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40)
246화. 노인의 이야기 (2)
“…병마라.”
노인, 선우각이 쓰게 웃었다.
선우세가의 시조인 선우명은 마교와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가 병마로 자라났고, 오랜 투병 끝에 마침내 유명을 달리했다.
이벽이 알고 있는 사실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죽은 사람에게 ‘그 이후’는 있을 수 없다. 허나.
“그건 분명히 병이었지. 나날이 심해지는 광증(狂證)은… 오히려 육신의 병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오.”
“…….”
“허나 내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오.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는 말이오.”
선우각의 눈이 아득해졌다. 그것은 여지껏 노인의 가슴 속에서 오래 간직되어왔던 비밀이었다.
초대 가주 선우명이 앓고 있던 병이란 육체의 병이 아니었으며, 외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심마로 인한 부수적인 영향에 가까웠다.
세가에 정착한 이래.
선우명은 평생에 걸쳐 천마의 환영에 시달렸고, 나날이 괴팍해졌으며,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장자 선우각은 학대에 가까운 가주 선우명의 ‘가르침’을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어느 순간부터 선우명은 더는 세가의 대소사에 대해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 빈 자리를 메꾸는 것 또한 소가주 선우각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선우명은 세가를 떠났다.
“…떠났다고?”
“그렇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죽음을 위장한 채 모든 걸 뒤로 하고 떠나버렸지. 그래도… 내게 만큼은 귀띔을 해주시더군. 예의 ‘동굴’의 존재 또한 그때 들었고 말이오.”
핫, 노인이 웃었다.
검치 선우명은 마침내 본인이 일으킨 세가에 걸었던 모든 희망을 버리고서 다시 방랑의 길을 나선 것이었다.
“…대체 어디로 말이오?”
“서쪽이오. 그렇게 말씀하셨소.”
“…….”
서쪽.
이벽은 그 의미를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대화의 맥락 속에서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후룩, 노인이 찻잔을 들었다.
“천마에 대한 내 아버지의 집착은 가히 불치병과 같았소. 그런 내 아버지가 끝끝내 길을 나섰다면… 어디로 가셨을 것 같소?”
“……!”
이내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저 멀리 청해성을 지나 중원의 북서쪽 지역에는… 마교의 발호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산맥’이 있었다.
허나 그것은.
‘말로 꺼낼 수 없는’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선우명이 어떤 식으로든 마교와 얽혀들었으며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자칫 선우세가와 관련된 이들 전체가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엄중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거운 공기가 짓눌렀다.
이내 이벽이 말을 꺼냈다.
“전쟁 당시 천마는 죽었고, 남은 마교의 잔당들 또한 내분에 의해 사실상 자멸의 길을 걸었다고 알고 있소. 대체 그런 외진 곳까지 무엇을 얻고자 찾아간단 말이오?”
“글쎄, 광인에게 그런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소? 다만 내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천마의 죽음을 믿지 않았소.”
“…….”
“그리고… 그 이후로 수십 년 간 내 아버지에 관한 어떤 소식도 듣지는 못했지. 찾아보려 하지도 않았고 말이오.”
탁, 노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바로 어제까지는 말이지.”
그리고.
주름진 탁한 눈빛이 다시 이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 눈빛이 허리에 걸린 검에 가닿았다.
“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겠소. 서쪽으로 사라진 내 아버지의 성명절기를 이어받은 소협의 ‘스승’… 그자는 대체 어디서 온 누구일 것 같소?”
* * *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노인에게도, 이벽에게도 그 이상 할 말은 남아있지 않았으며 다만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각자의 생각들만이 맴돌았다.
이내 이벽은 떠나려 했다.
허나 ‘밥을 해줄 테니 먹고가라’는 노인의 집요한 권유에 의해 이벽은 돌이 씹히는 밥을 삼켰다.
그제서야 겨우 모옥을 나섰다.
“소협은 어디로 갈 셈이오?”
“…딱히 정해진 곳은 없소.”
행보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허나 지금 이 순간에도 천하의 어딘가에 ‘혈마’가 살아있다면 느긋하게 눌러앉아 고민에 잠겨있을 여유는 없었다.
모든 생각과 판단은.
움직임과 동시에 이뤄질 것이다.
“그렇군. 당금의 천하에 소협을 위협할 만한 이가 누가 있을지는 나야 잘 모르겠소만… 부디 몸조심하시구려.”
노인이 다시 말했다.
