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38)
244화. 검이 날다
후우욱.
이벽의 몸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새처럼 표홀한 움직임으로 동굴이 자리한 절벽으로부터 벗어났다.
물론 창공비검의 경신법이었으나.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저 바람에 몸을 얹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흐름’에 올라탔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한 번의 발디딤도 없이 일각 이상을 ‘날았음’에도, 이벽의 몸은 조금도 고도가 낮아지지 않았다.
‘허공답보(虛空踏步).’
핫, 이벽은 웃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허나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심안을 열고 등천의 영역을 해방하게 됨으로써 손에 넣게 된 힘은 스스로도 그 한계를 헤아리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몸은 한없이 자유로웠고.
주변을 에워싼 투명한 나뭇잎들은 그 한 장 한 장이 모두가 ‘작은 검’이 되어 이벽의 의지에 따라주었다.
그 ‘다루는 방식’은.
생각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했으며, 이처럼 목천의 기예조차 뛰어넘는 일들이 가능해진 것이다.
후우욱.
심지어 성취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천의 영역을 끌어올림에 있어, 더는 의식적으로 선천의 힘을 두 갈래로 나눌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진법의 깨달음 속에서.
상단전은 확장되었으며, 그 안에는 당연하다는 듯 선천의 힘의 일부가 똬리를 틀고 주저앉았다.
마치 이제서야.
‘제집’을 찾은 듯했다.
이에 목천의 영역에 접어드는 것은 그저 내력을 이끌어 강기를 일으키듯, 손쉬운 일이 되었다.
“…….”
이벽은 문득.
모든 걸음걸음이 ‘쾌보’와 같았던 취풍신개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이라면 아마도—
우우웅.
허나 그때였다.
심안의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자 작은 이명이 일었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심, 기, 체는 하나로 엮여있다.
과거 목천의 힘에 눈을 떴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경지에 익숙해지기 위해선 몸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탁.
이내 이벽은 내려섰다.
평범하게 걷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산길을 따라 이벽이 향하는 곳은 선우세가주 선우각이 머무르고 있던 모옥이었다.
노인은.
‘할 말’이 남아있으니 무사히 동굴을 벗어나거든 자신에게 다시 찾아오라 말했다.
이벽은 조금 망설였으나.
이내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찌 되었건 노인에게는 신세를 졌으며, 또한 남은 할 말이란 게 무엇인지도 신경쓰였다.
등천의 힘을 얻었으되.
선우명과 이진천 사이에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저벅, 탓.
이벽은 왔던 길을 되짚었다.
이내 모옥 인근까지 도착했다.
멈칫.
허나.
이벽은 불현듯 걸음을 멈춰섰다.
밝아오는 햇살 아래, 저만치 모옥이 자리한 공터에서 적지 않은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형님.”
콰앙, 선우굉이 발을 굴렀다.
“어서… 바른대로 말하시오! 대체 왜 그리 버티는 거요? 도대체 왜?! 놈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고 있지 않소?!”
“…….”
어투는 퍽 날카로웠다.
선우각의 모옥이 자리한 공터에는 십 수명에 달하는 세가의 무인들이 몰려들어 있었으며.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노인은 물론, 선우세가주이자 모옥의 주인인 선우각이었다. 허나.
“아 글쎄, 제 놈이 멋대로 찾아왔다가 밥 한 끼 해 먹고 떠나간 걸 내가 어찌 아나?”
무인들에게 둘러싸이고서도.
노인의 신색은 태연하기만 했다.
“…끝끝내 이렇게 나오실 거요?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구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소?”
“의미는 무슨, 선우굉, 네놈이 드디어 내 목을 따기라도 할 셈이냐? 아니면 네놈들이?”
크핫, 노인이 웃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둘러싼 무인들의 안색이 작게 흔들렸다.
내력과 함께 세가에 대한 모든 실권을 잃어버렸을지라도 노인은 여전히 명목상의 가주였으며, 한때나마 그들이 모시던 사내이기도 했다.
채앵.
허나 그때였다.
“…형님, 더는 못 참겠소.”
선우굉이 검을 뽑아 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발뺌할 셈이오? 아니면 이제 와서 하나뿐인 아들이랍시고 뒤늦은 변덕이라도 생긴 거요?”
핫, 선우굉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늘한 검신이 노인을 향해 겨누어졌다.
“노망이 들었나 본데, 착각하지 마시오 형님. 놈을 쳐낸 것은 분명 내 뜻이었지만, 모든 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세가를 엉망으로 방치했던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아니었소?”
