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53)
259화. 잠영난봉, 금광선봉 (1)
“세 줄기로 갈라졌던 물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질 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르지. 흐름이 그렇게 되어버린 이상, 거스르기는 어려운 걸세.”
“……!”
“그러니… 무림으로 돌아왔다면 어느 곳을 밟고 설 건지, 자네의 입장을 확실히 하게.”
독왕이 말했다.
그리고 이벽은 그 목소리에서 자신을 향한 일말의 걱정과 우려를 읽어내었다.
손녀를 인질로 붙들리고도… 당평세는 여전히 이벽에게 무언가의 가르침을 전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구려.”
이벽이 답했다.
“어찌 되었건 단호해져야겠지.”
“…허헛!”
당평세가 재차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 또한, 오 년 전의 당평세가 이벽에게 전해주었던 충고이기도 했다.
허나 이벽은 다시금 머리가 복잡해졌다. 물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스승의 원수인 혈마를 쫓는 일이었다. 또한.
‘…마교.’
이벽은 선우각과 정룡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후우, 이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 소저.”
“…네?”
이벽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당려옥의 표정이 흔들렸다.
“가시오.”
이벽이 당평세를 향해 턱짓했다.
“역시… 신세를 진 이를 상대로 큰소리를 치는 건 영 못 해 먹을 짓이군.”
“…그냥 가라고요? 그래도 돼요?”
“그렇소. 달리 어쩌겠소?”
이벽은 다시 당평세를 향했다.
“어찌 되었건 노야. 최소한 ‘당분간만큼은’ 평화를 부탁드려도 되겠소? 제 입장에 대해서라면… 조만간 생각을 정리하여 당가 측에 전해드리도록 하겠소.”
“…당분간이라.”
“어찌 되었건… 당가와 싸우고 싶지는 않소. 무인으로서 노야께 도전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오.”
“…허헛!”
당평세가 수염을 쓸었다.
“뭐, 나도 가능하면 자넬 해치고 싶지는 않아. 자네는… 내가 평생 동경했던 분을 너무 닮았거든.”
“…….”
핫, 두 사람은 웃었다.
허나 여전히 처한 입장은 달랐다.
“그래, 언젠가는… 우리가 칼을 맞대야 할지도 모르겠군. 허나 그게 오늘은 아니네. 그리고 자네의 말마따나 ‘당분간은’ 평화를 지킬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지.”
다시 당평세가 웃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 * *
슥.
“자, 이거 받아요, 정 소저!”
당려옥이 젓가락으로 만두를 집어 들었다. 정연화의 앞에 놓인 접시 위에 다소곳이 올려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뭐하긴요. 만두 덜어주는데요? 물론 소녀가 사는 거니까 걱정 말고 맘껏 드셔요~”
정연화의 떨떠름한 표정이 당려옥의 얼굴과 접시 위의 만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치워요.”
“응? 왜요? 맛있는데? 혹시 아직도 속이 별로인가요? 이래 봬도 이 객잔이 이 동네 숨은 맛집—”
“난 불자라서 고기 안 먹는다고!”
“아, 그거야 당연하죠! 걱정 마요, 소저를 위해 특별히 채소랑 두부만 넣은 걸로 주문했으니까~”
타앙!
정연화가 탁자를 두드렸다.
“시끄러워요! 고기가 아니면 독이나 처넣었겠지! 그쪽이 주는 걸 내가 미쳤다고 받아먹어?!”
반응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아미의 물길에 독을 푼 것은 당려옥이다. 비록 죽은 이는 없다고 해도 그 은원이 쉽게 풀릴 리 없는 것이다.
“어머나, 아쉬워라. 맛있는데~”
허나 당려옥은 거듭 매몰찬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해서 정연화에게 말을 붙였다.
“…….”
이벽은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서천무존 정룡, 그리고 독왕 당평세와의 협상 아닌 협상을 치렀던 것은 바로 어제 일이었다.
“이렇게 하지.”
‘당장은 싸우지 않고 평화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당평세는 이와 같이 말했다.
“내 손녀딸, 안 돌려받겠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일세. 한동안은 계속해서 자네가 인질로 데리고 있게나.”
“…….”
이벽은 말문이 막혔다.
“어? 정말요? 그래도 돼요?”
“그럼, 물론이다마다. 내 가주한테는 잘 말해둘 테니 걱정 말고 그 녀석한테 붙잡혀있거라.”
“네, 할아버지. 아싸~”
“…잠깐. 내 말을 좀—”
다음 순간, 이벽을 제외하고 조손간의 대화가 진행되어버렸다. 이벽은 서둘러 반론하려 했다. 허나.
“그래도 괜찮겠지? 응? 별로 자네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나? 우리에게도 입장이란 게 있어서 말이네.”
다시, 당평세가 말을 꺼냈다.
