
“나도 예나 지금이나… 한 번도 물고기를 원한 적은 없어요. 오빠가 그냥 내게 떠안겨준 거지.”
“…….”
이벽은 답을 하지 못했다.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 다시 시선을 계곡으로 향했다. 낚싯대를 도로 집어들었다.
휙, 풍덩.
아마도 결국 허탕을 칠 것이다.
허나 어쨌건 다시 바늘을 던졌다.
“근데요, 오빠. 소미 언니나 대웅 오빠처럼… 오빠도 결국 다시 마을을 떠날 거죠?”
흠칫.
이벽의 낚싯대가 흔들렸다.
애써 끌어올린 집중이 삽시간에 흐트러졌다. 그 순간, 마침내 왕수련이 ‘본론’을 꺼내 들었음을 이해했다.
더는.
낚시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떠나지 않는다.”
이내 이벽이 답했다. 허나.
“…거짓말쟁이.”
그 말을 들은 순간.
불현듯 이벽은 지금의 이 상황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는 이상한 감각이 스쳤다.
훅.
이벽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왕수련은 그 자리에 있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므로, 멀쩡한 사람이 목소리만을 남긴 채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는 것이다.
허나.
왕수련은 금방이라도 흩어져 없어져 버릴 것 같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요. 내가 밥해줄까요?”
“…….”
“매일마다, 앞으로 평생 동안요.”
매일과 평생.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담긴 무게는 그렇지 않았다.
고로 이벽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소녀의 나이를 지나 묘령에 이른 여인의 시선이 작게 흔들렸다.
이진천은.
자신과 사형제들에게, 마을의 일원으로서 정착하여 ‘제대로 살아가길’ 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허나.
심즉사(心卽思).
생각과 마음이 하나의 속도로 연결된 목천의 시간 속에서, 마음의 목소리들이 마구 속삭였다.
불안, 두려움, 분노, 슬픔.
이만큼이나 많은 시간이 지나고도 섣불리 답을 줄 수 없는 온갖 이유들이 목소리를 내었다.
“거봐요. 대답 못 하죠?”
왕수련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침묵이 일었다. 허나 이벽은 침묵이 길어지는 게 두려워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한다.
허나 목천의 시간 속에서도.
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끙차.”
왕수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만 먼저 갈게요.”
“…….”
그리고.
왕수련은 자리를 떠나버렸다.
산 아래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벽은 그 뒤를 붙잡지 못했다.
털썩.
그 대신, 이벽은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물가에 앉아 한동안 심사숙고했다.
그사이 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달빛이 물가에 떠올랐다.
뚝, 뚝.
“…….”
문득 눈물이 떨어졌다.
이진천은 자신에게 낚시를 가르치며, 낙검문의 고기반찬을 책임지라고 했다.
허나 정신을 차렸을 때.
더는 주변에 책임질 누구도 남지 않게 되었다. 과거, 무림을 종횡하면서도 줄곧 이벽의 마음 한켠에 남아있던 낙검문은.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더는 무딘 감각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마치 마음이 두 쪽으로 찢어지는 듯했다.
찌익.
그리고 그 순간.
선천의 힘이 함께 ‘찢어졌다’.
두 갈래의 힘이 몸 안을 흘렀다.
우우웅.
“…….”
이벽은 낙검문을 잃어버렸다.
그러한 자각과 동시에, 그것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잃어버렸던 목천의 기예들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선천의 힘은 마음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마음이 찢어진 순간 함께 두 갈래가 되었다.
이벽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것은 퍽 아픈 깨달음이었다.
* * *
이후.
며칠에 걸쳐 이벽은 고민했다.
결국은 이진천의 남긴 말들 중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생각했다.
떠나는 사형제들을 잡지 못한 채.
그저 홀로 남아 ‘껍데기’ 뿐인 낙검문을 붙들고 있는 것이… 이진천이 원하던 바는 아니리란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이벽은 사형제들을 떠올렸다.
제갈소미는 이진천과 그 죽음에 관련된 배후를 쫓아 원수를 갚겠노라 했으며, 다시 혁대웅은 그러한 제갈소미를 찾겠노라 하였다.
그리고 이벽은.
‘혈마’를 생각했다.
그날, 그 새벽의 싸움에서.
이진천의 최후의 일검에 당하고도 혈마는 기어코 목숨을 보존하여 자리를 빠져나갔으며.
그 외에도.
검은 기운의 폭주에 휩싸여가던 이진천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은 예의 복면인을 떠올렸다.
이진천의 ‘원수’라고 한다면.
둘 중 어느 쪽인가를 특정하기는 어려웠으며, 둘 모두일 수도, 혹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닐지도 모른다.
이진천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노라 말했다. 고로 이벽은 우선 복면인에 대해서는 미뤄두기로 했다.
허나 어찌 되었건.
결국은 그 진상을 파헤치려 한다면… 사형제들이 혈마와 얽히게 될 것임은 퍽 자명한 사실이었다.
사형제들을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결국.
‘…내가 먼저 혈마를 벤다.’
이내 이벽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스승의 원수는 물론, 어느 관점에서 생각해보아도 지극히 타당한 일이라 여겨졌다. 또한.
타당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꽈아악.
주먹이 움켜쥐어졌다.
차가운 분노가 일어났다.
그날 이후, 줄곧 응어리져 있던 마음을 더는 외면할 수도, 외면할 이유도 없게 되었다.
허나.
가진 것은 고작 한 자루 검뿐이었으므로,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 방법에 대해선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보를 얻는다.’
이내 이벽은.
마을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
이벽은 이진천의 묘터에서 절을 올렸다. 그리고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을 떠날 것임을 알렸다.
타앙.
“…큭!”
이벽의 검이 장석두를 밀쳐냈다.
그렇게, 비무를 통해 장석두에게 검을 가르치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 되었다.
“장석두, 그간 수고했다.”
이벽은 검을 거두었다. 허나.
“…아니, 아직입니다, 형님.”
장석두가 이를 악물었다.
조용히 목검을 허리로 회수했다.
타앙.
거칠게 전진하며 다시 발검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발검제일식(拔劍第一式).
직검(直劍).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