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39)
245화. 노인의 이야기 (1)
이기어검(以氣於劍).
기로써 검을 운용하는 경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절정마저 넘어선 무림 최정상의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노라 전해지는 전설적인 기예 중 하나였다.
“…….”
허나.
이벽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래전, 취풍신개는 이벽에게 짐승의 뼈를 사용하여 이와 같은 기예를 보여준 적이 있었으며.
당시 취풍신개는 요령을 안다면 목천의 수준에서도 충분히 펼칠 수 있는 기예에 불과하노라 말했다.
그리고.
등천의 경지에 접어듦으로써 주변의 기를 다룰 수 있게 된 이벽에게는 더욱 손쉬운 일이 되었다.
훅, 서걱.
“…커억!”
‘요령’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시도해본 적도 없는 기예가 그저 의지만으로 이벽의 손끝에서 손쉽게 펼쳐졌다. 그리고.
신음과 함께 마지막으로 주저앉은 것은 이벽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선우굉이었다.
후욱, 덥석.
그리고 장내를 한 바퀴 선회한 검이 마침내 다시 이벽의 손안으로 되돌아왔다.
“…크윽.”
“으윽… 큭…….”
그리고 한순간 마당 안에는 혈향과 함께 무거운 경악, 공포가 내려앉았다.
세가의 무인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검상을 입었음에도 신음조차 마음껏 뱉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자신들이 누구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는지를 이해했으며, 또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한기가 무인들을 사로잡았다. 흡사 마당 전체에 살얼음판이 깔린 듯했다. 허나.
“죽이지는 않겠소.”
철컥, 이벽은 검을 거두었다.
“말마따나 당신네들 입장에서야 집안의 귀물을 내가 받아 챙긴 셈이니… 목숨값은 대신 치른 것으로 하지.”
툭툭.
이벽은 선우굉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장로를 포함한 주변의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뭐, 당신들 가주께 감사하시오.”
부르르르.
선우굉의 몸이 떨렸다.
핏발 서린 두 눈이 이벽을 올려다보았으나 공허하게 벌어진 입은 말을 뱉지 못했다.
“만수무강하시오, 그럼.”
저벅.
이내 이벽은 마당을 마저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맞은편의 노인에게로 다가섰다.
“이만 들어가지, 노인장.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 그렇게 하지.”
선우각이 답했다.
마당에 널브러진 ‘세가의 전력’을 바라보는 노인의 입가에 짧은 쓴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허나 이내 돌아섰다.
그리고 이벽과 선우각은 모옥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누구도 막아서지는 못했다.
* * *
두 사람은 방 안에 마주 앉았다.
한동안 방문 바깥에서는 세가의 무인들이 서로를 수습하고 부리나케 달아나는 기척들이 요란하게 이어졌다.
“자, 우선은 차나 한잔하면서 숨이라도 돌리시게. 퍽 긴 이야기가 될 테니 말이오.”
허나 노인은 어딘가에서 이가 나간 찻잔 두 개를 꺼내왔다. 주전자를 들어 찻물을 따랐다.
퍽 느긋한 몸동작이었다.
“…….”
문득 이벽은 이해했다.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노인은 주변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벽은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들이킨 순간, 깜짝 놀랄 만큼 쓴맛이 감돌았다. 이벽의 미간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차 맛이 어떻소?”
“…무척 쓰군. 이런 차도 있소?”
“그야 당연하지. 마당에서 캐낸 잡초의 뿌리를 태워서 적당히 우려낸 거니 말이오.”
“…….”
“이 늙은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찻잎 따위를 즐기겠소? 그래도 걱정 마시오. 그런대로 물 대신 마셔도 죽지는 않더구려.”
푸핫핫, 노인이 웃었다.
그리고 이내 문 바깥에서의 인기척이 모두 사라졌고, 아침의 고요함이 서서히 주변을 메웠다.
“그래. 무엇을 얻으셨소, 소협?”
다시 노인이 말했다.
“…….”
이벽은 잠시 할 말을 고민했다.
물론, 동굴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이 노인이었으므로 ‘유품’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며, 감출 이유도 없었다.
이벽은 동굴 안에 남아있던 진법, 그리고 그 환영 속에서 겪은 것들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다.