“직계 혈육이 적에게 붙잡혀있는 동안은… 맹에서 무엇을 원하건 우리 당가로서도 ‘움직일 수 없는 구실’이 되어줄 테니 말일세.”
“……!”
그것은.
분명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허나 대화의 진행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자, 그럼 그렇게 알겠네!”
훅, 당평세의 독이 거둬졌다.
“부탁이니 굶기지는 말아주시게. 뭐하면 자잘한 여비 같은 건 모조리 당가에 달아둬도 괜찮으니. 그럼 나도 가보겠네. 자네만 믿겠네. 잘 부탁하네~”
그리고.
행여나 이벽이 붙들 것을 염려하는 듯, 독왕은 무색무취의 독처럼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후우.”
불쑥.
“소협, 무슨 생각해요?”
그때였다.
당려옥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그제야 이벽은 어제 일에 대한 회상에서 벗어났다. 눈앞에 들이 밀어진 당려옥의 하얀 얼굴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어찌 되었건, 당평세의 제안에 의해 이벽은 그녀의 다시 신변을 떠맡게 되었다. 허나 더는 ‘인질’이라고 말하기도 우스운 상황이었다.
무림에서 자신이 처한 입장은.
당연하다는 듯 점점 난해해졌다.
“그래요, 그럼 소협도 어서 식기 전에 드세요~”
당려옥의 눈이 호선을 그었다.
이벽과 당려옥, 정연화는 여느 객잔의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고, 이벽의 접시 위에는 김이 나는 만두가 올려져 있었다.
당려옥이 덜어준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요. 이 집 요리는 저희 당가에서도 인정한 사천요리의 정수—”
“으, 은공!”
그때 정연화가 다급히 외쳤다.
“그 여자가 주는 걸 받아먹지 마세요! 보나 마나 분명 독이 있을 거예요!”
“어머, 그럴 리가요~”
“에잇—!”
덥석.
다음 순간, 정연화가 이벽의 접시 위에 놓인 만두를 집어 들었다. 그대로 자신의 입에 밀어 넣었다.
“어머?”
당려옥이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욱!”
다음 순간.
정연화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툭, 한 입 베어 문 만두가 젓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채 접시 위로 떨어졌다.
“…컥, 허억!”
두 손으로 입가를 움켜쥔 채, 정연화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당황한 이벽이 당려옥을 향했다.
“당 소저, 이게 무슨—”
“아뇨, 저 독 안 썼어요. 진짜로요. 제가 소협 앞에서 감히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도리도리.
당려옥이 당황한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덥석.
그때, 젓가락을 내팽개친 정연화가 이번에는 물잔을 집어 들었다. 벌컥벌컥, 한입에 털어 넣었다.
“…흑! 으아악!”
그것으로도 모자라 물 주전자를 들고 통째로 들이켜기 시작했다.
“…….”
이벽은 자초지종을 이해했다.
분명히 독은 아니었다. 다만.
정연화가 한 입 베어 물고 떨어뜨린 만두의 안쪽으로 붉다 못해 시커멓게 물든 속 알맹이가 드러났다.
“매, 매워—!! 이 악독한!”
“…그런가요?”
“하아… 헉!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군요! 음식에 장난질이라니, 이런 걸 사람이 먹을 수 있을 리—?!”
“어디 보자.”
덥석.
다음 순간, 정연화가 떨어뜨린 만두를 당려옥이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입에 삼켰다.
“…힉!”
일순 정연화의 표정이 흔들렸다. 허나 오히려 만두를 삼킨 당려옥의 안색은 태연하기만 했다.
“…이상하다. 맛만 있는데?”
“…….”
“소저도 나와 같은 사천 사람인데… 겨우 이 정도가 그렇게 매운가요?”
“큭……!”
정연화가 이를 악물었다.
“아, 그렇구나. 평생을 절밥만 먹었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미안해요, 소저.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호홋!”
당려옥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누… 누가 당신 따위에게—!”
다음 순간, 정연화가 분한 얼굴로 새 만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허나.
“…흐윽!”
툭, 만두가 다시 떨어졌다.
정연화의 눈물도 함께 떨어졌다.
“…무리하지 마시오.”
이벽은 시커먼 만두 속을 바라보았다. 딱히 증거는 없었으나, 왠지 이벽은 당려옥이 이 상황을 의도했으리란 직감이 스쳤다.
어쨌거나 다시 밤이 저물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리고 다음 날, 하남의 소림을 향한 여정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세 사람은 말을 구해서 타고 달렸다.
아미에서 타고 나온 마차는 서천무존 정룡의 습격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파괴되어버렸고, 시퍼렇게 질린 마부도 도망치다시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더는 호송할 인질도, 부상자도 없으므로 굳이 속도가 떨어지는 마차를 고집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이후.
사흘 정도가 지나자 세 사람은 마침내 사천과 하남의 경계에 접어들었다.
서산에서 서서히 해가 저물었다.
다그닥.
“…하룻밤은 묶어가야겠군.”