“…….”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슥, 노인의 고개가 꺾어졌다. 서슬퍼런 검을 눈앞에 두고도 노인의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암, 물론이다마다.”
이내 노인이 말을 꺼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더 이상 가주도 애비도, 그 무엇도 아닌 그냥 늙은이지. 애초에 어느 것도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헌데 어째서—!”
“허나 선우굉, 그럼에도 나는 아버님의 장자이자 후계이다. ‘물려받은 유품’ 정도는… 내 뜻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지. 그렇지 않나?”
“…이익!”
“놈은 그저 ‘생판 남’일 뿐이다. 허나 최소한 너와 나보다는 한없이 아버님에 가까웠고, 그래서 내 기꺼이 아버님의 뜻을 전달해주었지. 그뿐인 일이다.”
서걱.
선우굉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툭, 근처에 있던 울타리가 날카롭게 베어졌다.
“아버님의 유품은… 형님이 아니라 우리 세가의 물건이오! 왜 그걸 모른단 말이오!”
“핫, 누구 맘대로?”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군.”
다시 선우굉이 말했다.
스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형님께서도 고집을 꺾으실 거라 믿었소. 헌데… 이제는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군.”
후욱.
이내 모옥의 주변으로 절정고수의 무거운 기세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형님께선 기어코 나로 하여금 천륜을 저버리게 만드는구려. 좋소. 모든 게 이미 엎질러진 물이오. 당신이 내팽개친 세가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라면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겠소?”
끼이익.
허나 그때였다.
울타리의 낡은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인영 하나가 들어섰다.
* * *
“…허억!”
“저, 저기… 노, 놈입니다—!”
“…….”
짧은 소란이 일었다.
인영은 물론 이벽이었다.
이내 주변을 둘러싼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벽에게로 집중되었으며, 선우굉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이벽은 잠시 할 말을 고민했다.
의도치 않게 울타리 밖에서 대화를 엿듣게 되었고,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도 대강 이해가 갔다.
물론.
가주 선우각과 외당주 선우굉,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이벽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남일이었다. 허나.
다만 이벽에게는 아직 노인으로부터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요?”
이내 이벽이 말문을 열었다.
“당주께서는 대체… 나를 뒤쫓아서 어쩌려고 했소? 기습이라도 시도할 작정이었소?”
흠칫, 선우굉의 표정이 흔들렸다.
허나 이내 곧 눈빛이 무거워졌다.
“…내 하나 묻겠소. 소협께선… 본가의 전대 가주이자 시조이신 분의 유품을 손에 넣었소?”
“뭐, 그렇게 되었소.”
이벽이 어깨를 으쓱했다.
술렁, 동요가 번져나갔다.
“…그 물건은 본가의 귀물이니 부디 돌려주시길 바라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소.”
“…귀물이라.”
핫, 이벽은 웃었다.
“당주께선 그 ‘물건’이란 게 대체 뭔지는 알고나 하는 말씀이오?”
“…….”
선우굉의 미간이 흔들렸다.
검치 선우명이 남긴 것은.
진법, 혹은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었다.
허나 물론, 창공비검을 익히지 못한 이들로선 동굴을 찾아낸다고 한들 진법을 발동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마저도 이미 부서져 버렸다.
“…소협께서는 분명, 본가와는 더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소?”
다시 선우굉이 말했다.
딴에는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사 년 전, 이벽은 선우세가와의 은원을 청산했고, 무림을 떠나기 위해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었다.
허나.
이벽에게는 다시 무림으로 나와야 할 이유가 생겼으며, 이진천에 대한 단서를 찾아 이곳에 도착했고, 검치의 진전을 이어버렸다.
선우세가를 이끄는 입장에서 ‘귀물’을 빼앗긴다 여겨지는 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물론.
이제 와 과거의 빚이 어떻고 소가주가 어떻고 운운할 생각은 없었다. 구구절절한 변명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당주의 마음은 이해하오.”
“…….”
“허나… 미안하지만 돌려줄 수는 없게 되었소. 정확히는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줄 수가 없는 물건이거든.”
채앵, 채앵!
“이노옴—!!”
“어디서 감히 하찮은 말장난을 지껄이느냐—!! 당주! 더는 앞뒤 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이내 분개한 장로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벽은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벽이 기억하는 한 선우세가의 핵심에 해당하는 다섯 명의 장로가 한자리에 모두 모여있었다.