이내 이야기는 거듭되는 죽음 속에서 스스로 ‘새 경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고 마침내 벽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이르렀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부르르,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켰다.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더럽게 쓰군.”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젊었을 적에는 근 몇 년 이상을 그 동굴을 찾아내기 위해 세월을 허비했다오. 허나… 찾아내지 못한 게 나에겐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구려.”
“…….”
이내 쓴웃음이 감돌았다.
“성취를 축하하오, 소협.”
“…별말씀을. 노인장 덕분이오.”
“고작해야 약관 남짓한 나이에 천하에도 적수가 몇 없는 절대자가 되셨으니… 소협의 스승께서는 소협이 퍽 자랑스러우시겠소.”
이벽의 눈가가 흔들렸다.
탁, 노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 다시 한번 묻지. 소협을 키워낸 스승은 대체 누구시오? 우선은 그 사실을 분명히 해야겠소.”
“…….”
앞서 노인은 이벽의 손에서 펼쳐진 창공비검을 보고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는 거듭해서 ‘스승의 정체’를 캐물어왔다. 허나.
“나도 모르오.”
이벽은 어제와 같은 답을 했다.
큭, 그 순간 노인이 이를 악물었다. 허나 이벽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오래전, 나는 내 혈육, 그리고 동생이라 믿었던 이들에게 등을 찔리고 절벽에서 떨어져 한 번 죽었소.”
“……!”
“허나 그때, 다 끊어진 이 목숨을 구해준 분이 계셨소. 심지어 단전을 잃은 이 몸을 거두고 새 삶과 새 이름, 그리고 검을 전수해주셨지. 그렇게 지금의 내가 있소.”
“…….”
“허나… 나는 아직까지도 그분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소. 다만 하오문에 적을 두고 계셨고, 그렇게 나 역시 하오문과 연이 닿게 되었지.”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담 지금은 어디 계시오?”
“…지금은 계시지 않소.”
“…….”
노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허나 이벽은 이 노인에게 혈마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결국.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같았다.
이진천과 선우명.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었다.
“…….”
그때, 불현듯 이벽은 노인에게 동굴에서 있었던 일들 중 한 가지 이야기를 빠뜨렸음을 깨달았다.
이내 이벽은 그 안쪽에 남아있던 ‘스승의 흔적’과 함께, 자신이 그 동굴에 들어갔던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했다.
다시 선우각의 눈이 흔들렸다.
“…역시 그렇군.”
하핫, 노인이 작게 웃었다.
노인의 얼굴에 회한이 스쳤다.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구려.”
허공을 올려다보는 노인의 탁한 눈빛은 마침내 무언가를 짐작한 듯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요? 나는 아는 것을 전부 말했으니, 노인장께서도 내게 얘기해주시오.”
“…암, 그래야지.”
다시 노인이 이벽을 향했다.
허리춤에 걸린 검을 바라보았다.
“소협이 익힌 ‘그 검’ 말이오.”
노인의 표현은 애매했으나 알아듣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창공비검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
“내 아버지의 성명절기였지. 허나 나는 끝끝내 그 검을 익히지 못했소. 밤낮으로 뼈를 깎으며 수련했으나… 흉내조차 낼 수 없었지.”
노인에게는 재능이 부족했다.
때문에 ‘고작’ 한 번에 하나의 무리를 펼쳐낼 뿐인 청강유엽검식을 익히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아버지에게 있어 평생 실패한 자식이었소.”
“…….”
“아니, 그뿐만이 아니지. 이 ‘선우세가’ 자체가 그에게는 실패작이나 다름없었소.”
노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검치 선우명은.
마교와의 전쟁이 일단락된 후, 몇몇의 혈족들을 이끌고서 운남 곤명에 자리 잡고 터를 세웠다.
그것이 선우세가의 시작이었으며, 물론, 이벽 역시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허나.
“애초에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시겠소?”
불현듯 노인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검 한 자루에 미쳐 혈혈단신으로 방랑하던 사내가 왜 갑자기 혈족 따윌 챙기고 연고도 없는 땅에 정착하여 세가를 세웠는가,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오.”
“……!”
이벽은 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허나 노인 또한 딱히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검치 선우명은 스스로 창안한 검이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른 이후, 무수한 강자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어왔다.
물론, 항상 이긴 것은 아니었으되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검공을 계속해서 정립해나갔다.
“…….”
이벽은 문득 기억을 떠올렸다.
환영의 기억 속에서, 마교의 우호법 풍마를 베어내고도 선우명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허나.”
그때였다.