그리고 이벽은 말을 멈추었다.
여정에 익숙지 않은 정연화를 생각해 가급적 노숙을 피하려 했으나 하룻밤은 피치 못하게 되었다.
졸졸졸.
그리고 이벽은 물가를 찾았다.
물론, 노숙을 위한 장소를 찾는 건 퍽 이골이 나 있었다. 계곡 인근의 공터에서 세 사람은 말을 매어둔 채 자리를 골랐다.
불을 피웠고 끼니를 때웠다.
“정 소저~ 모처럼의 기회인데 같이 계곡에서 목욕이라도 하지 않을래요?”
“칵! 미친 소리!”
그리고 지난 며칠간 줄곧 그랬던 것처럼 어김없이 당려옥과 정연화의 티격태격이 이어졌다.
아니, 그것은.
티격태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방적인 친교의 표현과 매몰찬 밀쳐내기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에이, 그러지 말구요~ 지금이라면 당가 비전의 백옥같은 피부 미용술을 전수해 줄 수도—”
“카악! 썩 꺼져라, 이 마구니야!”
“…호홋!”
허나 당려옥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연화의 날이 선 반응을 다소 즐기는 듯했다.
허나 어찌 되었건.
당려옥은 그녀 나름대로 정연화의 마음을 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서천무존 정룡이 마차를 습격했던 때, 정연화가 위험을 무릅쓰고 청성제일검 공능자로부터 당려옥을 구해주었기 때문일 터였다.
당가의 무인은.
은원을 잊지 않는다.
슥.
그때 이벽은 인기척을 느꼈다.
다가선 것은 물론 당려옥이었다.
“소협은 어때요? 같이 목욕?”
“…나도 됐소.”
“그래요? 이상하네.”
“뭐가 말이오?”
“소녀 같은 절색의 미녀가 달라붙어 있는데… 왜 소협은 전혀 동요를 안 할까요? 하긴 예전부터 그러긴 했지만요.”
“…….”
“흥, 천박하기는. 은공께서 당신처럼 세속된 욕망 따위에 놀아나는 속물인 줄 알아?!”
저만치에서 정연화가 쏘아붙였다.
“속물이라뇨?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요. 출가하기 전의 부처님께도 처자식이 있었다구요.”
“…어.”
정연화의 말문이 막혔다.
당려옥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생각해보면 저뿐만이 아니네요. 뭇 사내들이 동경하는 정파무림의 삼봉 중 두 명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는데… 소협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가요?”
“…….”
잠영난봉 당려옥.
금광선봉 정연화.
말마따나 두 사람은 정파의 수많은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던 여협들이었다.
출중한 무공은 물론이며.
이벽이 의식하려 하지 않았을 뿐, 꾸미지 않은 상태임에도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미모는 각자 다른 빛을 내듯 화사했다.
“아, 그러고 보니 소협, 옛날에는 정도맹주의 제자인 태극무봉과도 함께하고 있지 않았나요?”
다시 당려옥이 말했다.
“…뭐라고?!”
흠칫, 정연화가 흔들렸다.
“어머, 생각해보니 소협은 정파무림의 삼봉을 전부 다 꼬신 셈이네요? 정도맹에 의혈맹에 구 무림맹… 물론 사파의 여인들도 있었고요.”
“…….”
“역시 대단해요, 소협~ 이 기세로 강호를 종횡하다보면 여심폭격으로 무림일통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벌떡.
이벽은 튕기듯 일어났다. 그대로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당려옥이 옷자락을 붙들었다.
큭큭, 당려옥이 작게 웃었다.
“죄송해요. 농담이에요.”
“…….”
“헌데… 소협께선 정말로 여인에게 아무런 흥미가 없는 건가요? 이건 중대 사항인데.”
일순 이벽의 미간이 흔들렸다.
—어느덧 약관도 넘긴 녀석들이… 인생에 뭐가 정말로 중한지도 모르고 말야.
불현듯 스승의 목소리가 스쳤다.
“…불침번을 서겠소.”
“은공, 불침번이라면 제가—”
“소저께선 경험이 없지 않소?”
“그—”
당려옥과 정연화를 일견하며 이벽은 그대로 땅을 박찼다. 단번에 이 장 높이의 나뭇가지에 올라선 뒤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비로소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벽이 원하는 고요가 찾아왔다.
“…….”
이내 완연한 밤이 되었다.
이후로도 한동안 티격태격을 이어가던 당려옥과 정연화 역시 어느덧 불가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이벽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승의 복수를 하고, 사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마을을 나섰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과거의 은원과 현재의 무림에 뒤엉키며, 계속해서 입장은 난해해졌다.
그러한 와중에.
아직까지도 ‘평범한 삶’을 생각할 자격이 남아있는지, 이벽은 알 수 없었다.
두고 온 얼굴들이 스쳤고, 이내 이벽은 낙검문을 떠올렸다.
밤이 저물었다.