선우굉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의 절정고수가 있었으며, 그 밖의 무인들 역시 세가의 주축에 해당하는 무인들이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선우세가의 ‘전력’이었다.
“괜찮겠소, 당주?”
이벽이 팔짱을 꼈다.
“…….”
다시 선우굉의 눈이 흔들렸다.
이벽이 선우세가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 이미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고 이벽은 그때에도 선우굉에게 ‘경고’를 했다.
그리고.
본능을 자극하는 직감에 의해.
선우굉은 싸움을 포기했다. 허나.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군. 허나 소협께서 선을 넘어버렸으니 다소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마냥 참아 넘겨줄 순 없지 않겠소?”
“…‘참아넘겨준다’라.”
돌이켜보면.
오래전, 이벽이 선우굉을 처음 상대했을 때는 아직 목천의 영역에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고.
이후 사 년 전, 회택에서 다시 맞붙게 되었을 때조차 이벽은 선천의 힘 대부분이 봉해진 채 한껏 약해진 상태였다.
때문에.
두 번이나 싸움을 하고도.
선우굉은 눈앞에 있는 자신과의 ‘실력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철컥.
이벽은 검을 잡았다.
“노인장.”
그리고 가주 선우각을 향했다.
“노인장께서 내게 ‘유품’의 위치를 가르쳐 준 건… 내게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오?”
“…그렇지. 그렇고말고.”
“헌데… 이들은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군. 어쨌건 당신은 선우세가의 가주인데 말이오.”
“…….”
“여기서 피를 봐도 괜찮겠소?”
어찌 되었건.
자신은 무림으로 돌아왔고, 늦건 빠르건 손에 피를 묻힐 각오 정도는 되어있었다.
꿈틀, 노인의 눈매가 흔들렸다.
“…내 어찌 말리겠소? 지은 죄가 있고, 뭣보다 상대를 보는 눈조차 없으니 죽는 것도 다 제놈들 팔자지.”
이내 노인이 말했다.
허나 하는 말과는 달리 눈가에는 탐탁잖은 주름이 감돌았다. 이 지경에 이르고서도 혈족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많이 늙으셨구려, 노인장.”
핫, 이벽은 작게 웃었다.
저벅, 이내 걸음을 떼었다. 그대로 마당을 가로질러 노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선우굉과 가까워진 순간.
타앗.
“……!”
선우굉이 흠칫 몸을 떨며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허나 이벽은 그대로 선우굉을 지나쳐버렸다.
시선조차 향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안중에도’ 없었다.
“…이노오옴—!!”
한발 늦게 본인이 무시당했음을 깨달은 선우굉이 그제야 일갈했다.
타아앗.
“쳐라—!!”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선우굉을 포함한 여섯의 절정고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동시에 다른 무인들이 포위망을 형성했다.
우우웅.
사방에서 강기가 번뜩였다.
철컥, 이벽은 검을 뽑아 들었다. 밀려드는 다수의 무인들은 적의를 품고 있되, 딱히 이벽의 적수라 할 수조차 없었다. 고로.
“…….”
목천의 영역 속에서.
이벽은 짧게 고민했다.
이내 이벽은 눈을 감았다. 심안을 뜨자 주변에 들어찬 나뭇잎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후욱.
이벽이 의지를 품었고.
이에 나뭇잎들이 검신을 감쌌다.
우우웅.
이내 검신이 희미하게 진동하며, 이벽의 손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허공답보가 가능하다면.
검 또한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훅, 서걱.
“이노옴! 내 드디어 지난날의 치욕을 되갚… 커억!”
이벽의 검이 ‘날았다’.
삼 장로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적어도 다른 무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삼 장로의 몸이 사선으로 피를 쏟아내며 땅으로 추락했다.
“…무, 무슨—?!”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서걱, 서걱.
“…커억!”
“허어억—!”
허나 시작에 불과했다.
그 순간 ‘하늘을 나는 검’이 사방을 노니며 장로들의 몸뚱아리를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훅.
기세 좋게 뛰쳐 오른 장로들은.
일제히 피를 쏟아내며 추락했다.
또한 애써 끌어올린 강기들은 채 휘둘러지지조차 못한 채 이곳저곳의 땅에 처박혔다.
후우욱, 서걱.
이벽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허공을 누비며 춤을 췄으며.
장내 이곳저곳에 피를 흩뿌렸다.
탱그랑, 탱그랑.
수많은 검들이 손에서 떨어졌고.
털썩.
“마… 말도 안 돼…….”
누군가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이… 이기어검(以氣於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