“그러던 와중, 내 아버지는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소.”
“……?”
“어째서 방랑을 그만두고 세가를 세웠느냐, 그 답은 간단하오. 누군가를 만나 변명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패배’해버린 거지.”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아마도 그건… 단순한 패배는 아니었겠지. 그간의 방랑을 통해 쌓아왔던 모든 게 무너질 만큼, 지독한 절망을 맛본 모양이오.”
“…….”
선우명은.
이벽이 환영을 본 시점에서 이미 등천의 경지에 이른 절대자였으며, 이는 즉, 당금의 천하십대고수에 필적하는 강자였다는 뜻이다.
패배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만큼의 ‘압도적인 패배’는—
“소협, 답도 없는 미치광이였던 내 아버지를 그리도 처참하게 무너뜨린 상대가 누구였는지 혹여 알겠소?”
허나 그때, 이벽의 생각을 짐작한 듯 노인이 다시 물었다. 물론 이번에도 이벽은 답하지 못했다. 허나.
“마교의 우호법까지 베어낸 이가 그 다음으로 도전장을 내밀만한 이가… 대체 누구였을 것 같냔 말이오?”
“……!”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이 이벽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나 이벽은 차마 섣불리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대신 노인이 답을 꺼냈다.
“물론, 마교주 천마(天魔)였소.”
* * *
“…….”
이벽은 침묵했다.
오십여 년 전, 마교 세력은 중원을 침공했으며 그 압도적인 무력과 잔혹함으로 말미암아 정사를 막론한 전 강호무림을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리고 천마(天魔)란.
그러한 마교의 교주이자.
정점에 선 존재이기도 했다.
당시의 무림을 대표했던 절대고수들 중 어느 누구도 그 행보를 막아서지 못했으며.
그저 동귀어진에 가까운 다 대 일의 싸움을 통해 간신히 목숨을 끊어냈노라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공포와 절망의 상징이 된 그 호칭은 마교를 무찌른 후,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금기시되어왔다. 허나.
“내 아버지는 천마에게 도전했고, 당연하게도 패배했던 모양이오. 그것도 비참하게, 아무런 손조차 써보지 못하고.”
“…….”
노인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선우명은 본인이 평생에 걸쳐 완성하고자 했던 검보다 ‘더 완벽한 것’을 천마의 검에서 봐버렸고.
심지어는 죽지조차 못했다.
검치를 쓰러뜨린 천마는 그의 숨통을 끊지 않았고, ‘죽일 가치조차 없다는 듯’ 그대로 방치한 채 떠나버렸다.
이후.
선우명은 방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선우세가를 세웠다.
그것은 즉, 평생을 다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막혀버린 이가 핏줄을 통해 머나먼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최후의 집념이자 몸부림이었다.
“허나 문제라면… 그런 원대한 계획 속에 태어난 게 고작 나였던 점이지.”
노인이 다시 쓰게 웃었다.
선우명의 기대와는 달리, 그가 낳은 장자 선우각의 검에 대한 재능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으며.
여타 혈족들은 그마저도 미치지 못했다. 이내 선우명은 그나마의 가능성인 선우각을 마구 몰아붙였다. 허나.
“세월이 흐르며 나와 아버지는 서로를 증오했지.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는 병마가 깊어졌고, 나는 세가를 지켜야 했소.”
“…….”
그렇게.
끝끝내 창공비검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남은 선우각의 ‘청강유엽검식’은 선우세가의 비전절기가 되었다.
“헌데… 늘그막에 낳을 생각도 없던 아들을 낳고 보니 내 아버지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재능이 내 아들에게서 엿보이더군.”
“……!”
“…지금 생각해도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소. 좌우간 그 아이의 죽음을 포함해 모든 것은 결국 내 탓—”
“…그만.”
이벽은 노인의 말을 막았다.
“그 이상은 내가 알아야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할 말은 그런 게 아니지 않소?”
이벽은 갈 길이 바쁘며.
생각해야 할 것들 또한 많았다. 시시콜콜한 옛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렇군.”
노인이 목소리를 달리했다.
“어쩌다 보니 또 얘기가 좀 새어버렸군.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 그래서… 그 이후의 내 아버지에 대해서인데 말이오.”
“…그 이후?”
이벽이 답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노인장의 부친께선 병마가 깊어져 세상을 떴노라 하지 않았소?”
“…병마라.”
노인이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