주름진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그것은 상투적인 인사 외에 달리 할 말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벽은 문득 선우명을 떠올렸다.
예의 환영 속에서 풍마를 베어냈던 젊은 날의 검치는, 불현듯 고개를 돌려 혼백의 상태로 공중에 떠 있던 이벽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노인을 꼭 닮은 난처한 미소와 함께, 이벽에게 ‘한 마디’를 속삭였다. 허나.
“그가 ‘미안하다’ 하더군.”
이벽이 말했다.
노인의 표정이 흔들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동굴 속의 진법 말이오. 그 안에서 만난 노인장의 부친께서 내게 분명히 그리 말씀하셨소.”
“……!”
이벽은 생각했다.
애초에 그 동굴 안의 진법은.
세가의 혈족 중에서도 단 한 명, 장자 선우각에게 전해진 유품이었다. 고로.
“아마도… 그분은 내가 아닌 노인장께서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어 그곳에 다다를 거라 기대하고 있었던 거겠지.”
“…….”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허나 이내 주름진 입가가 웃었다.
“부질없는 이야기로군.”
“…그렇소?”
“그렇다마다. 생판 남만도 못했던 애비가 다 늙어 그런 말을 입에 담은들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자식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
이벽은 침묵했다.
문득 노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졌다. 말없이 돌아선 뒤 그대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언젠가… 소협의 할 일이 끝나면 한 번쯤 다시 들러주시겠소? 그때에는… 좀 더 제대로 된 걸 대접해드리리다.”
등 뒤에서 노인이 말했다.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타앗.
이벽은 빠르게 문을 나섰다.
묘한 불쾌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감돌았다.
허나 어찌 되었건, 자신이 존재하는 이상 선우굉을 비롯한 선우세가는 감히 노인을 해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타다닷.
이벽은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대로 경신법을 펼쳤고, 달아나듯 빠른 속도로 산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교.’
그것은 물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혈마의 뒤를 쫓고자 했으나, 사파무림의 최대 정보 세력에 해당하는 하오문마저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결국은 그러한 혈마를 ‘기다리고 있었던’ 스승 이진천의 행보만이 역으로 혈마를 추적해낼 유일한 단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진천은.
지닌 무공으로 말미암아 검치 선우명과 엮였고, 다시 검치의 흔적은 ‘서쪽’으로 이어졌다.
“…….”
무언가를 알아내려 할수록.
외려 알 수 없는 것들이 늘어만 갔다. 불현듯 이벽은 ‘절대로 복수 따윌 생각하지 말라’던 스승의 유언을 떠올렸다.
어쩌면.
일은 단순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어딘가에 숨어있을 혈마를 찾아 그 목을 베어낸다고 해서… 쉬이 끝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답답하군.’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불길한 예감이 차올랐다.
어쩌면 그 이면에는 과거 사파무림에서의 일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섣불리 억측을 내리기에는 여전히 정보가 모자랐다. 문득 이벽은 개방을 떠올렸다.
하오문마저 모르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고 있다면, 그것은 물론 개방일 가능성이 컸다. 허나.
“…….”
이내 취풍신개가 떠올랐다.
오 년 전, 권왕에 의해 쓰러졌다고 알려진 늙은 거지는 끝끝내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권왕 황보혁은 자신마저 죽이고자 했으나, 그때 이벽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독왕 당평세였다.
취풍신개, 그리고.
독왕 당평세와 권왕 황보혁.
은원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다만 어쩌면 개방은… 취풍신개의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었음에도 아무런 말도 없이 무림을 떠나버린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이벽은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타앗.
이내 운남과 사천을 가르는 경계에 선 이벽은 인근의 도시에 들려 죽립을 샀다.
다시 무림으로 돌아온 이상, 끝끝내 미뤄두었던 옛 은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어쨌건 함부로 정체를 드러내고 다니지는 않는 편이 좋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이벽은 사천 땅에 들어섰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났다.
늦은 밤, 여느 숲속에서 노숙을 위해 물길을 찾아낸 뒤 한 모금을 들이켠 순간이었다.
“……!”
물맛에서 위화감이 스쳤다.
그 즉시 선천의 힘을 일으켰다.
우우웅.
목구멍을 타고 넘어온 한 모금으의 물에 녹아있던 독의 기운들이 빠르게 분해되었다. 허나.
‘옅다.’
그것은 무시해도 될 수준이었다.
기실 날카로워진 이벽의 미각에 걸려들었을 뿐, 한껏 들이켠다고 해서 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운 정도의 미세한 독기였다.
그것은 즉.
이벽을 노린 것이 아니며.
다만 우연찮게 물줄기에 섞여든 독이 희석되기를 거듭하며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허나 물론.
‘우연찮게 독이 섞여들 만한 일’이란 결코 평범한 일이 될 수 없다.
타앗.
이벽은 즉시 땅을 박찼다.
물길에 독이 섞여들었다는 것은 물론 어딘가 멀지 않은 곳에서 싸움이 벌어졌음을 의미한다.
타다닷.
그리고 이내 저만치에서 숲속을 내달리는 한 무리의 기척을 발견했다.
‘아니, 한 무리가 아니다.’
어둠이 깔린 숲속 저편에는.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으며, 쫓는 무리와 달아나는 무리로 나뉘어있는 듯했다. 이벽은 즉시 땅을 박차며 뒤를 밟았다.
* * *
“…으득.”
정연화는 이를 악물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렇다고 해서 바쁘게 달리는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놈들의 추격은 예상 이상으로 기민했다. 마치 자신들이 달아날 것마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비틀.
“…커윽!”
그 순간, 정연화와 나란히 달리고 있던 금령사태의 신형이 신음과 함께 흔들렸다.
“…사, 사고, 괜찮으세요?”
“아암… 물론이다 마다! 육신의 상처쯤이야… 큭, 당금의 치욕에 비한다면야 우스운 수준이 아니더냐?”
금령사태가 어설픈 웃음을 보였다. 허나 안색은 창백했다. 결코 괜찮지 않다는 것쯤은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움켜쥔 옆구리에는 긴 검상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간신히 멈춰놓은 출혈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어쨌거나 명목상으론 ‘같은 정파’임에도… 놈들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거 알 만한 분들께서 쓸데없이 힘 빼게 하는군! 그만 멈추시구려! 우리가 무슨 사마외도의 악적도 아닐진대 설마 목숨이라도 빼앗겠소?!”
그때였다.
머지않은 등 뒤의 어둠 속에서 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거리는 그만큼 좁혀진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그때, 금령사태가 말했다.
툭, 정연화의 등을 밀쳤다.
“얼른 가거라 연화야. 너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가서 어떻게든 놈들의 만행을 알려야 한다.”
“…사고.”
“말마따나 제까짓 말코 놈들이 감히 뭘 어쩌겠느냐? 기껏해야 밥이나 굶기고 말겠지.”
금령사태가 웃었다.
큭, 정연화가 재차 이를 악물었다. 물론 사고의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 내에 사로잡힌 사저와 사매들 역시, ‘아직은’ 목숨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허나.
“가거라! 얼른!”
금령사태가 재차 재촉했다.
정연화의 고운 아미가 일그러졌다. 허나 다른 방법이 없음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타앗.
이내 뛰쳐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소저, 어딜 가시오?”
“……!”
흠칫, 정연화가 다시 멈춰 섰다.
어느덧 정면에는 낯선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풍채가 넉넉한 중년인이었으며, 도복을 입고 있었다.
“…대협께선 누구신지?”
“빈도는 점창의 유암(留岩)이라 하오.”
“…백금검(百禽劍).”
정연화가 침음했다.
그는 점창의 이름 높은 장로였다.
심지어는 그 역시 혼자가 아니었으며, 등 뒤로 같은 복장을 걸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부스럭, 타앗.
“오호, 이거 누군가 했더니 점창의 유암 도장이 아니시오? 반갑소. 썩 오랜만에 뵙는구려!”
그리고.
마침내 등 뒤를 쫓아오던 무리들마저 당려옥과 당청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선두에서 목소리를 낸 것은 유암과 마찬가지로 청성파의 장로인 공명자였다.
“…….”
눈 앞의 점창.
등 뒤의 청성.
마침내 ‘적’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이내 정연화는 무사히 빠져나가는 글렀음을 이해했다.
“금령사태, 그리고 정 소저.”
그리고 유암이 말했다.
“내 그간 두 분의 무명은 익히 들어왔소. 같은 사천 땅에 머무르고 있음에도 이제야 뵙게 되는구려.”
“…별말씀을요.”
“또한 이런 식으로 뵙게 되어 퍽 유감이오만… 이 이상 보내드릴 수는 없을 것 같소.”
“…….”
정연화가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